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0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45

 

■동아일보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
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
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
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
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세계일보 

만화경 /김용길   

       

아이와 색종이를 오리면서
도화지에 붙이며 그림을 만들면서
그림 뒤로 사라져 버리는 색종이의 뒷면을 생각했다
울긋불긋 빛나는 이 세상도
색종이의 뒷면 같은 무엇이 받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뒷면이 사라지면 그림은 남을 수 있을까
거대한 이 도시는
뒷면에서 뼈를 세운 노동이 팔 뻗쳐 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이 만큼의 생활도
보이지 않는 이들이 떠받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문에서 종이가 없어지면 글자들은 어떻게 떠오르나
우리의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그런 색깔로 떠오르나
잘라서 남는 종이들은 왜 쓰레기로 버리면서
우리들의 삶의 어느 부분도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게 아닐까
버려지지 않고
뒤에서 떠받들지 않고 사는 세상이 없을까
문득 궁리하다가 색종이를 잘게 잘랐다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아빠 무어야 한다
유리를 몇 개 주어다 만화경을 만들었다
안팎이 없고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이루어졌다
아이가 좋아서 깡총깡총거린다
 


■한국일보 

청소부/이윤학    

      

누워 있는 것도 벽이었다. 출근길 서둘러 밟고 온
보도블록에도 무늬가 있었다. 단색세포처럼 또박또박
놓여 있었다. 밟히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기우뚱
거리며 빗물을 토해 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을 만들며 스스로 자라야 했다.
한번쯤 앞서고 싶은 길
바람을 견딘 만큼 몸으로 주름이 잡혔다.
지워지는 혈관을 찾아 나는 불안하게
흔들려야 했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만 쏟아졌고 아이들은 티눈처럼
자라 있었다. 엉킨 뿌리를 들고 일어났다.
태풍이 겹겹으로 껴입은 주름을 더듬고 갔다.
그리고 바람이 통 없는 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이들은 조금씩 흔들릴 때 아름다웠다.
껴안은 모든 것들 속에서 너희들은 동티처럼
부활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소문 없이 떨어질
나를 위해 남아 있어야 했다. 깨끗한 너희들,

 

밟히는 족족 주름을 벗고 탄생하는 은행알들.

 

 

■조선일보 
 나무를 꿈꾸며/    전원책          

 

1


땅 끝에 모여 사는 나무들은
밤이면 걸어다닌다.
설레이는 별들 물어린 눈을 뜨면
누가 먼길 떠나는 것일까,
때 이르게 어리는 달무리
이웃들이 등 내달아 길 밝히고
나무들도 컴컴한 숲을 따라 걷는다.
아무도 잠깨어 슬퍼하지 않는 밤
반짝이는 햇빛 푸른 하늘 사람이 그리운
나무들은 함부로 노래하고 운다.
은빛 빛나는 톱날 같은 바람이
우루루 여기저기 몰려다니다
제 살을 베어내 머얼리 날려보내며
나무 밑을 서성일 때
수액을 떨구는 은박의 그림자와
긴 팔을 가진 나무가
"쉬잇 나무꾼이다" 속삭이며
어린 잎을 잠재운다.
가만히 숲을 흐르는 나무들의 귀엣말
은밀하게 퍼져가는 전갈을
차고 슬픈 시간에
그루터기에 쌓여 가는 달빛이 듣고 있다.
"곧 무서리가 내리겠어" 대단한 걱정거리를 두런대면서

 

2


바람마다 별들이 떨고 있다.
묵묵히 자라나는 내 이웃의 나무
밤이면 잎을 틔우는 나무여.
나도 수 없는 푸른 잎을 매단다.
저물도록 땅을 파고
아득하게 흐르던 순한 강물을 당겨
머언 땅끝까지
캄캄히 잠든 뿌리가 깨어나고
나는 함부로 노래하고 운다.
알고 있을까, 나에게는 누울 곳이 없어
맑은 날에 부끄럽게 달을 만나고
아직 갚을 빚 많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밤마다 손질하는 것이 그저 바람이며,
제 살을 베어내 머얼리 날려 보내는 것을
글세, 알고 있을까 사람들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건너뛰는 마른 번개와
그 일순의 광채 뒤에 숨은
기인 고뇌의 울음이
최후의 탄사처럼
천천히 정수리로 떨어져 내림을.
나에겐 듣는 귀가 없어
저 기막힌 인과를 짐작하고 운다.
새벽에 꽃 한 송이 가슴에 달고
밤새 자라 있는 나무이기 위해  

 


■서울신문 

 신월기계화단지/김유석          

 

1


숨가쁜 아침이 박명의 들판에
고함소리로 몰리고 있다
논두렁마다 잠의 젖니에 물려 있는 풀꽃들은
따스한 체온 굴러 떨어지는 이슬의 몸살이 아프다
수십년 세월을 갈아온 늙은 쟁기꾼의
이랑 같은 주름살 무심히 밟고 가는
바퀴 밑에 깔린 녹슬은 보습 하나
비켜 선 황소 눈망울에 시름이 깊다
자그만 나사 하나만 풀려도 드센 고집을 부려
사람의 코뚜레를 뚫기도 하지만
한 필지쯤이야 해장거리
구발산 힘을 뽑아 온 봄을 갈묻이하는
39마력 짜리 포드 아, 아니 대동 트랙터
저것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황소 목울음 끝에 매달리는 농부가 한 소절을
앞세워 돌아오던 풍경소리를

