자작시 461

잠적

잠적 / 박영대 시가 갈망해 질때까지 그 때까지 숨어 보자 허실허실 바람에게 시간 내어 주고 낙엽처럼 헛 웃음 떨어 뜨리고 있다 새싹도 초록도 헐은 가슴 풀어내 제 계절을 장식했다 한철 아까와 말고 강물에 풀어 보자 걸음이 만들어 가는 비틀비틀 꾸불꾸불 이빨 자국도 내지 못하는 노쇄한 우물거림 색갈도 나오지 않은 어둑 어둠색 인연 꿰매는 가시되어 박히는데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나날이여 시절 바뀌는 소식 전해 듣고도 잇몸보다 이빨머리가 시리다

자작시 2011.10.25

가벼운 장난감

가벼운 장난감 / 박영대 세월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할애비보다 장난감 자동차를 좋아하는 손주놈에게서 세월을 배운다 울락불락 색조 자동차에 자존이 충돌한다 바퀴 성능이 진화한 질주 본능에 맞부딪친다 볼품없는 낡은 형체 수리할 수 없이 세월이 부서진다 가벼워진다 화물만큼 무거웠던 몸무게가 가벼워진다 수십해동안 버거움 줄이지 못한 내 결단성 먹고 마시고 기름 낀 헛무게 장난감 승객으로 올라타서 이리 타라면 이쪽으로 저리 타라면 저쪽으로 아직 버리기 아까운 착각 돌담 안 고물처럼 버티고 지킨 망상 칡넝쿨 감아 오르는 칭칭 동여맨 기억 저 여린 자동차에 질질 끌려 치워지고 있다 가벼워진 세월

자작시 2011.10.12

알프스

알프스( Alps ) 박 영 대 천 년을 열 번 더해 생명 하나를 키운다 무엇이 견뎌 내게 했는가 무엇이 참아 내게 했는가 저 아스라한 벼랑 끝에서 얼어붙은 물의 기원이 된 흰 가슴 덩어리 물들지 않으리라 끝내 물들지 않으리라 채색 거부하는 몸 트림 다짐 다짐하면서 저 높은 곳에서 얼고 있다 아무도 없다 큰 품에 껴안을 안개 같은 상대 찾지 못하고 내내 기다려 온 만년 또 만년 늦어도 좋다 오는 길 열어 두고 낡고 수줍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때도 없이 기다려 온 허구헌 날 소원도 바라지 않은 풀빛 간절함 있는 그대로 치장하고 있다 얼마나 문질러 온 옥빛 피부인가 누구에게 보여 줄 연한 부끄러움인가 닿기만 해도 스러지는 바람들의 바람 뼈 같은 바위에서 짜내는 차디찬 온기 한없이 내주기만 해 온 무수한 세..

자작시 2011.06.22

풍차

풍차 박 영 대 두 손 받쳐 들고 하늘을 돌린다 물을 돌린다 무서운 바다를 돌린다 회초리 같은 바람에 날개 벗고 허공에 몸 내맡긴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할 육신임을 거스르는 무지 뻗대는 몽매 미리 알아 채리고 수줍은 몸 가벼움을 진상한다 하늘에 바다 저 무지와 몽매에게 찢겨진 날개는 모진 머슴살이였다 쉼 없이 돌아가는 부서져 뼈 닳아짐은 자식 기르기 벗어서 바친 몸은 어미의 걸음걸이 본능 바람아 옷고름 풀어도 좋다 바람아 치마폭 찢겨도 좋다 지금 당하고 있는 수모는 차라리 나막신 모성애였다 찢겨진 치마는 대대손손 홍살문 난간에 형형색색 금줄로 걸어다오 고물고물 허연 젖 짜내어 문전옥답 키우고 있다 네델란드 풍차마을 Zaanse Schans ( 잔세스칸스 ) 저 뒤편에 바다 보다 낮은 마을이 숙명처럼 ..

자작시 2011.06.19

목리문

木理紋 박 영 대 일 십 백 천 백 정도는 되어야 세월이라 말할 수 있을까 구름이 새의 모이가 되고 달빛이 숲의 이불이 되고 그 동안 곧은 심성 변하지 않은 잡것들 뭉치고 이기고 주물러서 흔적으로 길을 내다 곧은 것도 아니요 굽은 것도 아닌 흐르는 걸음은 바람길이어라 하나의 흔적에 삼백예순날 꽃과 비와 우수와 눈물을 하나하나 새겼다 길지도 많지도 무겁지도 않는 바람같은 나날 혼백되어 그늘에 말려지면 일광보다는 달 어스름 바람과 강물이 되살아 난다 살아 온 나이테로

자작시 2011.05.27

꿈의 시

꿈의 시 / 박영대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시를 씁니다 평소에도 말 수 적은 젖가슴으로 아버지 보내고 난 후 자식에게 줄 서러움을 줄이고 줄여서 꼭꼭 묶어 풀어냅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요 어머니 사랑도 자식 앞에선 부끄럼인가요 그 슬픔 아직도 안으로 삭이렵니까 아들아 여기 좀 보아다오 이 대목에서 매듭이 안 풀리는구나 죽은 어머니도 막히는 생각 풀어내기 기쁜 속내만은 비치지 않으려고 참고 애쓰신 한평생 그게 몽땅 시였습니다 어쩌다가 잠결에 찾아오신 어머니가 희뜩희뜩한 모습으로 어려움을 나에게 호소한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신 어머니 그 체질까지 그대로 물려 주셨습니다

자작시 2011.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