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5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52

 

■서울신문
 전망좋은 방 /장경복
 
 
눈을 뜨는 일도 밖을 살피는 일이다
자전거가 내리막에서 급하게 길을 긋거나
아이들의 고무줄놀이가 이곳까지 합창을 날려도
하늘이 가까워 위를 본다, 머리 위엔
길거리만큼 복잡한 햇살의 골목이 있다
 
떨어진 나뭇잎이 새로 난 신작로를 알려준다 그 도로의 끝엔
임종을 앞두고 화장을 하는 늙은 계절이 있을 것이다
오시지 않는 손님을 마중하러 사람들이 몰려갔다
몇몇은 구석에 숨어 담배를 피웠고 저들끼리 싸우는 축도 있었다
연탄 실은 리어카가 그들을 가로질러 갔고
꼬마들이 검은 흔적을 찾아 비닐봉지처럼 날렸다
잘못 켜진 가로등이 창백한 낯빛을 숨겼다
 
보이는 것은 모두 숨으려 한다 언덕마다
노출된 숨결이 바람을 맞고 오는 동안 야위어갔다
저 혼자 흔들리는 빨래들 속에 피곤한 몸들이 채워질 것이다
겹겹이 채워도 커지지 않는 그림자들
엉킨 전선줄이 헛그물질을 한다 건져지는 것은
해마다 떠나리라는 잡초 같은 소문이었다
 
발 밑에 별이 깔리기 전에 바빠져야 한다
복잡한 햇살의 골목
급한 참새 한 마리 뛰어나오다
바람에 치여 떨어졌다

 

 

■경향신문
 어성전의 봄/이은옥

 
적송과 잡목이 어울려, 몇 겹의 산봉우리가 되고
마루 끝에 서서
잘 보이는 앞산부터 산의 허리를 센다
겨울 내내 쌓여 있던 눈이 아래 마을부터 녹기 시작하여
산 밑에 있는 기와집 근처 응달까지, 길어진 해 그림자가
봄을,
마당까지 실어 나른다
서서 말라버린 국화밭에도 햇살이 옮겨 다니면서
겨울의 냄새를 말린다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국화밭이 밭고랑을 드러내고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봄,
강이 뚜껑을 열고
고기들이 알을 까고 돌 밑에 집을 만들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어성전의 강, 강물의 흐름이 좋고 조용하여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 사람들은 이 마을을 어성전이라 한다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
아침 안개가 지나갈 때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가끔씩 마을은 안개에 푹 잠겨 있고
새벽, 닭이 한집 한집에서 울기 시작해
온 동네는 조그만 소리들로 하루가 시작된다
방문을 열면 안개가 먼저 들어온다
햇살이 온 마을에 퍼지면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봄, 햇살이 동반하는 이 나른한 계절은 앉아 있기도 불안하다
겨울 내내 쉬고 있던 농기구들이 하품을 하고
아버지는 먼 산에서 해온 물푸레나무 자루를 다듬어
건너마을에 쟁기를 벼르러 간다
아버지는 조율사처럼
호미 자루며 도끼 자루 괭이 자루를 다시 갈아 끼운다
농기구들은 아버지의 건반이 되어 사계가 시작된다
나는, 슬그머니 강으로 나가본다
강은 아직 고요하다
강은 누가 먼저 알을 낳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어성전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마을
 

 

■중앙일보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윤지영
 
  식구들이 잠들어
  오히려 부산한 여름밤
  방충망 사이 모기가 부산스럽다.
  모기 날개 위에 달빛이 부산스럽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 우유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버터는 냉장고 속에서도 녹아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 속에서도 상해 있었다.
  노트북도 배가 고픈지 하얗게 화면이 지워진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가 사라지고, 깜빡이는 그리움이 사라진다.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한국일보

 

   좋은 사람들 이병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날엔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세계일보
자전거에 대하여/윤을식
 
 
두 바퀴 위에 한 사내
수평으로 나란히 전진해야 하는 바퀴들
구른다, 그때마다 살끝에서 잘리워지는
햇살들, 같이 아파할 겨를도 없이
회생한 그림자 속에 웃음들이
쏟아진다
 
추억이 현실을 앞서갈 수는 없어
뒷바퀴가 따르는 만큼의 일정한 거리로
앞서가는 또 하나의 둥근 얼굴이 있어
나는 늘 그 사이 수평의 불안감으로
페달을 밟는다
수많은 이름들의 햇살을
만들고 지우며 다시 만들고
바퀴들이 나아가는 만큼
어깨를 뒤로 젖혀 자리를 옮기는
돌멩이들 가끔 그들의 이탈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는
모퉁이에 다가선다
한번쯤 얄팍한 끈으로 브레이크를 잡지만
가는 몸부대끼며 쇳소리 우는 불안을
감당할 수는 없어
아직 숙련된 멈춤을 배우지도 못했는데
 
두 바퀴 위에 한 사내
간혹 세 바퀴, 네 바퀴 위에 아이들
보인다 추억과 현실을 저울질 하듯
위태로운 페달을 밟는다

 

 

■동아일보
이런 세상 어떠세요/김지연

 
날이 찌뿌둥하군요.
할 수 없어요, 늘 같은 주말로 하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사람과
같은 반찬으로 밥을 먹어야겠어요.
외출은 삼가세요.
바깥 날씨쯤 잊어버려요.
당신의 영원한 TV가 다채로운 재방송을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시청률에 항상 주의해 주세요)
채널과 채널 사이 잡음은 신경쓰지 마세요.
다만 집 앞을 파대는 굴착기 소리에
심장 박동을 맞춰주세요.
곧 따끈한 아스팔트로 포장해 드릴게요.
잠깐, 채널을 바꾸지 마...세...
 
