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61

설야

설야 / 박영대 무심한 적막에 귀 열고 오시기를 뜬금없이 찾아온 눈 쌓인 밤에 가로등 뒤척이는 꽃 무늬 잠옷 소리없는 목소리 두어 계절 건너서 그런 적 있었는지 잊힐만해서야 어둠속에 희미해진 꽃으로 웁니다 철새 떠나간 길목에 멀어져 간 뒷모습 세월로 굳어 부옇게 휘날리는 바람 끝 하얀 나무 그립다 휘몰아 치는 종소리 전해줄 말 다 모아서 뿌린 허공에 그 높은 곳까지 마른 정 끌어다가 참을 수 없어 부서진 바람으로 저리 다 무지하게 쏟아내고서 내일은 어찌하시려고

자작시 2011.02.28

겨울 끝에서

겨울 끝에서 / 박영대 계절의 맏으로 나서서 가마솥에 얼음 조각을 누릉지처럼 눌리고 철새들 아랫목으로 이불 끝 벗어난 발이 차갑다 나무들 수행자처럼 무소유마저 버리고 낯빛 굳어져 있다 긴것도 아닌것도 말하지 않고 입 꼭 다물고 있다 왜 말 못 하는가 마무리 지으면서 궁색한 여유만 다져야 하는가 태어 날 아기 마중다리에서 부산하게 기다리고 있다 고드름 빙벽에 심을 박고 정지된 겨울을 걸어두고 왜 나는 추운 시만 써대고 있지.

자작시 2011.02.25

겨울엔 낙엽이 그립지 말입니다

겨울엔 낙엽이 그립지 말입니다 / 박영대 오래전에 예약됐던 숲길을 걷습니다 풍상에 시달린 가르마가 나 있는 길 거기엔 드문드문 하얗게 죽은 흰 머리가 생기고 시절이 말라 잘려도 아프지 않은 낙엽 그리운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느 일찍 오는 봄나물이라도 붙잡고 싶어 추위 가시지 않은 노변에서 호객하고 있습니다 눈물조차 보타진 뿌리들의 간절한 보챔 울긋불긋 지난날들이 아련해지고 찢고 짧아진 노출로 눈길 잡으려 죽은 후에 행복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제철에 나서 누리는 형형색색 때 놓진 후회를 온몸으로 때우며 무엇이 그렇게 굽어 사정하게 하는가 차이 나게 타고난 꽃들의 신분 귀하게, 우아하게, 폼나게. 바람 지난 후에 빈 몸 날리며 우수수 그립지 말입니다 낙엽이 망연히 바라보는 곳 이제 남은 수명이 그다지 길지 ..

자작시 2011.02.20

사진첩

사진첩 / 박영대 길에 이름을 붙이면 사진을 찍는다 처음 시작은 발가벗고 있다 돌사진처럼 당당히 벗고 있다 바위틈에서 솟아 나온 유년의 슬픔 하나쯤 띄엄띄엄 걸어 내려온 걸음걸이가 저장되고 단단한 신발로 갈아 신고 발을 맞춘다 잔잔한 평지에서 만난 기억에도 없는 개미떼와 높고 긴 낭떠러지에 갔다 온 소풍놀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시기와 질투들이 겨울 숲에서 떨고 있다 하나하나 주워든 둑길에는 깨다만 부스러기들이 쌓여서 눈을 피해 저금해 둔 잔액만큼이나 자기 얼굴에 찍어 바르고 나온다 닳고 닳아진 뻔뻔해진 바지차림으로 잘게 잘게 삭은 푼수 같은 들판 지나 펄이 되어 두터운 집을 짓고 그렇게 긴 계절을 얼렸다 녹였다 부수고 있다 바다에 있는 파도를 알지 못하고

자작시 2011.02.01

아파트, 죽부인처럼 눕다

아파트, 죽부인처럼 눕다 / 박영대 늦은 밤에 칸칸이 켜진 눈물입니다 욕정같은 어둠 차오르고 잠옷 갈아 입은 공동 침소에서 하루를 외박하려 합니다 하나 둘 꺼지는 함성같은 불빛 그림자로 대신해서 드러나는 하루치의 잠자리 파닥거린 만큼 헤집고 다닌 바닥에서 층층이 쌓인 연륜처럼 나이 들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결별한 새 깃 털갈이한 까닭을 모른 채 높아만 가는 아득한 공포에서 두려웠던 하얀 어지러움을 이물처럼 털어 냅니다 고개 쳐든 나무 꼭대기 낮아진 높이보다 더 높은 밥을 먹고 몸을 뉘입니다 흔들리는 바람 정도는 내려다 뵈는 벽으로 갈라져버린 금슬 불신조차 막아버린 고립 아무렇지도 않은 입맛에 스낵처럼 먹어 치웁니다 끝 간데없는 풍선에 매달린 평생 어치의 그 잿빛 몸값 귀가 때마다 꼬박꼬박 일수 찍고 들어..

자작시 2010.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