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77

설야

설야 / 박영대 무심한 적막에 귀 열고 오시기를 뜬금없이 찾아온 눈 쌓인 밤에 가로등 뒤척이는 꽃 무늬 잠옷 소리없는 목소리 두어 계절 건너서 그런 적 있었는지 잊힐만해서야 어둠속에 희미해진 꽃으로 웁니다 철새 떠나간 길목에 멀어져 간 뒷모습 세월로 굳어 부옇게 휘날리는 바람 끝 하얀 나무 그립다 휘몰아 치는 종소리 전해줄 말 다 모아서 뿌린 허공에 그 높은 곳까지 마른 정 끌어다가 참을 수 없어 부서진 바람으로 저리 다 무지하게 쏟아내고서 내일은 어찌하시려고

자작시 2011.02.28

겨울 끝에서

겨울 끝에서 / 박영대 계절의 맏으로 나서서 가마솥에 얼음 조각을 누릉지처럼 눌리고 철새들 아랫목으로 이불 끝 벗어난 발이 차갑다 나무들 수행자처럼 무소유마저 버리고 낯빛 굳어져 있다 긴것도 아닌것도 말하지 않고 입 꼭 다물고 있다 왜 말 못 하는가 마무리 지으면서 궁색한 여유만 다져야 하는가 태어 날 아기 마중다리에서 부산하게 기다리고 있다 고드름 빙벽에 심을 박고 정지된 겨울을 걸어두고 왜 나는 추운 시만 써대고 있지.

자작시 2011.02.25

겨울엔 낙엽이 그립지 말입니다

겨울엔 낙엽이 그립지 말입니다 / 박영대 오래전에 예약됐던 숲길을 걷습니다 풍상에 시달린 가르마가 나 있는 길 거기엔 드문드문 하얗게 죽은 흰 머리가 생기고 시절이 말라 잘려도 아프지 않은 낙엽 그리운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느 일찍 오는 봄나물이라도 붙잡고 싶어 추위 가시지 않은 노변에서 호객하고 있습니다 눈물조차 보타진 뿌리들의 간절한 보챔 울긋불긋 지난날들이 아련해지고 찢고 짧아진 노출로 눈길 잡으려 죽은 후에 행복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제철에 나서 누리는 형형색색 때 놓진 후회를 온몸으로 때우며 무엇이 그렇게 굽어 사정하게 하는가 차이 나게 타고난 꽃들의 신분 귀하게, 우아하게, 폼나게. 바람 지난 후에 빈 몸 날리며 우수수 그립지 말입니다 낙엽이 망연히 바라보는 곳 이제 남은 수명이 그다지 길지 ..

자작시 2011.02.20

사진첩

사진첩 / 박영대 길에 이름을 붙이면 사진을 찍는다 처음 시작은 발가벗고 있다 돌사진처럼 당당히 벗고 있다 바위틈에서 솟아 나온 유년의 슬픔 하나쯤 띄엄띄엄 걸어 내려온 걸음걸이가 저장되고 단단한 신발로 갈아 신고 발을 맞춘다 잔잔한 평지에서 만난 기억에도 없는 개미떼와 높고 긴 낭떠러지에 갔다 온 소풍놀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시기와 질투들이 겨울 숲에서 떨고 있다 하나하나 주워든 둑길에는 깨다만 부스러기들이 쌓여서 눈을 피해 저금해 둔 잔액만큼이나 자기 얼굴에 찍어 바르고 나온다 닳고 닳아진 뻔뻔해진 바지차림으로 잘게 잘게 삭은 푼수 같은 들판 지나 펄이 되어 두터운 집을 짓고 그렇게 긴 계절을 얼렸다 녹였다 부수고 있다 바다에 있는 파도를 알지 못하고

