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4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51

 

■세계일보
 세숫대야론/김호균
 
세숫대야를 보면
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를 하고 비누거품으로 가득찬 물을 버리면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투로 그려진
세선의 물결 무늬
 
물 속의 네 육신이 흔들리고
어푸어푸 물먹은 네 육신이 흔들리다 멈추어 섰을 때
지나온 내 꿈보따리를 뒤적이다 보면
나 또한 너처럼 사무친다
 
우리모두는 울고 싶은 거다 혹은
말하고 싶은 거다
우리가 가는 여행에 대해 아무도
증거하지 않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눈시울 적시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거다
 
징, 하고 울린 적 없지만 너처럼
속으로 감춘 말줄임표가
한없이 가슴속에 그려져 있는 거다 

 


■한국일보


열매를 꿈꾸며/조연호

 

  나는 순을 밀어올리며 껍질 밖으로 나왔다. 땅 위에 하늘의 끝자리를 조금씩 올려놓으며 안개가 내려올 때 다발 꽃을 손에 쥔 아이가 허전한 꿈가를 뛰놀고 있었다. 아무도 그곳에 와서 기웃거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이의 걸음, 한 줌의 사랑에도 묶이지 않았다. 안개는 강과 함께 흘러가고 들풀의 잠결로 깔깔한 삶이 두런거렸다. 그리움을 뒷전에 두고 나는 망울을 터뜨리며 봉오리 밖으로 나왔다. 몇 장의 꽃잎이 내 빈 손에 넓은 잎의 속죄를 쥐어주고 있었다.
 

 
   길을 향하여
 
  비가 온다. 비는 길 위의 사람들을 허물며 처마 끝으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구름은 둔덕을 건드리며 걸어가고 나를 닮은 가지 하나가 빗발을 꺾으며 물길에 떠내려간다.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구름 뒤편에 머무는 맑은 소리들이 먹으로 번진 하늘로 옮겨온다.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동아일보
거듭나기/김지연

 
보일 듯 말 듯한 가슴 아래 손가락을 넣어 본다.
청동조각상이 수줍게 고개 든 순간
뭉클한, 어디선가 심장이 만져질 듯하다
 
이상하다 조각상의 반질거리는 살갗에
눈감아 버린 나의 전신이 들여다보인다. 순례자처럼 망연히
나는 조각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좁고 남루한 갈비뼈 근처
따슨 꽃들이 무더기로 피고,
꽃들이 잔잔히 흔들리면 언뜻 비춰진 내가
가늘게 휘청거린다.
가만 바라보면, 세밀한 혈관이 발 밑을 적시고......
 
불현듯 내 몸을 밀어낸 것은
부슬부슬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이었을까
어둠이 내리고 창문을 두드리는 웅성거림이 들리지만
손잡을 수 없다, 나 는 닫 혀 있 다.
 
문득 알 수 없는 손이 다가와
내 가슴을 찬찬히 더듬고
뜨거운 피 스며들어, 마침내 사지가 고요히 풀려 흐를 때
저만치서 조각상이 꽃씨를 던진다.
스멀스멀 자라나는 잔뿌리......
오래 뿌리의 전신에 귀 기울이면 차츰
잘록해지는 허리께에서 실핏줄만한 햇살이
환하게 새어나오고 있다.

 


■중앙일보
폴리그래프 27 /김민희
      --얼음물고기
 

   눈부신 팔월 아침 눈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물고기떼가 뚫는가 공중의 저 연한 구멍들 말할 수 없는 것들 가령 물고기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된다 K는 침묵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새가 없다 네 눈 속에는 물고기가 없고 성큼성큼 다가온 팔월의 아침 추운 K가, 그리운 K는 얼굴을 눈 속에 파묻지도 못한다 느릿느릿한 창문 속으로 수많은 여름이 흘러간다 공포는 물고기처럼 조용하다 사진 찍은 현실은 아름답다 피로하기 때문이다 곧 삼십세가 닥쳐오리라 이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그런 행복한 아침 떨리는 첫눈이 와 준다면 K가 그 뒤를 달려간다 설경속으로 들어가는 K를 깨끗한 지평선을 K는 뒤에서 오래도록 바라본다 이 無는 현실적이다 공포는 더 아름답다 함박눈 내린다 가짜 물고기로 유리창이 두꺼워진다 이제 K는, 아침에 더 이상 일어날 수가 없다 더 이상 그림자처럼 마른 물고기라고 말하지 않겠다 눈 덮인 숲에서 숲으로 새들은 점점 텅 비는 것을, K는 본다, 그처럼 수많은 여름이 지난 후 물고기떼가 떠내려갔으리 창문들은 빨리 늙는다 밤새도록 네가 들려준 이야기마다 고요한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아침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적 논고>에서의 기본 명제

 


■조선일보
풍경/심보선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 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하게 불켜지는 창문들.
 
