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61

천년의 꼼지락

천년의 꼼지락 - 직지. 안부를 묻다 박 영 대 直指人心(직지인심)하시면 見性成佛(견성성불)이시니라 어둠 아직 사위기 전 정한수 사발 올린다 흰 보시기에 담아내는 여인의 새벽 걸음 아침 적막 깨운다 천년의 묵은 꿈 맨 땅에 그리고 나무에 새기고 허구한 날 닦아서 말씀 심지 돋운다 차마 받들기 어려운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말씀 그 말씀 흰 적삼 속 깊이 새긴 그 말씀 바위 다듬고 쇳물 거르던 그 꼼지락 천년 그날들의 숱한 꼼지락 철당간 꼭대기에 매단 무심의 깃발 글자되어 말씀으로 펄럭이고 있다 떠나간 이역만리 속사정 풀어놓지 못하고 달빛으로 울고 바람으로 지켜온 제국의 발급소리 골골이 채웠다 비우는 흥망성쇠 바른손 검지에 찍어 써 내려간 쇳물로 식힌 말씀 어두워서 드러나는 틈새 파고드는 별빛 고려의 ..

자작시 2021.01.03

상고대 옹슬

상고대 옹슬 / 박영대 험한 삶 온 몸으로 빚은 아상블라주 매섭기는 겨울인데 품속에 얼음이라 섣달 그믐 은근한 밤안개로 일어나 새벽 싸매지 못하고 떠나는 생이별 가는 길 순탄치 못한 바람의 걸음아 세월 지나는 길목에 흰 머리 날리지 마라 미련도 눈물도 참을 수 없는 나루턱에 인정도 산천도 하얗게 얼려 놓고 이름 없이 지워진 흔적만 쌓고 쌓네 쪼개진 사연 살 풀어 강물 속 흐르는데 두고 갈 가슴속은 왜 이리 차가운지 가마솥에 끓여도 차디찬 김만 나네 두어라~ 찬 정도 못 끊는 서릿발 인연 무엇이 맺혀서 떠나가는 길목을 앞서 막느냐

자작시 2020.12.18

잊고 살았다, 그저

잊고 살았다, 그저 박 영 대 삼백 년을 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산 당산나무의 고충을 알지 못했다 언제든 갈 수 있어서 어디든 갈 수 있어서 그의 답답함을 그저 외면했다 달이 안 뜨는 서운한 고통을 알지 못했다 뜨면 보고 안 뜨면 그저 그런 줄 코로나 덫에 걸려 넘어진 단 보름간의 자가 격리 그저 그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없으면 소중한 걸 보고 싶다는 걸 이제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잊고 살았다

자작시 2020.12.04

그날 동행

그날 동행 박 영 대 혼자 나선 저녁 산책 기어이 따라오는 늙은 그림자 차도에서는 찻길쪽에 서고 굽은 길에선 갓길쪽에 서고 누렇게 물들어 어중간이 빛바래 갈 때 빈 솔방울 헛간처럼 달고 간신히 침엽수라는 체면으로 숱 성근 반백 지키고 걷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곁을 지키는 동행 구부정한 나는 분명 난데 키도 키우고 주름살 없애고 안쓰러워 백발도 검었네

자작시 2020.11.29

감나무 외도

감나무 외도 박 영 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걸어 온다 어쩌면 저리 홀딱 벗을까 묶어놓고 벗겨도 저렇게 벗기지는 못할텐데 불과 한 달 새 무슨 사달이 난 것일까 웬만해서는 지지 않을 두꺼운 입심 저리 당한 걸 보면 그 안에 뭔가가 있어서다 태풍도 이겨낸 그 억척 좀 해 말 바꿀 그 입심 아니었는데 용서받지 못한 허물 그 사정을 알 수가 없다 여름내내 국방색 단 한 벌로 곁눈 흘리지 않고 달게 키운 자식만 보았는데 스스로 옷고름 풀게 한 속사정을 알 수가 없다 아 늦가을 단풍 들 때 두꺼운 입술 붉게 칠한 적이 있지 딱 한 번 립스틱 짙게 칠한 잘못으로 우수수 벌을 받은 게야