자작시 2011.02.01

아파트, 죽부인처럼 눕다

아파트, 죽부인처럼 눕다 / 박영대 늦은 밤에 칸칸이 켜진 눈물입니다 욕정같은 어둠 차오르고 잠옷 갈아 입은 공동 침소에서 하루를 외박하려 합니다 하나 둘 꺼지는 함성같은 불빛 그림자로 대신해서 드러나는 하루치의 잠자리 파닥거린 만큼 헤집고 다닌 바닥에서 층층이 쌓인 연륜처럼 나이 들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결별한 새 깃 털갈이한 까닭을 모른 채 높아만 가는 아득한 공포에서 두려웠던 하얀 어지러움을 이물처럼 털어 냅니다 고개 쳐든 나무 꼭대기 낮아진 높이보다 더 높은 밥을 먹고 몸을 뉘입니다 흔들리는 바람 정도는 내려다 뵈는 벽으로 갈라져버린 금슬 불신조차 막아버린 고립 아무렇지도 않은 입맛에 스낵처럼 먹어 치웁니다 끝 간데없는 풍선에 매달린 평생 어치의 그 잿빛 몸값 귀가 때마다 꼬박꼬박 일수 찍고 들어..

자작시 2010.12.29

눈으로 고백하다

눈으로 고백하다/ 박영대 얼룩진 한해에 눈이 내린다 말라 죽은 가지는 생명의 악세사리 속인 적이 있다. 청청하던 날 눈이 오면 안되는 줄 알면서 속인 적이 있다 눈이 오고 나서는 새잎이 나기 시작했다 죽은 가지에 웃음기 돌고 꽃이 피고 잘못된 줄기에서 핀 열매가 당당하기까지 흐트러진 자국을 남기고 지나간 수첩에는 변명들이 인형처럼 웃고있다 어긋난 경영자의 변명 동영상이 과거를 잡는다 뒷걸음치는 발걸음이 보인다 순순히 탄로나는 눈 발자국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감추기 위한 술수 부실 보정 이론 한번만 눈이 내려 내 발자국을 지웠으면 싶다 달력 다하고 눈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희디 흰 세상에 내리는 고백

자작시 2010.12.18

네온싸인

네온싸인/박영대 아깝다 한줄기 빛이 어쩌다 꽁꽁 사로잡혀 쇼걸 되다 어둠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광명 주는 계시도 없이 립스틱 바르고 차가운 낯선 길에서 값싼 추파 흘리고 있다 영광도 없다 환호도 없다 환락만 부른다 혼미하게 툭 터진 네거리에서 벗고 음큼하게 내보이고 빠른 음악에 최대한 빠르게 털기 음기 자극 느끼한 춤으로 호객하고 있다 정해진 각본대로 콘트롤러의 의도된 조작 자유는 고장이다 뜨겁지 못한 헛사랑 천한 미모여 빛 소음

자작시 2010.12.12

그냥 있거든

그냥 있거든 / 박영대 남들은 다 힘들겠다 하지만 난 그냥 좋거든 남들은 다 심심하다 하지만 난 그냥 보거든 남들은 다 멋지다고 하지만 닌 그냥 울거든 남들은 다 외롭다고 하지만 난 그냥 됐거든 남들은 다 욕심내어 보지만 난 그냥 살거든 남들은 다 같이찍자 하지만 난 그냥 웃거든 남들은 다 소원을 빌지만 난 그냥 듣거든 남들은 다 뽐내라 하지만 난 그냥 있거든 낙락장송

자작시 2010.11.18

낮달을 보시라

낮달을 보시라 / 박영대 낮달을 보시라 아니 낮달이 되어 보시라 한때 별보다 크고 더 넓게 화려한 밤을 누리던 CEO 달빛 아래 찾아와 찬사와 아부하지 않는 이 누구 있던가. 단 며칠이 한달 내내인 줄 알고 설치다 절반이 가는 동안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낯만 냈다 대낮이 어둡다 침침해진 바늘귀가 자꾸 헛 곳을 찌른다 스위치를 켰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대낮이니까 새들이 자기 종족인 줄 알고 날아온다 버릇없는 것들 날개 힘만 믿고 곁에 다가와 견주고 간다 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에 잘도 갖다 붙였다 힘 빠져 축 처진 것을 고문으로 아니 검불로 한데 모아서 태워 버릴 달집으로 배추 포기에 달이 떴다 통 찬 포기 안에 숨어서 떴다 배추쌈 싸 먹고 푸르게 숨 죽이고 있다 잔별들 윽박에 겁 질려 다 내보일 수 ..

자작시 201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