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85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08:25

 

■동아일보

안개 /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히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株式)을 가지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한국일보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정일근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재(四宜齋)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중앙일보
멸 치/전연옥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달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없이 빈 갈비뼈가 안스러움은
결코,
이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매일신문
어린왕자를 추억함/박진환

남들이 다들 중학교에 다니던
열 입곱의 나이, 내 생의 構文은
原絲工場 지잉징 달아 오르는
기계소리에
갖혀 밤샘하면서
유일한 친구 어린왕자의
 형한 눈빛을 꿈꾸었지.
이름 지을 수 없는 소혹성
밀밭 곁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더듬거리며 말을 걸기 시작한
어린왕자는 쓸쓸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활달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맞물려
감성의 한 때는 으깨어지고
내가 기르는 內省의 뜰에는
고분고분 길들지 못한 장미꽃들
상심의 가시를 달고 서 있었고
먼지 낀 기숙사 다다미방에 엎드려
책장마다 꿈틀거리는 글귀 위에 방점을 찍으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그해 겨울.
핏줄마다두근거리는 씨눈을 감춘 채
원사 몇 가닥으로 꼬여 나오는 말들
밤참을 먹으러 가는 식당길에는
푸푸 연신 푸념을 뿜어대면서
스팀 라인이 지나가고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마리를 기다리던
손시린 겨울 새벽, 기름기 절은 작업복 위에는
단추 떨어진 시간도 꽂혀 있었고
살결이 드러난 여공들의 하품소리가
천원 미만의 눈발이 되어 붐비고 있었지.
뿌리 깊은 외로움으로 밤새운 원사공장
퍼렇게 살아오르는 산소용접기 불꽃 속에서도
열 입곱 내 목마름은 녹아나지 않은 채
핏줄마다 두근거리는 씨눈을 감추고
小惑星의 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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