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1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46

 

■경향신문
황야의 정거장 /서규정
     - 복지국가로 가는 차표를 어디서 팔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잔털 털 보숭보숭한 여공 하나 데리고 떠나고 싶어 앵두꽃 피는 시절 기쁨과 슬픔마저도 탕감하는 저 반달 달빛이 스며드는 기숙사에서 앞장 뜯어진 노동자 천국을 읽으며 뒷장을 다 넘긴 줄도 모르고 방바닥을 집어 넘기는 손 떨리는 이 경련의 세월을 공녀야 공녀야 어디만큼 가고 있었니
 
  천국은 멀어 천국은 멀어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제 강가에 나와 천막을 치면 우리들은 바느질 같은 발자국을 듬성듬성 비켜 남겨야 하네 아직은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강가에서 바람의 손이 닿지 않는 물 속 깊이 씨앗처럼 숨어 있는 까만 눈동자를 찾기 전에 급한 물결은 어디로 가  땀방울로 수출되는 강물아
 
  일어서는 것도 함정이었네 보이지 않는 발자국부터 시작하는 우리가 저 담벼락에 그려진 지상낙원 뼈저린 어깨로 기대어 보는 보라빛 기둥 무지개가 꽃가루처럼 부스러지며 페인트로 밝혀져 있는 공장 담벼락 희망이 무지개처럼 솟고 상식이 모래알처럼 깔린 신작로를 따라 긴 긴 머리 검은 연기처럼 날리면서 가고 있을 공녀야 그대 눈썹은 웃고 있는가 울고 있는가 여기는 벌판과 환희가 스쳐간 페인트 공화국
 
  가자 가자 약속의 땅 은행잎 닮은 손바닥이 시간의 차디찬 엉덩이를 때리듯 담벼락에 한 폭 낙관으로 찍힐지라도 맨처음 발자국은 버려야 하네 저 고개 넘어가는 잠의 산맥은 넘어야 하네 아침햇살이 쨍그렁 기숙사 유리창을 깨뜨리기 전에 가자 가자 달빛을 타고 미끄러지며 스르르
 

 

■한국일보
가구의 힘/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구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서울신문
활엽수림/ 함명춘          

1.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 세기를 줄이고 깎으며 살아온 잡목들
빽빽이 들어차고 간간이
바람이 긴 머릿자락을 휘날리면
ㅈㅊㅋ 격음화현상이 일어나는 활엽수림
저녁은 관습처럼 무섭게
산허리를 들이받으며 내 행동반경권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바로
코앞에서 길 하나가 논두렁에
처박히고 한 떼의 곤충들이 증발한다
문득 어디선가 맵고 차고
단단하게 들려 오는 어둠의 호각 소리
불규칙하게 연소해 들어가는
꿈속처럼 깊은 바다,
활렵수림이여
먼 순례의 길에 오르는가
퇴색한 나의 멜라닌 색소에 푸른 물을
들이고 싶다


2.

잠들지 못하는 바다 그 어디에서
삭정가지처럼 걸린 수평선이 부러져
내릴 것만 같다
빛바랜 꽃잎 혹은
빈 술병으로 나뒹구는 어둠 속에서
꾸겨진 나를 발견한다
나를 조소하듯 어두운 곳에서 촉망받는 별들
얼마쯤 걸어왔을까 뒤돌아보면
급격하게 커지는 바람의 폐활량
숨이 가쁘다 가면 갈수록
뒤로 물러서는 활렵수림이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등줄기가 몹시
가렵다 긁기 위하여 손을 갖다 대면
새까맣게 타들어 오는 밤 12시
아직도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들이
돌아오지 않는 활렵수림으로 남아
희미한 고요의 불빛을 지키는 밤은
저울추처럼 좀더 엄숙한 곳으로
기울어진다.  

 

 

■조선일보
오늘 서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 이재성          


바늘을, 한 움큼 삼킨,
목까지 잠기는 시커먼 스모그의 급류 속으로
나는 떠내려 간다. 허위적거리며,
산발한 물귀신의 머리카락에 발목을 잡힌 채,
납빛 가면을 쓴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아니야, 물소리야. 저기 사람이 떠내려가는데?
아니야, 나무토막이야. 그런가? 정말, 그런데!
닿는 곳이 어디인가.
세상에서 그렇게 잊혀져 간 사람들.
강의 하구 부드러운 모래섬에서,
봄날 죽었던 가지에서 다시 피어나는
잎새처럼, 꽃잎처럼

서해안 개펄같이 질퍽한 시장바닥을,
다리가 퇴화한 파충류처럼
얇은 뱃가죽을 문지르며 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 잃었을까?
이데올로기 전쟁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의 이빨이 물어뜯었을까?
공사판에서 질통을 지고 오르다 아찔한 현기증에 실족을 했을까?
그러나, 그의 하체에는
생명만큼 질긴 고무타이어가 새살로 돋았다.
무좀 방지 구두 깔창과 양말을 유모차에 가득 싣고,
온몸으로 밀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창으로 찔리듯,
매미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내려꽂히는 삼복더위의 뜨거운 햇살에
등을 마구 찍히며,
저 세상으로 가는 4호선 지하철역 입구,
비닐하우스에서 속성으로 재배된 꽃 옆에서
점자책 가사를 더듬으며 늙은 스피커통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의 목 위에는
철셔터문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위태롭게 걸려 있고,
사람들은 세상의 오자 투성이의 점자책을 더듬으며,
시간의 단두대 밑을 오고간다.

