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2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48

 

조선일보

남행시초 1/ 김수영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는 마을의 불빛
눈알 뒤집으며 주먹다짐하기도 하면서
파도가 높음, 파도가 높음, 긴급구조 요망 긴급구조
깜박깜박 이 많은 골짜기를 감춘 세파에 자물쳐도
기다려라, 또 계속 가라
바람없는 낮엔 뜬 구름만 쇠주병에 담아 띄우기도 했어
때로는 잊혀지기도 해야할 젊은 날들처럼요
아버지에게도 바다는 길흉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을까
이미 예정된 깊이가 보이는 여정이었을까
하루 필요한 물과 기름을 받으면서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가
언제 덜컹 무심한 돌섬에 묻힐지 모르는 일
나는 같이 늙어가는 박씨의 사투리가 좋다
살아갈 날이 아침 안개속 첩첩으로 걸리믄
달포씩 밭그늘에 묵었던 지게가 낙락장송으로 뵈이고
지겟다리에 걸쳐둔 호멩이도 학모가지로 보이능거
아버지의 그리움도 갈수록 바람의 주먹이 매운
물주름으로 되돌아 왔었을까
한순간 바라다보고 있던 황량한 벌이
손바닥을 펴서 보여준
풀씨들의 집만 무수히 뚫린 외길로 통한 끝없는 황혼
담배만 되새김질하던 염소새끼까지도
흙먼지에 섞여 놓여나기만 하면
같은 피붙이를 기막히게도 찾아가는
떠도는 것만이 제 몫인 뿌리들은
이제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동아일보 
갈 수 없는 그곳/반칠환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에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 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세계일보
민들레 홀씨/김종욱          


새 학기가 시작되고 우리들 가슴마다
설레이는 5월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교실 창밖에서 떠돌던 홀씨 하나
살포시 날아들었네
어느 바람의 손길이
널 이리로 보냈니
오그린 손옹당이 안에서 파르르 몸을 떤다
가도가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뿐인
너의 기나긴 고통의 여정을 생각하면
정직한 노동이 어느 한 곳 뿌리내리지 못하고
멸시와 착취와 탄압이 샌드백이 되는
멍든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네 종족의 대이동을 가리키며
떠남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운동이라고
말씀하시네 봄날 푸른 하늘에
혁명군처럼 자욱히 떠올라 날아가는 저들을 보면
어찌 믿음을 갖지 않으랴
너의 선조들이 절정의 꽃으로 피어났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처럼 너희 또한
수많은 씨앗이 씨앗인 채로 남아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맨몸으로 뒹굴거나
시커먼 차바퀴나 구두 뒷굽에 밟혀 이름도 없이 죽음을 맞더라도
끝끝내 살아남은 동지들이
이 땅 곳곳에 질긴 뿌리를 뻗어내려
새봄에 관한 꽃망울을 터뜨리리라는 것을
호오!
하고 입김을 부니
홀씨는 보송한 솜털을 흔들며 주저없이 햇살 속으로 날아오른다
가거라
힘찬 네 동지들의 대열로.  

 


■서울신문 
꽃피는 아버지/ 박종명          


그날, 아버지가 앉았던 풀밭 주위에는 풀뿌리들이 하얗게 녹이 슬었다
내디딜수록 풀 길 없이 조여지는 어둠 속에서 지상은 비틀거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지하영세 전자부품공장 안,
온몸에서 흘러내린 땀내와 함께
납이 타는 냄새로 통풍되지 않는 공장은
더 이상 썩지 않는 쓰레기장 같았다
하루종일, 납땜 인두만 만지고 계시는 아버지ㅡ
소화가 잘 안되신다며 빈 속만 자꾸 게워내셨고
가끔 머리카락이 힘없이 빠지곤 했다
식구들이 잦은 빈혈의 조각들처럼 구석에 쌓여 있는
전자부품들 위를 이빠진 선풍기가
심한 요동을 치며 어지러운 세상살이와 함께 돌아간다
끝내, 저녁이 되면
납땜 인두공 아버지 손은 오그라들고 펴지지를 않았다
가랑잎처럼 삭은 어머니의 손이 아무리 펴보려 해도
아버지의 굳은 손은 더욱 펴지지를 않았다
강물 쪽으로 외롭게 내린 뿌리들이
속살 찢어 서러움 빚어내고 우리 식구들은
별빛이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오그라든 손을 두고 밤새 울었다