 

2


갈비뼈 부러진 정읍댁 지붕 위에
마늘쪽 같은 낮달이 걸려 있다
오래된 문패처럼
마당귀에 대추나무 홀로 여위고 있다
들대에 서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어둠에 젖어 있는 고샅길
물집 터진 흰 고무신짝 하나 무심히 떠올 뿐
조금만 곁눈을 주어도 목이 메어
낯빛으로도 다 못 감추는 사랑
허물없이 국수사발로 말아 건네던 사람
기러기 떼처럼 늘어서서 띠앗머리 좋게 모내던
그 모잡이들 다 어디로 가고
모춤 위로 문득문득 떠오르는 얼굴을 감춰서
장승같은 이 외로움이 가려질까
꺽어서 풀빛 그리움이 그만 지워질까
무심한 기계도 멀찍이 받쳐두고
흙빛으로 얼굴을 내미는 외로움에
풋마늘을 찍어가며 혼자 찬밥을 먹는다.  

 

 

 

 ■중앙일보 

  갯바위섬 등대/  임영봉    

      

백년묵은문어가밤마다사람으로변신하여그고을군하나착한처녀를
꼬셨드란다온갖날다도해해떨어지는저녁마다진주를물어다주고진
주를물어다주고장인장모몰래서방노릇석달열흘진주알이서말하고
한되

 

처녀는달밤이좋아라달밤을기다리고그러던중무서워라냉수사발을
떨어뜨려깨어진날먹구름이끼고달지는어둠새끼손가락약속은무너
지고사랑이보이지않는칠흑같은어둠속아주까리불심지는뱀처럼흔
들거려타는구나

 

이승에서의신표거울은몸안에돋는가시만보이다갈라지고모든주문
들의효력도별처럼흘러가고돌아오지않는사람을몸달아흘리는신음
으로손에땀적시며문빗장풀어놓고동백기름먹인알몸뚱이꼬며전신
으로기다리는구나

 

돌연문빗살에엄지손톱만한구멍이뚫리고새가슴으로놀라는어머니
한숨줄기눈물줄기앞서거니뒤서거니줄을잇고아이고폭폭해서나는
못살겠네보름달대신배가불러오는이유끝끝내는쫓겨났드란다

 

그날이후로빛나는눈빛을생각하며바다를바라보며하루이틀사흘헤
어보는손가락접고진주알진주알문고리휘어지는아히를낳았고아히
가자라면서바라보이는바다는부활이다부활이다 

 


■매일신문

  갈증/하재영  

        

물을 마시고 싶다.
공해의 흠이라곤 한 점도 없는
찌든 생활의 울타리 주변
음료수 껍데기, 비닐조각
퀴퀴한 냄새 밴 물이 아닌,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밤낮 푸르고 붉은 사과
신호등 불빛으로 머물러 있어
신호등을 모르는 사람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계곡의 물
물을 마시고 싶다.
텔레비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색깔과 소리도 모르고
신문지상에 박혀 있는 활자하고도 무관해
그저 해처럼 달처럼 흘러가는 일상
두 손 찰찰 넘치도록 받아
입 속에 넣어도 보고
어깻죽지에 뿌려도 보고
그것도 부족해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마시고 싶은 물
고된 산행에서 느낀 갈증의 후유증처럼
새날의 징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며
우리들의 깊은 가슴 속에 고여 있는
마알간 물을 마시고 싶다.  

 

 

■경향신문 

 이달에는 주여/ 조성화 

         

주여 이달에는 제법 살 만하게 하소서.
하늘 쏘다니는 저 갈가마귀의 입에서 떨어진
잎새 하나로 내 앞뜰의 쓸쓸함이 위로 받게 하소서.
비온 뒤라 선뜻 집 나설 생각 없지만 집밖의
비 맞은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자신을
가지게 하소서. 확실히 지친 사람들이 더 많은 비를
맞고 당신을 찾는데 위로의 대명사여. 이 달에는
제법 살 만할 거라 속삭여 주소서. 눈길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가난한 발걸음들. 찬란한 골목에서 등 돌리고
편만하게 깔린 당신의 그림자에서도 빗나가
보는 삶이 삶의 전체가 아니다는 당신의 뜻이 왜
지극한 위로가 되는가 깨달을 듯 말 듯 하면서
외출화장을 한, 기억이 까마득한 아내에게로 가는
저희들의 발걸음에 이 달에는 제법 살 만하게
해주겠다고 속삭여 주소서. 이 달만큼은 틀림없이
살 만할 거라 소리쳐 주소서.
 

 

■ 강원일보

  강 / 최광호       

   

끝이 보이는 물가는 쓸쓸하구나.
바다까지의 거리 아득한
세계를 살아가는 행복스럽지 않음이여,
기다림 모르는 사람들이 버린 과자봉지가
푸드득거리며 물수제비로 떠가네
봉지에 몸을 실은 낙엽 하나를 보네
낙엽처럼 한 생명이 지구로 떨어진
1966년 어느 날 가루비 흩날리어,
공지천교 마무리공사를 하던 인부들은
다리밑에 모여 낙엽을 띄우며
살아가는 일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리
흐르는 것은 과연 돌아오지 않는가.
저 빛좋은 물비늘에 휩싸여
흐르지 못하는 시대의 시심이여, 세계는 변해왔으나 자주 아름답지 않았음을
강은 이윽고 알게 되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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