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76

눈목련

눈목련 / 박영대 눈밭에 그릴 수도 아직은 피울 수도 없는 시도때도 모르는 소년 냉냉한 어깨 위에 남겨진 무색 예감 처진 겨울 바람처럼 말없이 감싸 안는다 때가 되면 늦을까 떠날 채비 서두르고 깃털 얹고 있는 나이 숨찬 바람 끝에 봄날 오는 소리조차 부끄러운 화예 꽃은 피웠다만 어찌 제 철을 잊었느냐 타고난 단명 염려하였는데 바람 끝 건듯 아침살 한 식간에 스러지는 너는 누구의 현현인가 하고 싶은 무슨 말이 남아 철도 모르고 피어 오르막 길에 서서 쳐다만 보게 하는지 속에 품었는 편지 썼다 지우면서 남긴 필적 녹아 흐르는 몰래 지운 눈물인 것을 누가 뭐래도 변하지 않는 하얀 먹빛 왔다 갈 한 생 창호지 밟고 서서 너무 빠른 붓끝에 눈이나 맞추려고

자작시 2021.01.30

눈이 지배하는 나라

눈이 지배하는 나라 / 박 영 대 포식자의 먹이가 되리 눈치도 못 채고 순식간에 낚아채인 먹이가 되리 숨통이 끊기고 고통 없이 씹히는 먹이가 되리 그만한 됨됨이면 고통 달게 받으리 바뀌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아무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나 순백의 정부로 바뀐 거역할 수 없는 설국 반항하는 모든 부조리를 제압하고 물어볼 것도 없이 한꺼번에 장악한 세상 손 쓸 틈도 없이 제도가 바뀌고 하룻밤 사이에 길이 바뀌고 차별 없는 평소에 그리던 나라 기꺼이 그 나라 백성이 되리 이런 날이 오면 보고 싶은 이에게 전화를 걸고 이런 날이 오면 연약한 뿌리가 새 집을 준비하고 이런 세상이 오면 피다가 꺾인 원한이 꽃으로 피어나 꿈꿔온 지도를 펼치고 함께 기차를 타리 지금까지 겪어온 질척 깨끗이 지워진 거리를 활보하리 새로 평..

자작시 2021.01.23

물 감옥

물 감옥 박 영 대 산 계곡 입술이 추위에 바삭바삭 말라가고 수돗물 으슥으슥 열 나서 몸살해대고 수도꼭지가 몸 져 누웠으니 아내의 부재다 바닥난 골짜기에 끙끙 앓는 소리가 얼음을 타고 흐른다 교대한 초생달이 쬐끄만 얼굴 털모자로 얼싸고 한번 어두워지고는 날이 새지 않는다 시간이 얼어 멈추고 길이 막혔다 온 동네가 물 감옥이다 와이파이 터지고 휴대전화 터지면 첨단 문명이 다 살게 해줄 줄 알았는데 화장실 물 채우는 일 먹고 설거지하는 집안 물이 징역살이 삼 년보다 춥다 물 감옥 단 사흘간 노지에서도 견디는 석간수 찾아가 용서를 빌고 기침소리 카톡으로 몇 짐 앓는 소리 영상통화를 몇 바가지 퍼다 붓는지 모른다

자작시 2021.01.21

천년의 꼼지락

천년의 꼼지락 - 직지. 안부를 묻다 박 영 대 直指人心(직지인심)하시면 見性成佛(견성성불)이시니라 어둠 아직 사위기 전 정한수 사발 올린다 흰 보시기에 담아내는 여인의 새벽 걸음 아침 적막 깨운다 천년의 묵은 꿈 맨 땅에 그리고 나무에 새기고 허구한 날 닦아서 말씀 심지 돋운다 차마 받들기 어려운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말씀 그 말씀 흰 적삼 속 깊이 새긴 그 말씀 바위 다듬고 쇳물 거르던 그 꼼지락 천년 그날들의 숱한 꼼지락 철당간 꼭대기에 매단 무심의 깃발 글자되어 말씀으로 펄럭이고 있다 떠나간 이역만리 속사정 풀어놓지 못하고 달빛으로 울고 바람으로 지켜온 제국의 발급소리 골골이 채웠다 비우는 흥망성쇠 바른손 검지에 찍어 써 내려간 쇳물로 식힌 말씀 어두워서 드러나는 틈새 파고드는 별빛 고려의 ..

