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3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49

 

■ 동아일보
혈거시대 / 이정록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림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둥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 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 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꼰아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양 덩치를 키워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면이 많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의 집은 참 아늑하다  

 


■세계일보
 이사/원동우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 네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석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안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밭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참
장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너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중앙일보
유배수첩/고두현          


남해 가는 길

 

물살 센 노량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리 뱃길 시오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울타리 밖에 채마밭을 짓고

 

흐린 날에 텃밭에 나가

익모초잎을 딴다
초막 뒤로 지는 노을
시린 팔목도 굽은 어깨도
진눈깨비에 젖어 흐르다 보면
못다한 이승의 아름다움
꽃대궁 뿌리마다 단단히 박아두고
어즈버 내가 없는 날
봄 푸른 들판 되어
꽃피고 새움이 돋듯 그렇게
다시 살았거라 두고온 것들도 수런대며
돌아와 뒤뜰 동백잎 함께 아물어 갈 때
일어나 터지거라 터지고도 모자라면
또 다시 누워 채마밭이 되고 새암이 되고
먼 데서 오는 한 벗 구름 뿐인 고요가 되고
슬픔이 되어 내 묻힌 노지나 묘등에
땅만 보고 섰을 풀줄기 되라

 

*앵강: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남해 앞바다 이름  

 


■ 조선일보
 상처 / 전대호          


1
버스가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옆에 선 사내가 근육을 긴장시키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사내의 팔뚝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보인다. 둥글고 큼직하게 주위 살들을 잡아당기며 아문 흉터가 세 개 일렬로 박혀있다. 언제였던가 나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많이 먹고 친구들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독하게 지졌었다. 상처는 많이 부풀어올랐다. 며칠동안 팔 전체가 화끈거렸고, 화끈거렸지만 아무 흉터도 남지 않았다.

 

  햇살 내리네 저 햇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

 

사내는 아마 물집이 생긴 자리를 세 번 이상 더 지졌을 것이다. 아무도 근접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억을 훈장처럼 팔뚝에 새겨넣기 위하여 사내는 아까처럼 근육을 긴장시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젖은 숫돌처럼.

 

2
지나간 일들은 정말로 지나가 버린다. 그날에나 지금에나 햇살 저 햇살,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만 있다. 그런 식의 무례한 작별인사는 그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들꽃에게라도 말 걸고 싶은 발걸음. 얘 너도 집이니? 아니 나는 성이야.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 기억만 고대 인류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문턱에서 흔들거릴 뿐.  

 

 

 ■한국일보
소금에 관하여/ 서영효          


부서진 은비늘이 모여
복귀할 수 없는
원시의 수초를 모래밭에 그리는
하얀 눈물자국.
과학적으로 말하면
이온 결합일 테지만, 미완의 입자들이
손 마주잡고
태양 아래서
날아갈 것은 날아가고
결정을 이룬 무리들이
맛을 낸다.

 

나의 몸이 싱거운 터라
한줌 집어 상처 위로 뿌리니
잊었던 꿈들이
일제히 강줄기 따라
횃불을 밝힌다.
그것은 하얀 불이었구나
피톨이 불을 당겨
곰팡이 홀씨 둥둥 떠다니며
간이나 위, 뼈 위로 꽃피우는
온몸으로
퍼지는 화염
靑靑한 몸이로구나. 

 


■서울신문
한강 갈매기/김현파          


옅은 안개 깔린 강 표면에서 솟구치는
비둘기보다 큰 새를 보았다 차량행렬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흰 바탕에 회색무늬 날개를 가진 새
혹, 서해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아닐까
시내버스 손잡이에 흔들리며 선승의 깨달음처럼
번쩍 스치는 예감
삼각지 로타리를 돌아 서울역 남대문을 지나면서
그 새는 빌딩 숲 깊숙이 묻혀버렸다 화석 같은
짙은 흔적을 남기고

 

그날 이후 밤마다 꿈을 꾸었다
뱃고동 소리 파도에 부서지는 항구
하얗게 빛나는 등대 위에서 나는 은빛 날개로
푸른 하늘을 날았다 무인도를 지나
황톳물 출렁이는 대륙
사막을 날았다
만년설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날개를 접기도했고
먼 아프리카 조그만 어촌을 날았다
달빛 별빛 어우러지는 날 밤에는 너훌너훌
춤을 추기도 했다

 

대낮에도 꿈을 꾸며
청계천이나 남대문시장을 기우뚱대기도 하고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 엉성한 곰빗으로 부리끝을
갈고 또 갈아보았지만
어느덧 무서리로 덮여지는 이 땅
벌써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고
보도블럭 위 플라타너스 잎은 한 장 두 장 떨어지는데
헛일이었다 정말 헛일이었다

 

손목시계를 차고
넥타이를 매고
오늘도 신발끈을 졸라매보지만 언제나 아스팔트 길에서
푸득대기만 한다
한 장의 낡은 양복으로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감추고
두고온 해안
모래톱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그리우면
한강엘 간다
더 높은 하늘
더 넓은 바다가 그리우면 잡초 우거진 고수부지에서
끼룩끼룩 울어대기도 하고
콘크리트 강둑을 걷기도 한다 남 모르게
날개짓도 해보고