오늘 아침 여기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났었다.
신호등의 파란 불만 보고 건너던 임산부가
트럭의 바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름도 얻지 못하고 죽은 어린 영혼의 무덤은 어디인가.
마구 물어뜯을 사람들의 목덜미를 겨냥하며
술취한 미친 개떼들이 질주한다.
깨진 빗살무늬토기같이 생긴 횡단보도를
목숨걸고 건넌다.
인신매매 당한 어린 소녀들의 피를 빨아먹은,
유흥가의 네온사인의 혈관 속으로
붉은 피고름이 흐른다.
음란한 눈을 깜짝거리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환락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들어간 사람들은
"나"를 잊어버린다.

어두운 저편에서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저편으로 사라지는 회전문,
문이 돌고 돌아 환히 열린 세상은 언제인가.
언제 튕겨져 나와야 볼 수 있는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가죽과 살이 해체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뻐근한 고개를 쉬지 않고 돌리며 감시하는 선풍기의 눈 밑에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나는 이번 정거장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내일 아침 마당에서 가슴의 나무에 핀
사람의 숲을 볼 수 있으리. 


■동아일보
초분 1 / 장대송          
  
화랭이가 안내한 바닷길 구만리
살은 볏짚으로 덮고
뼈는 갈매기 둥지에 품고 살아가리
남도 바람에 세간일 듣고
관고개 넘나드는 까마귀등에서 날 보내다가
낡은 어선으로 어망질하여
한 삼 년 살다보면
조금 서운해도
품은 뼈에선 극락조가 날으리라
 
팔목의 한은 염기로 녹슬이고
동공은 낙숫물로 씻다보면
두고 온 아내는
3년 길 다간 후에
다시 둥질 틀어 품다보면
사방으로 사방으로
외로운 삼 년이 지나리라
 
아!
서러운 남도 바람에
네 귀는 떨리고
볏집은 흐트러져도
다시 삼 년은 지나리라

 


■중앙일보
 우리가 매다는 장식은/ 박영   

       

우리가 매다는 장식은
서로를 빛내주고, 빛나게 하는 보석이다
누구나 장식을 하며 살아가는 시대
장식이 없다며 떠드는 자들의
말, 그것 또한 장식이다.
장식을 매달기를 바라는 자들의 꿈, 그것 또한
장식이다. 장식천지의 세상에
우리의 공허는 깊어만 가고
여자들은 공허의 무게만큼
옷을, 보석을 매단다
사내들은, 장식을 매단 자들을
장식이 아닌 듯 장식하고, 또 하나의
장식을 꿈꾼다. 웃음소리, 그 빛나는 장식음을
우리는 결국, 얼마간 서로를 장식하고 나면
하늘을 장식하는 별들이다. 누군가에 의해
보리씨앗처럼 땅에 던져진 우리는
서로를 장식하기 위해, 닦아야 한다.
우리의 웃음을 윤이 나도록 닦아
우리의 하루에 금시계로 걸어 놓아야 한다.
비록 짧게 똑딱거리다 멈출지라도
우리의 장식이 가 닿지 못하는, 우리의 공허를
가득 채우는 장식음, 빛나는 보석음을 장식해야 한다.  

 

 

■ 세계일보          
슬픈바퀴/박윤규  
       -브레히트를 생각함
   
한계령 정상, 이젠 내리막이다
기하급수로 따라붙은 가속도를 조절하느라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잡으면
단풍 설악은 풍랑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산동네 식당 앞에 두 바퀴를 세웠을 땐
향로봉에 찔린 하늘 피가 번지고
몇 채 안 보이는 인가엔
저녁 짓는 연기가 환각제 같다
 
산골식당 문을 젖히고 들어서니
어깨 큰 반백 노인네가 돌아앉아 있다
등은 적당히 굽었고
목엔 역마살 깊이 주름진 강
쥐색 베레모를 푹 눌러쓰고
느긋하게 산채비빔밥을 먹고 있는
노인의 코트는 지독하게 바랜 검은 색이다
그의 왼쪽엔 보다 만 듯 접혀진 책 한 권
    
     슬  살
     픔  아
           남
           은
           자
           의
 
노란 표지에 회색 제목 외
더 작은 글씨가 줄을 서 있지만
그건 이미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식탁 모서리를 잡고 허물어지는 나
 