 

납빛 십자가, 풀밭 속에 파묻혔다
어둠이 절뚝절뚝 사라진 풀밭 속에서
무언가 물을 수 없는 말을 던져 놓으며
꽃잎들이 피어났다.  

 


■ 경향신문
와디 /소을석          
  -우리시대의 강

 

남김없이 흘러버린 강
바닥에 말라붙은 하늘을
낙타는 짜디짠 돌멩이가 되어 걷는다
수천년 전의 삼목 수림은 암각화로나 무성하고
사냥과 벌목에 기운찼던 장정들은
제 뼈 깎아내려 사막이 되었는지
인적 거둔 염천에 바람만이
모래기둥을 쌓다 무너져 내린다

 

탓한들 돌이킬 수 있으랴
제 발등 찍어 넘긴 도끼날
그 측은한 함락을 외로이 지키는
낙타는 또 수천년을
두고두고 바라보아도 쨍쨍한 하늘이 무심도 하지
두눈 가득 쏟아져 내려도 물기 한 점 맺히지 않는
어디에 그런 모진 침묵이 있는지
이글거리는 분노, 완강한 외면을 서성이는 발자국은
심장 위에 꽃수처럼 갈증의 화석을 심고
단조로운 풍경은 오래도록 쉬고 있어
갈색 관목의 시든 씨앗을 씹는 낙타의
기울어진 혹이 말라간다

 

무엇이 강을 쉬이 떠나게 했을까

 

불과 수십 년, 숲은 우거졌어도
웬일인지 강은 검게 말라붙어 다시 목마르고
사람들은 하나 둘 강을 떠난다. 그래도
이 땅의 하늘은 무심치 않아
비는 족히 내리지, 내려도
폐수로 굳어진 강은 풀리지 않고
낙타는 여전히 불타는 사막을 밟는다
다들 알고 있을까. 정작으로 두려운 것은
알면서도 제 살 썩히는 문명의 남용이라는 것을
집집마다 검은 강줄기를 하나씩 갖고서
맑은 날 하루 없이 오수를 흘리지
악취에 코를 막고 돌아서면서도
그것이 나를 등지는 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지. 하여
숲에서 생명을 발원한 강은 도시를 만나자 곧 숨이 막히고
아이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강은 검은 것이라고 말한다

 

비가 내려도 목마른 강은
비 오지 않아 목타는 강보다
더 큰 절망으로 깊다
나날이 조금씩
발목을, 허리를, 목을 차오르는
비오는 날에도 검게 마른 강
하지만 떠날 수 없지. 단 하나의 생명을
이 땅에 심었기에 떠날 수 없지
낙타는 몸을 야위며
사라진 강을 찾아 사막을 횡단한다
자동차와 빌딩과 인간의 사막을 건너
생명의 향기가 풍기는 투명한 물내음
마음 속을 먼저 흐르는 푸르른 강을 찾아

 

* 와디(wadi): 비가 올 때만 일시적으로 흐르는 사막의 건천  

 

 

■한국일보
 세한도/박현수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나는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나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중앙일보
하지/조재영

 