 

낚시줄을 제 목숨마냥 늘어 놓은 늙은 갈매기
젊은 갈매기들
노을에 일렁이는 물살을 보며 소주잔에
두고온 고향을 타 마신다
유람선 선착장을 맴돌다 한강철교를 향하여 날아가는
갈매기를 관찰한다
녹슨 망원경을 통하여
지금은 갈 수 없는 그곳을 생각하며  

 

■부산일보
새/김정미          


그 집에는 대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정원이 있다
정원과 맞붙은 베란다에는
한 뼘 간격의 가느다란 창살들이 쳐져 있고
공기 숲 나무 하늘 바람의 유혹을 막아줄
창문도 칸막이도 없다
창살 중앙의 고리에는 초록색을 칠한 작은 세상이 걸겨 있고
새장 안에는
갓 솟은 태양보다 맑은 손금빛의 노랑새가
자작나무로 만든 횃대에 올라앉아
여린 음성으로 지저귀며 눈망울을 반짝인다

 

숲에서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가을 참나무 소리보다 요란하다
여기서의 정적은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와
바람이 투명한 몸짓으로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싱그런 풀잎을 반대편으로 쓸어 누일 때
견디다 못한 정원 귀퉁이 천리향이 바람을 쫓아
뛰쳐나가 아찔한 향기를 숲으로 풀어놓는 순간
가볍게 스쳐가는 하늘의 옷자락과
그들의 귀에만 들려오는 아득한 우주
지구 회전하는 소리
꽃들이 봉오리 틈 사이로 주름을 피며 화관을 만드는 소리
아침이 가라앉을 시각
정오의 우유빛 마취가 그 작은 두뇌 속에
차오르는 눈망울이 가라앉을 때
달려가던 바람이 하얀 풀잎을 세우며
돌아오는 그때일 뿐이다. 

 


■경향신문
감기유감/정덕재          


며칠간의 감기는
코에서 목으로 왕복하며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변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약을 먹기로 했다.
콘택 600 혹은 판피린을
조제하는 TV 앞에 앉아 있다가
소망약국 앞을 머뭇거리다
병원으로 향하는 것은
가운을 입지 않은 약사 때문이었을까
식당과 정육점 사이에서
약 냄새를 풀풀거리지 못하는
옅은 기운 때문이었을까

 

녹색 간판의 세지의원 2층 계단을 오르며
세지는 딸 이름일까
아내에게 감추고 싶은 첫사랑의
여자일까
힘없이 굽어지는 무릎이 관절염일까를
생각하며
손가락이 긴 의사를 만났다
감기 같은데요. 순간 아니다.
감기 걸렸는데요 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스스로 진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선고의 두려움을 베어내기 위함이다
두려움의 상처에
먼저
불을 지르고 맞불을 기다리는
이것은 소독이 아니다
온몸을 달구는

살.
모두들 전염의 불덩이 하나씩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불신하지 않는 것은
죄라며
병원 복도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감기가 아닐지 모른다  

 

■강원일보
팔괴里에서 / 박선옥          


도시에서
새들의 부리에 쪼여가는 새벽은
어디로 부려지는가
그 풍경의 자물쇠를 따고 있는
우리의 기도는
아득한 선사시대로 나이테를 날려보내며
세월의 두께에 갇혀
나이만큼한 영혼을 볼 수 없구나

 

깊은 강 이마를 쓸며
바람은 재를 질러 와
대밭에서 화음을 고르고
도시를 떠난 새벽의 하이얀 피를
가을볕에 그을린 순간 길들에게 묻히우고 있을 때
스레트지붕 위를 달력 속의 숫자들이 손짓해 오고 있음이여

 

아이들은
여러날 벼르던 머리칼을 녹슬은 가위에 맞물려 가며
한 번 다녀간 눈사람을 궁금해 할 뿐
뱀처럼 누워있는 길을 따라
해묵은 교과서 속의 아이들과 물구나무선다.

 

팔괴里에서
아주 뒷날에 불것을 약속하고 떠나는
바람의 자태를 누가 보았는가
물물이 키가 자라는 낟가리에 입맞춤하고
아프게 돌아서는 바람의 실한 허리를
와락 껴안는 허수아비의 이별을 우리는 알지, 알어

 

저탄장의 삽소리에 기슭을 돌아오는 적막
가을하늘을 나르는 신문지 쪼가리에 세상은
절로 며칠 전으로 돌아가
우리가 살아온 생의 눈금을 몇 개 털어주기도 하고
아주 뒷날에 불 바람의 당도를 위해
길을 익히고 돌아 오는 새들은
平原石의 거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등허리에
수도 없는 모국어를 남발하며
헐겁게 새벽을 부리고 가는 것을.

 

저 홀로의 몸무게에 쩌들려
추스리지 못하는 강물의 깊은 살점
그 무지의 살점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물고기의 비늘을
홀연히 내려다보고만 섰는 하늘이여.
짖어도 개들의 목청은 끝간데 없고
새들에게 부려지는 새벽의 씨알만이
팔괴里에서 아침 햇살로 아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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