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87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08:32

 

■중앙일보
봉함엽서/이상희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가난한 눈물로 물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가게 해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로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다오.


■경향신문
맨발로 걷기/장석남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동아일보

돌/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 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간다.
떠내려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 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굽이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 갈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세찬 여름비의 며칠이 지나고 햇빛 쨍쨍한 날
가슴에 이끼날개 달고
밤 속으로 은빛공간 열며
별이 되는 꿈을 꾸는
조약돌 몇이 얼핏 보인다

 

 

■조선일보
도계행/김세윤

강원도 산간의 생나무 구르는 소리를
아득히 푸른 강가로 띄워 보내리
정월 대보름 아이들이 올라가
하늘에다 횃불을 당겼을 때
이쪽 능선에서 저쪽 산허리끼지
조그맣게 빛나는 것들이 달려갈 때
스쳐가는 화차의 꼬리는 보이지 않고
네 맑은 눈이 강물 위로 떠올랐다 사라져 간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눈이 부셔
이름 없는 마을까지 황홀해진다
땅 전역으로 숨쉬는 고장
황비발 도계행 차창 밖에선
탄더미가 턱턱 숨을 막는다
달리는 철로 아래로
함성 내지르며 뛰어드는 눈
눈은 몸을 버리고 숨소리 하나로
검뎅이 묻은 사람들의 등을 어루만지다
강원도 산들을 온통 설경 속에 묻는다

잠시 눈 그친 사이
아이들이 달려나와 들불 놓는다
멈칫멈칫 불은 꺼지고
어린날 목탄차를 타고 가던 저 들과 들을 지나
일어서는 땅 속의 검은 물줄기
연한 지각을 뚫고
지상으로 마구 솟아오르는
네가 바로 불꽃이구나,
봉홧불처럼 타올라 차창을 부딪혀 오는
네 뜨거운 폐활량이여

게딱지만한 탄광촌의 집들을 지나
눈 덮인 산을 돌아나와
이 산 저 산의 흰 말떼들이
아득히 푸른 강가로 굴러 떨어질 때
얼마나 숨차게 달려야 네게 닿을까
도계의 땅 밑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의 불 속으로
뛰어들면, 네 작은 석탄 하나의
성채와도 같은 막장으로 밝아오리
출렁이는 석탄차의 석탄들같이
따스한 이웃의 불로 다시 살아오르리


■한국일보
관찰법/송용호

저탄장으로 귀가하는
화물열차의 기적소리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밤새 바람은 나비처럼 석탄가루를 날라
마당 가득
꿈만큼이나 어지럽게 피어난 철쭉꽃잎 사이 사이에 뿌리고
나는 사분의 사박자 행진곡에
발맞춰야 할 내 춤의 한 귀퉁이를 비우기 위해
애써 거짓일기를 쓰곤 했다
아무리 해도 잘 풀리지 않던
우리나라의 산수과목 문제와 함께
자라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자주 나의 장래를 의심하곤 했다
잦은 어머니의 등교로 우수수 우수수 낙엽되어 쌓이던 나의 성적표
때때로 그곳에 산불이라도 나기를 바라며
무궁화꽃이 자꾸만 피고 져도 찾아내지 못하던
이 다음에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미리 걱정하곤 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 이름표를 달듯 쉽게 바뀌곤 하던 내
희망의 간이역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던 절망의 상처에
어머니는 빨간약을 발라 주셨지만,
유년의 계획표는 가뭄처럼 갈라지고
국민학교 6학년을 마감하는 생활기록부에는
불안한 졸업이
버즘처럼 피어 있었다

 

■서울신문
어머니의 겨울/유강희

할아버지 산소가 멀리 보이는 무너져내린 언덕에
어머니는 몇천 년 눈물로 헹구어 온 보리씨를
朝鮮의 한 뼘 가슴을 파고
그 기인 어둠 홀로 찍어 삼키며
박속 같은 얼굴로 뿌리시었다.

건너 들에 마른 이마 때리는 눈발이 내리기 전
우리들은 서둘러 우리들의 鳶을 만들어야 했다.
생전 할아버지의 숨결 푸른 마음으로
대쪽을 가르고 다시 잘라 다듬어서
山脈처럼 이어온 끈끈한 人情의 밥풀을 먹여
새 날개 같은 흰 옷의 韓紙에 붙이면
그대로 살아오신 우리들 어머니 모습

우리들은 언덕보다 커다란 연에 따순 핏줄 같은 연줄을 매달아
보리밭 위로 날리기 시작했다.
감나무 깨죽나무를 지나 시암골 너벙바위를 넘어
하늘 높이 마악 솟구쳐 올랐을 때
활처럼 보리밭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그 흰 모시 수건이 보였고,
여름 한낮 날빛 번개가 휘두르고 간
어머니의 그 갈라진 발바닥 틈으로
가을 하늘보다 맑은 江물이 흐르고 있음을
아니 그보다도 그 하늘보다도 겨울의 언덕을 넘어
어머니의 보리밭이 불길처럼 새파랗게 타고 있음을
마을로 마을로 더 큰 마을로 타들어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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