자작시 2020.11.20

11월의 다짐. 이 달의 골프 시

11월의 다짐 박 영 대 낙엽으로 이불 해 덮고 잠자리 들면 골프채는 단련의 계절 한겨울 나무는 굳은 살 나이테 만들기 위해 스스로 몸을 만든다 방학 지나고 달라진 실력자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 드라이버에 묻은 슬라이스를 곧게 펴고 아이언 각의 눈썰미를 한 치 재어 담금질하고 다들 자고 있는 겨울이 누군가는 틈을 두드리기에 뜨겁다

자작시 2020.11.05

사과밭에서

사과밭에서 / 박영대 클수록 예뻐지는 걸 보면 연모를 품은 것이 붉은 달이었는 갑다 눈은 작고 몸매는 없고 입은 보잘것없는 것이 어찌 붉은 건 알아 하늘을 차지하였느냐 해를 쫓다가 저무는 달빛을 만나 낯 붉어진 변절 못하는 허구헌 날의 동경 눈은 순간이지만 길목에는 계절을 쌓는다 끝내 시월, 그대라는 말 안고 지켜 키우다보면 가을 한 페이지에서 쏟아지는 한 움큼 빛맛 육신은 해에게서 나고 단맛은 달빛이 준 것이다 저 달은 무맛일 게다 저들에게 다 내어주고 무슨 맛이 남았겠어

자작시 2020.10.22

알밤을 만나면

알밤을 만나면 박영대 OB라인에 살짝 걸린 행운에 알밤이 굴러 떨어져 있다 가을빛 칠하고 칠해서 짙어진 밤색 단단하기가 밤껍질이다 껍질 속 아늑한 벌레의 방 무서리 한파도 바위의 충격도 지켜낸다 진화된 밤가시가 딤플이 된 걸 보면 알밤의 꿈은 땅에 떨쳐지는 것이 아니라 창공을 한껏 날아보는 비상 세이프 존 보호색으로 씨앗을 지키는 바람과 구름과 낙엽의 자연 색감을 기어이 눈에 잘 띠게 바꿔버린 백색의 억지 눈에 띤 알밤에게 실수 핑계대려고 아이언 머리로 꿈을 휘두르다.

자작시 2020.10.08

젓가락 골프

젓가락 골프 박영대 어릴 적 밥상머리 젓가락질 배우면 콩 한 알 집는데도 평생 자유 세 끼 먹는 손가락 체조 아무리 이뻐도 먹여주지 않는 냉정한 손끝 내림 놋쇠 자루 날마다 갈고 닦은 예봉의 숙련 젓가락만 골프채로 바꾸면 세상이 우러르는 대한민국 골프 젓가락의 첨단 기술 차라리 살아있는 더듬이라 하라 세상 눈동자 젓가락 끝에 모여 콩알 미끄러운 안착을 갤러리로 지켜보고 있다

자작시 2020.10.08

석등

석등 박영대 뒤틀린 가을에 핀 철쭉, 짓 없는 얼굴로 달 오름 때맞춰 부석사 들러 석양을 뵙는다 만삭 배흘림은 겉늙은 풍경을 그리는데 의상대사님은 지팡이 들어 오늘을 가르치시고 발등에 얹어주는 천년 등불 저리 묵직하게 한 줌의 서운함 들고 서 있다 말씀 담고 있는 탑파 길 밝히는 시좌 귀 기우려 듣고 있는 묵은 별 어둠은 그냥 두고 귀 열리는 불빛 가쁘게 몰아 쉬는 박명의 숨소리 돌아갈 곳 서두르는 마지막 재촉이라 어덕길 차마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루에 지친 냉랭한 얼굴들 높고 낮음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바다에는 울음 그치지 않고 팍팍한 다리로 오르락 내리락 불심마저 저어 바람 앞에 깜박거리는데 세월 품고 흐르는 돌빛 눈 감은 듯 고르다

자작시 202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