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89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42

 

■한국일보
꼽추/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중앙일보
뿌리에게/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 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테니

 


■서울신문
비 갠 아침/김우태

 

비 갠 아침
어머니가 울타리에
빨래를 넌다
간 밤
논물 보고 온 아버지의 흙바지며
흰 고무신
천둥번개에도 꿈 잘 꾼
손자녀석 오줌바지
구멍난 양말들이
햇살에 가지런히 널려간다
쪼들리는 살림일수록
빨래감은 많아
젖어 나뒹굴던 낱낱의 잡동사니
가렵고 눅눅했던
이불 속 꿈들이
줄지어 널려가는 울타리에
오이순도 넌출넌출 감겨 오른다
빗물 빠진 마당가엔
풀새들이 눈을 뜨고
지붕 위 제비떼 날개 말리는
비 갠 아침
어머니가 빨래를 넌다
꺾인 팔은 바로 잡고
꼬인 다리는 풀어 주며
해진 목덜미
닳은 팔꿈치
아무리고 다독이면서
새옷보다 깨끗한 빨래를 넌다.

 


■동아일보
우리들의 고향/배진성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성은
고춧대 하나에 꽃혀 있었다
외토리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햇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나온 길로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고향의 밤, 별들이 싸운다 밤 하늘은
반란이다 바람이 분다 쓰러졌다, 다시
넘어진다 별은, 쌈질하는 입이다 주점
젊은 여자의 열린 자궁 속이다 길들이
제 골목을 찾아 들어가도 동네는 앞으로도
시끄럽다 물소리도 밤하늘을 쥐어뜯으며
이어져 흐른다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 우리집은
골목 끝으로 몰렸다 동네의 개들은 무리지어
일제히 짖어댔다 끝에 내달린 우리는 건너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바람에 쓰러진 곡식들이
줄기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솟아올랐다
태풍의 눈이 다시 무섭게 쏘아보았다 우리들의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포식한 어둠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악을 썼다 뭉둥이질
낫을 들고 휘둘렀고 쇠스랑으로 후려
갈겼다 무덤 속에도 하늘이 있었다 떠가는
흰구름 변두리 걸린 폐곡선에
갈라진 고향의 고샅길들이 감기고 있었다 그
하늘 속에는 메마른 공동우물이
파헤쳐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 조선일보
풀(2)/노용희

 

너의
숨쉬는 자유의 머리칼은
가장 고독하게 남아 있는
시대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의 언어로 시작된 꿈.

 

그 바람 타고
원시의 멜로디로 이는 아픔이
구도(求道)의 노래로 불릴 때까지
선명한 아침의 깃털로
발목 묶인 사랑의 전통이 뿌리째 무너지던
지난날의 이불 속을 털자.
지극히 간단하나 결코 그치지 않는
가락으로
삶이 가난한 잎새로 호흡하며
떨고 있을 때에도
나는 변하고 싶었다. 향기 없는 꽃으로라도.

 

그러나 샘물이 흐르는 우주는
언제나 우리의 잠 속에서
껍질을 뚫는 청결한 잎,
피어나는 진동음의
까다로움을 기다리고 있었네.
지상의 아름다움을 모독한
내 불륜의
가슴 아릿한 기억까지도
부적처럼 몸에 감추고서
서리 낀 바람 위에 이렇게 쓴다.
불러다오, 아픔을 위한 노래.
내 헝클어진 영혼의 지독한 방황과
부서짐과 거듭남을 위하여.

 

 

■경향신문
풍자시대에서-Video의 꿈/조기원

 