    3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서울신문
 숲속의 섬/김혁

 
바람도 풀꽃들도 다 철길을 따라 달리곤 했지
날벌레 같은 마음들 따뜻한 등불 찾듯 모여들어 함부로
내일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꽈리처럼 늘 쉽게
터져버리는 희망, 후욱 남몰래 씨앗들을 뱉아내기도
했지 빈 쌀통에서 왜 자꾸 쌀벌레가 생기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아침
비좁은 방에 둘러 앉아 배추 속 같은 얼굴들 바라보며
김치도 없는 라면을 먹곤 했지 부시시한 앞날들
손가락으로 쓰으윽 쓸어 넘기면 기적소리처럼
기다란 저녁이 오고 더러 한 대 밖에 없었던
컬러 TV 앞에서 다투기도 했던 흑백의 마음들아
지금은 어디?
 
절망의 집, 모델하우스가 들어서고 분주한 트럭들
쉽게 앙상한 집들과 풀벌레 소리마저 실어나가고
포클레인, 거대한, 세상을 뿌리째 흔들어 설익은 열매들
앞다투어 흙바람 속으로 고개를 처박았지 예수처럼
마을 여기저기 굵은 대못이 박혀들고 새들도 더 이상
날기를 멈추었지 피난 보따리 같은 희망의 뿌리들을
툭, 툭 걷어차며 꿈속에서도 떠나들 가는지 날이 새면
싸늘히 식은 빈집만 늘어가고 누군가 쌍소릴를 지르고
순식간에 사그라들던 초라한 추억이여 지금 모두들
싸그리 지워버린 아스팔트를 뚫고 부활처럼 솟아오른
저 잡초, 의 얼굴들아

 

 

■경향일보
강에서/김민형

 
  한짐 가득 모래를 퍼담고 강둑을 탈탈거리며 오르는 경운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갈대를 꺾다가 그대를 생각했습니다. 모래야 잠시 옮겨 놓을 수 있을 뿐 제자리를 찾아주지는 못하고 말라버린 갈숲의 기억 속으로 송장메뚜기도 펄쩍펄쩍 튀어 오릅니다. 갈대는 죽어서도 물을 움켜잡고 있을까요.
 
  강심으로 오래도록 돌을 던졌습니다. 물 위로 뛰어오르던 피라미의 은비늘, 이름 지을 수 없는 세상을 꿈꾸다 들켜버린 듯 급히 달아나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대를 믿지 않은 건 아닙니다.
 
  돌멩이를 던지면 물은 둥글게 파문을 그려 뭍을 흔들고 나는 돌을 던진 힘보다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물고기의 길도 나의 길도 흔들릴 때, 팔이 뻐근해질 쯤에서야 알았습니다. 던진 돌에도 잠시 출렁일 뿐 아파하지 않고 돌마저 흐르게 하는 강. 쌓이기만 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요. 마른 홍수라도 질 듯 강은 온통 푸르게 하늘에도 떠 있습니다.
 
  새들이 강을 날아올라 내려앉는 동안 나는 그대의 이름 부르지 않으며 강가를 떠납니다. 더 깊이 흐를 수 있다면 이젠 가까이 가도 되겠지요.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강과 강으로 갈꽃 무더기 떠내려 갑니다.

 

 

■매일신문
유월의 살구나무/김현식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기억나는 일이 뭐,
아무것도 없는가? 유월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단발머리의 애인을 기다리며 상상해 보던
피아노 소리 가늘고도 긴 현의 울림이
바람을 찌르는 햇살 같았지 건반처럼 가지런히
파르르 떨던 이파리 뭐 기억나는 일이 없는가?
양산을 꺼꾸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
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
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
그리움이 가득 입안에 고인다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살구처럼, 양산의 가늘고도 긴 현을 두드리던
살구처럼,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
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추억의 건반 위에 잠드는 비, 오는 , 밤
 

 

 ■강원일보
거리를 헤매이다/ 한광인          


사람 넘치는 주말거리를 걷는데
웬소리가 있어 두리번거렸더니
저마다들 다 저 갈 길을 가고
저 할 말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 나도 갈 길을 가야지
서 너 발짝을 떼었다
다시 웬 우뢰와 같은 소리가 있어
이번에는 진짜 뭔가 있으려니
길 복판에 서 사방으로 눈을 돌렸다
아득히 다가오는 손 한 장이
그냥 궁해 보이길래 엉겁결에 마주잡고 말았다
그 손바닥에 힘이 주어지는가 싶더니만
아래 위로 흔들리며 반갑다 오랜만이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못 들었으냐고 한다
당황스러워지며 불쑥 한마디 튀어나와
내가 서 있는 거리는 청력을 잃어버렸고
나를 어떻게 불렀소
나를 어떻게 불렀소가 화면 위에 새겨졌다
광활한 정적이 왔던 길과 갈 길과
옆 길과 뒷 길과 사잇길과 그 길 위의
사람들과 건물들과 또 모든 것들 전부를
간 곳 없게 하였다 블랙홀같은 정적이
아가씨들 박자 맞춰 껌씹는 자국이
차차 물방울처럼 볼룩해지는가 어디론지 떨어지는가
딸랑하는 소음에 시선을 옮겼더니
허공에 뜬 구두 사이로 은색 창연한 동전이 누웠다
얼른 집어들고 성큼성큼 도망하듯 걸어갔다
어지간히 감각이 돌아와서
숨돌리고 꽉 쥐었던 손을 펼쳤는데
한 손에는 빛나는 한국은행 동전 하나가
한 손에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이름 박힌
낯선 명함 한 장이 거기가 지네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뻔뻔스럽게 자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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