자작시 2021.01.03

상고대 옹슬

상고대 옹슬 / 박영대 험한 삶 온 몸으로 빚은 아상블라주 매섭기는 겨울인데 품속에 얼음이라 섣달 그믐 은근한 밤안개로 일어나 새벽 싸매지 못하고 떠나는 생이별 가는 길 순탄치 못한 바람의 걸음아 세월 지나는 길목에 흰 머리 날리지 마라 미련도 눈물도 참을 수 없는 나루턱에 인정도 산천도 하얗게 얼려 놓고 이름 없이 지워진 흔적만 쌓고 쌓네 쪼개진 사연 살 풀어 강물 속 흐르는데 두고 갈 가슴속은 왜 이리 차가운지 가마솥에 끓여도 차디찬 김만 나네 두어라~ 찬 정도 못 끊는 서릿발 인연 무엇이 맺혀서 떠나가는 길목을 앞서 막느냐

자작시 2020.12.18

잊고 살았다, 그저

잊고 살았다, 그저 박 영 대 삼백 년을 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산 당산나무의 고충을 알지 못했다 언제든 갈 수 있어서 어디든 갈 수 있어서 그의 답답함을 그저 외면했다 달이 안 뜨는 서운한 고통을 알지 못했다 뜨면 보고 안 뜨면 그저 그런 줄 코로나 덫에 걸려 넘어진 단 보름간의 자가 격리 그저 그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없으면 소중한 걸 보고 싶다는 걸 이제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잊고 살았다

자작시 2020.12.04

그날 동행

그날 동행 박 영 대 혼자 나선 저녁 산책 기어이 따라오는 늙은 그림자 차도에서는 찻길쪽에 서고 굽은 길에선 갓길쪽에 서고 누렇게 물들어 어중간이 빛바래 갈 때 빈 솔방울 헛간처럼 달고 간신히 침엽수라는 체면으로 숱 성근 반백 지키고 걷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곁을 지키는 동행 구부정한 나는 분명 난데 키도 키우고 주름살 없애고 안쓰러워 백발도 검었네

자작시 2020.11.29

감나무 외도

감나무 외도 박 영 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걸어 온다 어쩌면 저리 홀딱 벗을까 묶어놓고 벗겨도 저렇게 벗기지는 못할텐데 불과 한 달 새 무슨 사달이 난 것일까 웬만해서는 지지 않을 두꺼운 입심 저리 당한 걸 보면 그 안에 뭔가가 있어서다 태풍도 이겨낸 그 억척 좀 해 말 바꿀 그 입심 아니었는데 용서받지 못한 허물 그 사정을 알 수가 없다 여름내내 국방색 단 한 벌로 곁눈 흘리지 않고 달게 키운 자식만 보았는데 스스로 옷고름 풀게 한 속사정을 알 수가 없다 아 늦가을 단풍 들 때 두꺼운 입술 붉게 칠한 적이 있지 딱 한 번 립스틱 짙게 칠한 잘못으로 우수수 벌을 받은 게야

자작시 2020.11.20

11월의 다짐. 이 달의 골프 시

11월의 다짐 박 영 대 낙엽으로 이불 해 덮고 잠자리 들면 골프채는 단련의 계절 한겨울 나무는 굳은 살 나이테 만들기 위해 스스로 몸을 만든다 방학 지나고 달라진 실력자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 드라이버에 묻은 슬라이스를 곧게 펴고 아이언 각의 눈썰미를 한 치 재어 담금질하고 다들 자고 있는 겨울이 누군가는 틈을 두드리기에 뜨겁다

자작시 2020.11.05

사과밭에서

사과밭에서 / 박영대 클수록 예뻐지는 걸 보면 연모를 품은 것이 붉은 달이었는 갑다 눈은 작고 몸매는 없고 입은 보잘것없는 것이 어찌 붉은 건 알아 하늘을 차지하였느냐 해를 쫓다가 저무는 달빛을 만나 낯 붉어진 변절 못하는 허구헌 날의 동경 눈은 순간이지만 길목에는 계절을 쌓는다 끝내 시월, 그대라는 말 안고 지켜 키우다보면 가을 한 페이지에서 쏟아지는 한 움큼 빛맛 육신은 해에게서 나고 단맛은 달빛이 준 것이다 저 달은 무맛일 게다 저들에게 다 내어주고 무슨 맛이 남았겠어

자작시 2020.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