여기는 17inch의 꿈과 사랑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충족량의 서스펜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즐기시기를...... 태양계 한쪽에선 유성들이 별빛을 털며 사라져가고....... 치지익 치익...... 우리들의 애인은 전자오락실에서 갤러그 십만점을 역사적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치지직 칙..... 경찰은 결코 여러분과의 충돌을 원치 않읍니다 민족의 앞날을 지켜나갈 여러분,학생 여러분의 주장과 요구는 조국과 민족을 아끼는 여러분의 뜨거운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우리 경찰들은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과격한 시위는 여러분의 이같은 애국심을 의심받게 할 뿐이며 학생-시민-경찰 모두에게 피해만 주게됩니다. 경찰은 여러분들이 돌을 악...... 치이- ㄱ 사과탄 맞아 휭한 가슴 달콤한 아몬드로 고독을 달래십시요 루루 아몬드 초코렛...... 도시재개발사업이란 허울좋은 이름 아래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이 무참히 악 치지직 칙......사당......칙지직....치지직...물자절약을 생활화합시다.공익광고협의회............ 휴먼테큰의 명성을 얻고 있는 주시회사 별하나는 노동자를 협박.회유.납치하는 데만 120억 악 칙......치 치지직...... 아 아 종종 공포는 좌절을 부르러 가고...... 치지직 칙...... 어머니 이젠 지쳤어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마 모든 재벌의 상속된 재산에 대한 정당성은 재산의 이익을 사회에 환언한다는 조건에서만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치지- 치직 치- ㄱ.............. 노동자의 눈물과 피를 짜아내 만든 별하나 제품 절대로 쓰지 맙... 억... 아 여기는 관제된 아니 통조림의 세계 완제품만이 유통과정에서 우리를 만족합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오랜 공장생활이 여성근로자들의 [여성상]과 [모성]을 파괴시킨다는 칙......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둘 이었다. 눈물지며 교정밖에서 외치는 어머니의 울부짖음 아, 어머니 모포 네장을 덮어도 치가 떨리며 역력히 보이는 당신의 사랑 어머니 우리는 이렇게 떠나야만 했읍니다............ 애야 네가 아니더라도......... 애야 제발...... 치직 치-ㄱ...... 최종합니다 재벌들이 기부한 돈은 노동자의 식탁에서 콩나물 하나와 멸치 두마리 그리고 생선 몇 토막쯤 빼앗은 바로 그것이 아니냐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단 한번의 보도도 봇한 언론도 책임을 치직 억... 치지직...... 그 해 눈이 내리고 인공위성은 치근거리며 지구를 맴돌고 몇 마리의 워키토키 같은 쥐들이 우리를 기웃거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신문
비 갠 아침/김우태

 

비 갠 아침
어머니가 울타리에
빨래를 넌다
간 밤
논물 보고 온 아버지의 흙바지며
흰 고무신
천둥번개에도 꿈 잘 꾼
손자녀석 오줌바지
구멍난 양말들이
햇살에 가지런히 널려간다
쪼들리는 살림일수록
빨래감은 많아
젖어 나뒹굴던 낱낱의 잡동사니
가렵고 눅눅했던
이불 속 꿈들이
줄지어 널려가는 울타리에
오이순도 넌출넌출 감겨 오른다
빗물 빠진 마당가엔
풀새들이 눈을 뜨고
지붕 위 제비떼 날개 말리는
비 갠 아침
어머니가 빨래를 넌다
꺾인 팔은 바로 잡고
꼬인 다리는 풀어 주며
해진 목덜미
닳은 팔꿈치
아무리고 다독이면서
새옷보다 깨끗한 빨래를 넌다.

 

 

■대구매일신문
겨울판화/박윤배

 

헛배가 자꾸 불러온다
비닐포장 처마 위에 눈이 쌓이고
얼음꽃 차디찬 이마 뉘인 고등어들
비린내 상자에 잠겨서 지느러미를 꺾고 있다.
등줄기 시퍼런 파도가
살갗에 달라 붙는 소금알 몇 개를 닦아내고 있다

 

눈 치켜뜨고 살아가라고
사람들 얼마나 싱싱한가를 물어오고
가게주인은 몇 흡 소주에 취해
코 골며 망을 보는 한 폭 그림 속
어머니 심부름으로 달려온 아이 하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서성이는 겨울 저물 무렵

 

살소름이 점점 선으로 돋아나고 있다
바다 앞에 멈춰선 벼랑처럼
내가 발라낸 잉크는 미끄러지지 않고
머뭇거리는 추위 몇이 얼핏 보인다
앙상한 활굽이 등뼈로 누워
칼도마 위에 얹혀질 순간을
다물지 못한 입으로 가다리고 있는가

 

스물스물 죽음 도려낼 칼날을
귓밥 얼얼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는
분명 새겨 넣고 싶은 것 있어
굳은 피 혈관 속으로 세모칼을 밀어넣는다
흰 등뼈로 누워서만 살 수만은 없음을,
그리하여 완성되는 겨울 판화여

 

찢어진 부레로 눈발은 가볍게 내리고
싱싱한 뼈도 일으켜 세워야지
허무와 슬픔 뭉쳐진 대가리는
어느 집 싱거운 개가 물어갈지라도
가물가물 흐려진 풍경 속에 찍혀질
몸뚜어리 너는 늘 푸른 원목이여
나이테 눈물 중심부에 과거도 그려 넣어야지
사람들 고픈 배로 바라보던 고등어
내장 꺼내 던진 서러웠던 날도 있어
온기 나누고 싶어지리라

죽어 있던 이십대의 숯불심장 위로도
세상의 죽어 있는 것들에게도
소금 같은 눈발 한 줌 뿌려지고
불기둥 세우고 달려나갈
펄떡펄떡한 지느러미를 아프게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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