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신춘문예 ■중앙일보 퓨즈가 나간 숲/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 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문학 이야기 2010.12.25
95신춘문예 ■서울신문 전망좋은 방 /장경복 눈을 뜨는 일도 밖을 살피는 일이다 자전거가 내리막에서 급하게 길을 긋거나 아이들의 고무줄놀이가 이곳까지 합창을 날려도 하늘이 가까워 위를 본다, 머리 위엔 길거리만큼 복잡한 햇살의 골목이 있다 떨어진 나뭇잎이 새로 난 신작로를 알려준다 그 도로.. 문학 이야기 2010.12.25
94신춘문예 ■세계일보 세숫대야론/김호균 세숫대야를 보면 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를 하고 비누거품으로 가득찬 물을 버리면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투로 그려진 세선의 물결 무늬 물 속의 네 육신이 흔들리고 어푸어푸 물먹은 네 육신이 흔들리다 멈추어 섰을 때 지나온 내 꿈보따리를 뒤적이다 .. 문학 이야기 2010.12.25
93신춘문예 ■ 동아일보 혈거시대 / 이정록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 문학 이야기 2010.12.25
92신춘문예 조선일보 남행시초 1/ 김수영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 문학 이야기 2010.12.25
91신춘문예 ■경향신문 황야의 정거장 /서규정 - 복지국가로 가는 차표를 어디서 팔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잔털 털 보숭보숭한 여공 하나 데리고 떠나고 싶어 앵두꽃 피는 시절 기쁨과 슬픔마저도 탕감하는 저 반달 달빛이 스며드는 기숙사에서 앞장 뜯어진 노동자 천국을 읽으며 뒷장을 다 넘긴 줄도 모르고 .. 문학 이야기 2010.12.25
90신춘문예 ■동아일보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 문학 이야기 2010.12.25
89신춘문예 ■한국일보 꼽추/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문학 이야기 2010.12.25
87신춘문예 ■중앙일보 봉함엽서/이상희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 문학 이야기 2010.12.25
86신춘문예 ■중앙일보 겨울 手話/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 문학 이야기 201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