질퍽하고 부드러운 진흙바닥 위에
화면 가득 입을 쩌억 벌린 짱뚱어 두 마리
먹고 사는 입이 크면 그뿐
주먹도
피도
눈물도 없이
고개 꺽고 물러나네
먹고
사랑하고
천국 같은 진흙에 뒹굴다
물이 들면 파아랗게 뛰어올라
하늘에 젖는 짱뚱어 세상.
(아! 한가지 아쉬운 건 그곳엔
TV가 안 나온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테나 잊지 마세요.) 

 


■부산일보
꿈속의 타클라마칸/김혜령          


사막, 능선을 타고 날마다 달린다 끝없는 사막 그 지평선이 사방으로 펼쳐지고 사풍에 휩쓸리는 모래산과 굴러다니는 언덕 따라 끝에서 끝으로 넘어진다 넘어지며 운다 모래바람에 눈을 씻고 일어나면 표지판 없는 사막 위로 햇빛만 굽이 꽂히고 그 빛 속을 춤추는 모래 아지랑이들,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다시 꿈의 관절을 열고 들어가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다 관절 구석구석 끼어 있는 모래먼지 밤새 씻어내고 닦아내면 어디에선가 물기 젖은 뼈마디 하나쯤 발견할 수 있을까 네가 네 삶을 우울하게 견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 이 무서운 사막의 출구를 찾고 싶어

기막히게 나는 살아 있다 더운 모래밥을 먹고 사풍에 실려 오는 모래산이나 모래언덕을 피해 내달려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모래가 식어가는 언덕 그 어둠 속에 뼈를 식히며 내 관절의 푸른 물기로 생겨난 사막의 길, 보고 싶어, 더운 모래바람 너머 출렁이는 내 삶의 푸른 실핏줄을

몸 깊이 언덕을 덮을 때 달아나는 꿈속의 타클라마칸.  

 


■문화일보
콩나물의 방/ 정유용          


맨 처음 침묵의 둥근 알이었다 껍질을 뚫고
목 끝까지 잠수를 했다 보자기만한 하늘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가끔 흘러오는 물줄기만이
푸르른 청맹과니 꿈을 흔들었다 처음으로 뿌리를
갖게 되었을 때 햇빛의 작두날에 한 번도
피 흘린 적 없는 우리는, 깜깜한 우물처럼 고요했다
눈부시게 깨워줄 햇살이 없으므로, 세상의
死線까지 간 적이 없었으므로, 아직은 풋내로
괴로웠다 더러 순결도 무거운 허물이 되어 발목을
잡지만 가슴에서 가슴으로 습기만 나르는
황홀한 입덧이었다 지나온 날들은
반짝 초록의 불씨들이 눈을 떴다
어둠의 탯줄을 끊은 새떼들이 앞 다투어
잎새의 날개를 폈다 오래된 하늘을 밀어젖혔다
상여꽃 피우는 햇살을 향해 날아오르는 저 미친.
 
 
■강원일보
그해의 기억은 밤나무 아래서 끝나다/ 전상범          


바람의 아들인 내가
처음 바다를 보다 거기서, 더 오랜
세월을 견디다 풍우뇌락의
습곡을 기억하다 지붕이 되어버린 산
나이테 둥근 내 속의 폐가 한채
흑백 티브이 안테나가 서 있고
밑둥만 큰 할아버지
잎새 무성한 칠월의 한때
서사적으로 혹은, 서정적으로
화면이 바뀔 때마다 뒤집히던 세상
내 밖의 허영
독선으로 가득한,
부정해야 할 화면 속의 얼굴들
비로자나불을 닮은 바위 하나
마음 밭머리에 버려져 있고
껍질이 벽 지어 놓은 내 안과 밖의 모순이여
고민으로 깊어지는 밤바다에서
차라리 꽃피는 수부라도 되었더라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밤꽃이 지던 칠월, 처음으로
단막극 세상의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 올랐다
나는 오래 밤나무 그늘에 앉아 죽음을 노래했다
모든 길은, 둥근 나이테 안에서
내몸을 휘감아 가시를 만들고
희망인 빛이 가지치며 토해내던 피
할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다녀가셨다
그해 여름, 

 


■광주일보
영산강 1/이수행          


- 구진포

개산마을 가시내 솜털 같은 바람이
은빛 물타래 헤치며 아흔아홉
꽃들 꽃산을 안고 굽이굽이
바랄 바 없이 넘실거리던 浦口
토실하게 정겨운 마을이었지야

보릿잎 총총한 강길 제방에서 나비떼처럼 뒹굴다
엄마 같은 각시를 꿈꾸면서 꽃반지
꽃시계 엮었던 시절이었지야
하얀 돛배들이 밀물을 타고
배암떼처럼 夕陽을 싣고 오면
석류알 터지듯 빛부신 浦口에서
다슬기처럼 붙어 앉아
버들피리 돌며 불면서 아버지들
붉은 손사래에 오금이 저리도록 기뻐
찔금찔금 눈물 솟치던 동물들이었지야

지금은 어디로들 갔는지 빈 하늘
이름없는 들꽃만 남아
여윈 강물 지키고 있지야
분열의 시대 아픈 고개
울면서 넘고 있지야 

'문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97신춘문예  (0) 2010.12.25
96신춘문예  (0) 2010.12.25
94신춘문예  (0) 2010.12.25
93신춘문예  (0) 2010.12.25
92신춘문예  (0) 201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