두 줄기 뜨거운 강이 뺨을 타고 내려와
책표지에서 합류하여 제목 위로 범람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울었다고 느꼈을 때
노인은 숟가락을 놓고 내 어깨를 다독이다
연기처럼 식당을 빠져나간다
황급히 따라가니, 잠겨 가는 노을 속으로
씁쓸한 웃음과 손짓을 남기고
마른 은행잎 부서지듯 점점이 사라진다
허위적거리며 부르지도 못하고
다시 들어와 책을 집으니
"브레톨트 브레히트 시선"
아직 젊은 베베가 베레모를 비껴쓰고
흑백 명함판 사진으로
나를 깊숙하게 바라본다
접혀진 부분을 펼치니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베처럼 입술 굳게 다물고 창밖을 보면
비룡폭포에 씻은 설악산 별이 뜬다
댓잎같이 푸른 시절 불꽃으로 살아
스스로 먹장하늘길 걸어가 깨끗한 별로 박힌
먼저 태어났으나 나보다 어린 벗들의 영혼이
하나. 둘. 셋. 넷......
낮달 같은 내 부끄럼을 헨다
 
미안해요 밥이 늦어서
깊은 산골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내가
장작난로 옆에 고개 떨군 모습이 안스러운 듯
산채비빔밥을 내려놓는 강원도 아줌마 눈길이 따스하다
오늘은 여기에 바퀴를 세우고
어느 집 헛간에라도 등을 대야겠다


■부산일보
洛東江 / 조동화          


1
어린 시절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처음으로 落東江을 보았다. 冬柏기름 냄새 향긋한 엄마의 어깨 너머 멀리 아득히 보이던 비취빛 강물 · · · 그러나 미처 그것이 江인 줄 모르고, 하늘이 제 많은 자락 중에 유독 짙푸른 한 자락을 내려, 山과 山 사이로 천천히 끌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2
江을 사이에 두고 숨가쁜 戰爭이 오가던 그 여름, 아버지는 먼길을 떠나셨지. 江을 건너서 마른 黃土, 먼지 이는 산굽이 길을 뚜벅뚜벅 아버지는 멀어져 가셨지.

3
학교가 파하고 나면 나는 홀로 강둑에 앉아 終無消息인 아버지를 그리며 종이배를 접어 띄우곤 하였다. 물결을 따라 물결 앞세우고 따라갈 수 없는 먼곳으로 남실남실 사라져 가던 하얀 종이배 · · · 아버지는 보셨는지 몰라, 그리움을 실어, 내 少年을 실어 날마다 띄워 보낸 그 많은 종이배를.

4
깊은 밤 어머니는 곧잘 江으로 가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셨던 것일까. 달빛에 젖어 빛나던 어머니의 눈물. 꼭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실 것만 같은 豫感에 몰래 어머니의 뒤를 밟아온 나는 또한 소리 없이 울었다. 무성한 갈대숲에 몸을 숨긴 채.

5
오래 응석받이 손주의 든든한 울이셨던 할아버지, 당신께서는 生前에 즐겨 자주 蘭을 치셨지. 눈부신 畵宣紙 위에 늘 알맞게 휘어져 있던 黑蘭 이파리. 이제 나는 알겠네. 흰 달빛 아래 아득한 모랫벌이 한 장 畵宣紙로 깔리는 이 밤, 비로소 고개 끄덕이며 알아보겠네. 먼 산굽이 휘어져 돌아가는 黑蘭 이파리 하나, 한평생 휘어지고 또 휘어져서 마침내 아주 강물 위에 포개진 할아버지 그 黑蘭을.

6
아침 나절, 나는 어린것의 손을 잡고 산 위에 올라 洛東江을 보았다. 첩첩한 산기슭을 돌고 돌아서 아스라이 굽이치는 純銀빛 먼 강물. 흰두루막 입은 할아버지의 뒤를 素服한 어머니도 따라가고 있었다. 오오, 얼마나 아프고 소중한 因線의 모습이랴! 나는 문득 어린것을 무등 태우고 오래오래 먼 강물을 가리켜 보였다. 

 

■강원일보  
 새 /오창규          


하늘이 열리고
새들이 무리지어 오른다.

아름다운 치마폭같은 계절은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꽃을 적시며
山과 江을 가로질러 새들이 온다.

하늘이 아픈
이 땅에서는
새들의 날개 속에 분단의 문신을
파야만 한다.

비무장지대
그 끝은 얼마나 멀까
빗소리에도 깨지 않는
휴전의 잠은 얼마나 깊을까

어머니는 아직도
거기에 있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도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픔은 늘 내 편이었고
겹겹이 스며든 피거름위로
철저히 상처받는 이 시대.

나는 바람의 모습으로 서서
휴전의 잠을 흔들어 본다.
새들이 무리지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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