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77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 박영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익은 감 따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니 공중에 때깔 좋은 굴비가 둥실둥실 헤엄치고 다닌다 툭 투다닥. 어쩌다가 공중제비로 떨어지는데 받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익은 놈은 맨 땅에 헤딩해서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깨지면 붙이면 되는데 이건 으스러지고 짓이겨져 아무르기엔 역부족이다 병원에서도 난치성 수술이다 익은 놈은 홍시가 되어서 벌레퉁이가 되어야 떨어지는데 낙하지점은 난장판이다 엄벅질 쳐진 홍시는 퍼질러 헥헥대다 드러난 마누라 아랫도리다 질질 덤턱스런 단물은 조심해서 핥아야한다 헤진 조각에서 잡티는 이리저리 헤치고 빨아 먹어야한다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면 이런 횡재는 있다 그러나, 감나무 밑에서 떨..

자작시 2010.11.04

전과 후

전과 후 / 박영대 단풍이 든다고 좋아했습니다 곱게 아니면 입술처럼 욕망을 끌어내는 빌미 산의 무대였습니다 숲과 낙엽이 우울증에 시달리며 그려내는 단풍의 변신은 무죄라며 가을 유행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색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섹시하게 말라가는 유연한 웨이브 다 생명의 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 높고 바람 자던 날 밤, 소리없이 지하에서 뻗쳐오는 불안 별 총총한 날 속고 속이고 있습니다 속는 자는 숙맥이고 안 속는자는 약삭 빠르게 속는 방법을 살짝 빠져 나갑니다 숙맥들의 처절한 순수 맥이 끊깁니다 아. 첫서리 느낌표도 찍지 못하고 늘어져 처지고 있습니다

자작시 2010.11.01

낙엽형

낙엽형 낙엽 지는 숲속에서 나무와 나란히 앉아 기다려 보면 떨어지는 삶이 하나도 같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겠더라 툭. 가지에서 상당한 하직예절 갖추고 나서는 가정교육 잘 받은 양반규수형 소복 치마 둘러쓰고 평생 정한 간직한 채 수직 낙하 자결하는 수절과부형 친구따라 강남 간다 울긋불긋 단장하고 색색이 차려 입은 팔랑팔랑 강남가시나형 바람에 바람 난 아가씨 짧은 치마 찢은 바지 궁둥이 살랑살랑 흔들고 가는 바람쟁이형 평생을 두고 단 한번 극지로 가는 길인데 원한 풀어 줄 꽃상여 매고 구천구원 북망산천 망혼가를 불러 줄까나 삐까 뻔쩍 명품 차림으로 바람 타고 빵빠레 울려 콩그레츄레이션을 외쳐 줄까나 가지 끝에서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인데

자작시 2010.10.30

가을의 허락

가을의 허락 / 박영대 가을이 빠지도록 하늘 맑게 개어내고 몸 적셔가며 유언까지 받드는 저 밑 물소리 밤새 나 몰래 그냥 얼어도 좋다고 늦은 달이 창밖에 졸음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애쓰고 버티다가 차마 제 갈 길 가지 못하고 빤히 보이는 창가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일찍 나와 마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철철 넘치는 생각을 내 안에 담을 그릇 모자라 마음대로 하라고 이 몸 허락하렵니다 밤이 끝나도 좋다는 잠 못 이루는 산새 울음도 힘에 부쳐 마지 못한 허락입니다 숲 떠나 온 낙엽이 전하는 말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 작은 가슴으로 받기에 너무 벅차서 당신의 뜻대로 하여도 좋다는 허락입니다

자작시 2010.10.29

첫서리

첫서리/박영대 첫은 누구나 서툴고 미약합니다 서리는 다릅니다 첫서리는 서리보다 가혹합니다 내리지 않고 맺힙니다. 한이 맺히듯. 태풍처럼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옵니다 바람이 없는 날 뒤에만 슬그머니 따라 옵니다 맑은 날만 골라서 옵니다 예상을 주지 않으려 숨 죽이고 옵니다 단 한번의 칼질에 숲이 고개를 떨굽니다 눈보라를 수백년 견디어 온 감나무가 끈질기게 뻗어가던 잡초마저도 우수수 떨굽니다 그리고는 살랑살랑 바람에게 보여 줍니다 고개 떨군 군상들 단장하던 단풍에게서 화장을 거두어 버립니다 지금부터는 죽음색 뿐입니다 첫서리 오는 날은 너무 짧습니다 이 무자비한 주검을 어찌 다 수습하라고 살아있는 이들에게 무슨 원한으로 첫서리 숲이 우는 날

자작시 2010.10.28

우체통

우체통 / 박영대 기다리던 소식 전해 준 단풍잎 어쩜 울긋 불긋 궁금한 몸만 붉어라 엽서가 기다린 사연을 입는다 가물가물 시간의 속임수에 이슬로 내린 눈물과 크면서 앓던 성장통 미로에서 엇갈린 우정 한 뱃속에서 어떤 놈은 기쁨이 되고 어떤 놈은 슬픔이 되고 가장 두려운 소식은 " 낙엽이 진다 " 빨간 우체통이 낙엽이다 우체통이다 이 소식 얼마나 슬픈가. 먹물 덜 마른 내 글씨

자작시 2010.10.19

부자 낙엽

부자 낙엽 / 박영대 찬 바람 불면 예금통장이 생각난다 잔고를 보면서 사는 재미인데 낙엽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랜다 불어나는 잔고만 보다가 덜컥 잔고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지 끝 매달린 부동산이 흔들거린다 그 많은 재산 두고 어이 할거나 더 슬프다 가볍게 몸 말려야 하는데 이기는 햇빛을 가리고 과욕은 통풍을 막는다 불신은 대문에서 지키고 인색은 곳간을 잠궜다 눈물 모르는 낙엽을 키운 후회 미리 알았으면 바람에게 맡겨둘 걸 그 만큼 살았으니 더 곱게 물들어야 하는데

자작시 2010.10.15

나무들의 입영

나무들의 입영 / 박영대 겹옷을 찾아 입을 때 옷을 벗는 가을 나무는 이제부터 입영 교육을 받는다 깜짝 놀란 구령소리에 줄서기를 배우고 차렷을 배운다 붙어 있던 나태와 무질서가 우수수 떨어진다 10초안에 밥먹기. 선착순. 동작봐라. 얼마나 필요한 경영 철학인가 한겨울 냉수마찰. 10분간 휴식 견디고 이기고 살기 위한 인내 전술 엄마는 어머니가 되고 아빠는 아버지가 되는 나무에게는 씨가 익는 계절이다 가볍게 털어내는 낙엽이 더 붉다

자작시 2010.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