아이들이 돌아간 빈 놀이터에
누군가 그리다만 집 한 채
누워 있습니다
막대기 하나 주워들고 금을 긋다보면
그 집은 점점 커져 일어서고
덩그마한 집 한 채 저녁 불빛에
따스합니다
방문앞 신발 두켤레
입을 오므리고 기대 앉아 있습니다
어스름한 달무리 지붕을 덮으면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불빛도 꺼지고
가물가물 비가 내립니다
비에 젖은 신발 두 켤레
서럽게 정답습니다
밤이 너무 깁니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화영운수 개봉역 차고
줄지어 서 있는 무표정한 시간들
사이로 비가 내린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기울어진 하늘의 한쪽을 밀어 본다
여학생들 플라타너스 밑둥을 툭툭치며
비를 피하고 깔깔 웃고
잎잎에 올라앉은 하늘은 엉덩이를 들썩인다
플라타너스 흔들리며 흔들리잖으며
조금 내려앉는다
바람불면 다른 하늘이 올라타기도 한다
가지가 휘어 땅 가까이 닿을 듯하다
비그친 하늘은 어느새
쏟아낸 빗줄기만큼 가벼워지고
나무 등허리 주위로 넓어지는 한낮
말끔히 씻긴 차들이 시동을 건다
사람들은 차에 오르며
젖은 하늘 한 귀퉁이 지그시 눌러 본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광주일보
팔랑개비/ 정황희          


밀리면서라도 앞으로 가자.
멈추지 말고 빙글빙글
돌고 돌아 내부 공간을 만드는 나사못처럼
쉬이 뽑힐 뿌리라도 내리면서
지상에 촉수를 들이대고 뿜어올리기만 하는 나무의 체관, 물관부는 이동의
신비를 모르리.
알리바바의 암호처럼 해도해도 주문 같은 말
밀리면서라도 앞으로 가자.

 

머리에 유황을 덜 바른 성냥은 바람이 두렵다.
쪽수만 늘어난 추억은 그림자처럼 뒤로만 뒤로만 잡아끄는데
단단한 꿈은 성곽을 높인 채, 잿빛 구름으로 뜨는데
마른 풀들의 수런거림을 헤치며 달려온 바람은 외투를 벗으란다.
바지춤을 추켜든 손을 놓으란다.
꽃향기 거스른 바람도 바람이란다.

 

얼굴에 마주치는 바람이 어지럽다. 현기증도 어쩌면 자신을 숨기는 한 방법.
돌고 돌자. 어지러워 물체가 지워 논 구획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디론가 가기 위해 도는 것은 아니다.
꿈쩍도 않는 저 산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은 더구나 아니다.
심장을 쪼아대는 독수리를 향한 방어의 몸짓도 아닌데 · · · · · ·
아, 돌고 돌아 밀리면서라도 가지 않으면 안될 튼튼한 땅을 위해
불어라 바람아, 밀리면서라도 앞으로 앞으로.  

 


■강원일보
 열차에서/ 한승태          


군용열차 뒤로 풍경이 달린다
기차 속에 나는 풍경처럼 너를
생각한다 너무 쉽게 해버린 말을
강촌 출렁다리 아래 물결을 푸른 군복을
심지어는 손톱이 자라고 때가 낀 것까지도
의문이 간다 왜 일까?
너와 이야길 하며 왠지
불안하고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이야길
피하며 하릴없이 웃음만 흘리고
네 얼굴을 피해 땅거밀 잡고
돌멩이가 새삼스럽다는 듯 만져보고
무엇일까? 네 얼굴을 보면

 

한 마리 나비가 생겼다는 너의 가슴속을
군용열차의 철로가 거미줄처럼 달리고
변명하듯 너의 얼굴을 훔쳐보며
또 다시 바보같은 웃음만 흘리고
목울대를 삼켜내던 말들의 새김질이
군용열차의 기적소릴 들으며
뚝 뚝 끊어지고 내 자신을 의심한다

 

뒤로만 뒤로만 달리는 풍경처럼 너를 생각하고
그 뒤에 쫓는 기적 소리처럼 유행가와
웃음소리가 먹먹한 내 눈앞을 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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