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86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08:27

 

■중앙일보
겨울 手話/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 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무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추면서
바닷가 갯물냄새 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 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한국일보
연장論/최영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 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아지못할 근원으로 한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 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 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 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一字나 十字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놓을 때
그때마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

■경향신문
꿈의 이동건축/박주택

1
목재를 실어 나르는 貨車를 타고
숲으로 가네
수맥을 짚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동안
구름이 어둡게 어둡게 몰려오지만
풀밭에 제비꽃 몇 장 숨기고 있겠지
훠어이 훠어이 부는 바람같이만
처음인 곳으로 가는 나중의 하늘
숲 속으로 들어서면 푸른 잎맥의 바다
물레를 잣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하늘이
내게로 내려와 물을 주시고
마을의 풀밭에 씨앗을 뿌리시고.
아하 바람은 한사코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끌로 땅 끝을 깎아 나무들 사이의 行蹟을 깎아
햇살을 모아 두면서, 바람의 옆모습을 지켜본다.
세계는 옆으로 열리고 열린 창문처럼
쑥뿌리가 내 겨드랑이털까지 휘감아 돈다.

2
뽑힌 노을은 東쪽 하늘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창포 꽃잎이 티눈처럼 손바닥에 퍼지고
귀에 잡힌 푸른 공기, 푸른 목숨이 서럽게 느낄 무렵
가슴 속 얽혀 있는 내 生涯를 점치리라.
별을 보며, 넓적다리에 진득거리는 절망을 떼어다오.
어제처럼 노을 위에 누울 때
까마귀떼 내 발밑으로 돌아와 눕고

무릎 사이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강물이 빠져나가 시방,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랑 앞에 서면 반딧불보다 더 빛나는 나뭇잎들. 산이 되는 바람에 의해 숲을 건너온 강물은 팽팽한 슬픔을 만드는데
나는, 흡반으로 길고 먼 바다를 빨아들인다.

한 마름의 비단으로 아버지가 가슴을 껴앉네.
이 손바닥에 비쳐지는 단 하나의 바다. 우수의 불꽃,
안개 표지판 없는 生涯의 채찍을 몰아
西녘 하늘 굽이굽이 돌아 모두
내 집으로 불러들이는
내 뒤를 밟던 새떼.

3
손수 나의 흉금을 털어 놓자
화살 모양의 안개는 지평선 밖으로
과녁을 찾아 떠나가고,
나는 집 구조와 가구들을 이동시킨다.
강물 때문에 어느새 현기증이
높낮이의 생애를 닮아가도
나는 다시는 태양을 찾지 않는다.
처음으로 약속받은 땅의 일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바꿔지지 않는 것이므로.
다만, 나무들이 지평 위에서 나를 지켜보기 위하여
날마다 까마귀알을 받아낼 뿐이므로.

그러면서도, 생명을 낳고 뜨거운 혈맥을 찾아 계곡을 건너온 물소리가 굽이굽이 천정을 울리고, 허물을 벗는 바람을 얼러 등 굽은 회양목 아래서 또 다시 깊은 잠을 자리라. 그때는 겹겹의 사랑이 땅끝에서, 살아 있는 나를 눈물겹게 껴안아 주리라.

내 입의 불, 어두운 저녁녘에 그려내는 내 눈의 太陽.
꿈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아름다운 약속.
지평을 밝히는 꿈으로 새는 날아가고
머리에 불꽃을 이고 아침.

나는 잠을 깬다. 일찌기
내가 貨車를 타고 이주해 온 숲의 아침에
맑은 햇살이 거미줄을 투명하게 비춰주고
보물과 곡식들이 가득찬 나라에서, 말하리라.
깊이를 숨긴 고독 속 새로 남아
내 굴레가 무었이며
어던 속박으로 죄어드는가를.
그때,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양떼들의 풀밭에 양떼구름이
어떻게 순례하는가를.


■서울신문
수렵도/이진영

눈 내리는 그 겨울 산야에서
나는 고구려의 사내와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사내는 나무창을 들고
범의 뒤를 날쌔게 쫓아가고 있었고
나는 엽총을 든 채 그의 뒤를 숨차게 따르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무창으로 범을 쫓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현대의 지식에 잘 숙달된 나에게는
총이 아니면 범은 잡을 수가 없는 짐승이었다.
또한 현대식 사냥은 짐승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해
정확히 사격해야만 되는 것이었으며
사나운 짐승일수록 멀고 은밀한 곳에서 총을 겨누어야만
안전하고 노련한 사냥 방법이었다.

고구려의 사내는 더욱 힘차게 말(馬)을 달려
날쌔게 범의 뒤를 쫓아가 나무창을 던졌고,
그때 눈발 속에 나부끼는 그의 뒷모습은
건강하고 튼튼한 한반도의 참모습.
숨을 할딱거리며 뒤따라온 나를 향해
고구려의 사내는 날쌔고 용감해야
사나운 짐승을 잡을 수가 있다고
또한 힘과 땀과 온몸으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사냥법이라고 웃으면서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현대의 지식에 깊숙이 물든 나의 머리뼈와
사냥 상식을.
눈발 멎은 하늘을 향해 마음의 백마가 큰 소리로 울었을 때
고구려의 사내는 범가죽과 함께 나무창을 내밀며
사슴을 쫓아가 보라고 말하였다.
몇 채의 산을 넘고 드,ㄹ판을 지나 나의 등줄기가 축축해졌을 때
아, 범가죽 위에는 어느새 사내의 이름이 풋풋하게 돋아나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던 것을.
나의 나무창에도 온몸에도 땀과 힘이 푸르게 솟아나
한반도의 먼 힘줄기를 서서히 닮아가고 있던 것을.

비로소 나는 엽총과 함께 힘없는 현대의 지식을 눈더미 속에 파묻으며
강물처럼 그에게 말하였다.
나도 이제는 고구려의 사내로 말(馬)달리겠디고,
용맹스런 고구려의 사내로 말(馬) 달리며
범가죽 같은 나의 나를 남기기 위해
넓은 들을, 넓은 세상을 온몸으로 투신하겠다고.
이윽고 고구려의 사내는 야생의 백마를 타고 웃으면서
지평선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가고,
눈 내리는 그 겨울 산야를 힘차게 달리면서
나는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설매화처럼 싱싱하게
나고 있었다.


■매일신문
신월동의 눈/김완준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있다
이곳은 강서의 긑, 몇 대의 버스 종점과
번지 수보다 더 많은 가구들이 사는 곳
날마다 불도우저 삽질 소리 요란하게
남부순환도로의 한 끝이 파헤쳐지고
확인할 수 없는 서울의 한 끝이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인가, 오랜 친구처럼
내 어깨 위에 쌓이는 이 눈은
또 어느 슬픈 죽음이 삐라처럼 휘날리고 있는가
언제부터인지 가난한 이웃들은
도시의 외고가으로만 밀려다니고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땅을 위하여
이곳의 아이들은 종이배를 접지만
그들이 가닿을 꿈의 항구는 눈발에 가려 아득하고
밤이면 저 먼 샛강 위로
휘황한 서울의 생애가 떠내려 간다
오늘 하루 눈이 내려
강남과 강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막히고
우리들 삶의 귀가길도 아득한데
지친 하루를 살고 돌아오는 젊은 가장이여
이제 당신들의 서울은
어디로 시린 발목을 뻗을 것인가
인간이 사는 마지막 동네를 찾아 떠나온
집배원 우편낭 속으로 눈발이 날려
기억할 수 없는 몇몇의 주소가 지워지고
매운 바람에 코를 씻으며 돌아다니는
아이들 한쪽 어깨가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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