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6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0:54

 

■중앙일보
퓨즈가 나간 숲/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 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 마다 넘치는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 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조선일보
부의 /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세계일보
알고 말고, 네 얼굴 /임찬일
 
옛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께 다녔던 국민학교를 들추어내고
그때 가까이서 어울렸던 친구의 이름도 떠올리고
그제서야 자기가 아무개라며
나에게 묻는다
기억이 나느냐고
이것저것 지난 세월에 묻은 흔적을 증거삼아
비로소 서로를 확인하는 이 낯선 절차
그래, 물 같은 세월 흘렀으나 거기에
비추듯 남아 있는 우리들의 코 묻은 얼굴과
남루했던 시절
흑백사진처럼, 아니 아니 눌눌하게 빛바랜
창호지처럼 다소 낡은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무렵의 일을 이제는 옛날이라고 싸잡아
네 이름처럼 불러야 되는구나
친구야, 오랜만이다 애들이 몇이고?
그래, 나랑 똑같구나 딸 하나 아들 하나라니 !
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삼십 년이나 걸려야만 했단 말이냐
서로 연락도 하고 언제 한번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지만 우리들의 기약은 다시 아득해지고
무슨 꿈결처럼 잊혀져서 나는 또
가물가물한 너의 얼굴을 영영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
연락처를 알았으니 가끔 전화라도 하마
만나자, 만나자, 하다보면 그 말이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


 

 


 


■동아일보
오월/고창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꾸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한국일보
 안개의 도시/임동균
 
전망 좋은 방이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노랗게 물든 길을 새벽 안개가 지우고 간다
더러는 바람과 어우러져, 빌딩과 숲 사이
좁다란 골목까지 슬그머니 점령한다
가로등 불빛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워버린다
밤새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의 길을 따라
후미진 골목에 아픔으로 쌓이고
몰래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몸을 섞는다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국물들
외롭게 뛰쳐나와 와와 소리치는 술병들
안개는 그 위에도 군림한다. 이 도시의
가장 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싸고 돈다
 
안개 속에 좀처럼 잠 깨지 못하는 도시
도청지붕에서 아침햇살은
젖은 안개를 하나썩 꺼내 말린다
요선동의 허름한 집에서는 해장국이 펄펄 끓고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간밤의 숙취를 푸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보다 한결 든든해져가고
가을의 피가 마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잎새들이 하루가 다르게 길바닥에 쌓이고
환경미화원들의 새벽이 더욱 바빠진다
청소차에 실려나가는 푸른 꿈의 잔해들
첫눈이 오면서 다시 도시는 얼어붙을 것이다
겨울 안개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도시, 안개는
이 도시의 전유물이다 한낮이 되도록 가시지 않는다
쿨룩쿨룩 누구나 겨울에 한번쯤 기관지를 않는다
댐이 생기면서 깊어진 질환이다
나는 곤혹스럽다. 겨울에 더욱 살아서 꿈틀대는 것이
물이 얼면 가장 늦게 풀리는 도시
그래서 여기 사는사람들은 누구나 얼음을 즐긴다
스케이트를 못 타는 사람은 여기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안개는 자욱하고 한낮이 될 때까지
모든 사물을 몸에 가둔다
그래서 몸에서는 짙은 우유냄새가 난다
겨울 내내 도시는 안개 속에 취해 있고
자동차도 전조등을 켜고 다녀야 한다
더러는 빵빵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낮이 되고 안개가 걷히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비로소 나도 바빠진다. 햇살이 벽을 타고
방바닥에 깊이 박힌 후에야 거리로 나선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에서 사람들은
씽씽 바람을 가르며 얼음을 지치고 있다
신나게 하늘에다 연을 날리고 있다
민망하다 너무 초라하고 연약하여 나는 부끄럽다
재빨리 빙판을 벗어난다
에메랄드에서 뜨거운 한잔의 커피로 몸을 푼다
 
땅거미가 깃들면 전망 좋은 방으로 돌아온다
이제 스멀거리며 안개는 기어들 것이다
어둠과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안개와 속삭이며
잠들 것이다. 잠들기 전 닭갈비와 막국수
몇 잔의 소주와도 친화할 것이다
쿨룩쿨룩 오랜 천식을 잃으며 나는 기다린다
창문도 최대한 크게 열어 놓는다
그러나 아직 안개는 침입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면서 자동차의 소음도 낮아지고
도시는 조금씩 기울어지며 호수 속으로 빠져든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오늘은 새벽쯤에야 슬그머니 방문할 모양이다 


 

 


 


■서울
운천리 길 /염창권
 
  
  1 
고향이 그리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산다
삶은 늘 깃이 짧아 겹겹으로 껴입은 속옷들
고스란히 드러내보이지만
가슴 속을 흐르는 고향 생각만은
꼭꼭 여미며 산다.
 
함석지붕에 나무들이
자꾸 손가락을 다치는 입동 무렵
군장을 꾸린 아침 행렬을 보며 노인들은
담벽에 붙어 모락모락 하얀 안개꽃을
피워 올리거나 떠나온 마을 이야기로
잠시 마음이 산란해지기도 한다
민통선을 건너온 바람의 기별에
길 이쪽과 저쪽에 늘어선 하얀 억새꽃이
무시로 흔들리며 휘어지는데
대체 마음 어느 깊은 곳을 강물이 흐르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조그만 안개를
피워올리는 것일까
강물 끝을 따라가 보는 것일까
싸늘한 아침 빛이 나무들의 어깨를 돌아
행렬의 입입마다 하얗게 부서질 때
길은 강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으니
운천리를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
문해리 자일리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며
길을 트고 있으니
 
보육원을 빠져나온 아이가 망연히
사병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 소매깃을
빠져나온 내복이 시린 손등을 덮어줄 때
쇠붙이처럼 희고 단단한 운천의 하늘에
조그만 입김의 안개를 보탠다.
 
  
  2
삼팔교 난간 밑으로
어둑히 풀리는 한탄강을 건너
여전히 사병 혼자 집총 차렷 자세인
검문소를 지나면
그곳에 운천리로 가는 길이 있다.
한떼의 눈발이 퍼붓다가 문득 고요해지면
그만큼 길은 더 쓸쓸히 깊어가고
들판은 희고 검게 덮인 잔설로 딱딱하게 굳어
오래도록 녹지 않는다
대공포 사격 소리에 놀라 흩뿌리듯 날아가는 텃새들
나무는 자꾸 손을 다치고
캐터필러 발자국이 움켜쥐고 있는 불임의 세월들
나무는 자꾸 발이 아프고
길을 따라 걷는 노인들 걷다가 잠깐 서 있다가
지치면 길 밖으로 나와 그들의 길을 벗어들고
살아온 나날만큼 막막히 나무에 기대어
쓰디쓴 한 모금의 안개를 피워 물 때
누군들 가슴 속 뜨거운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으랴
누군들 함께 섞여 어디론가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지 않으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살고 운천리 가슴속에
깊고 그윽한 강물 하나 가꾸며 산다
서로의 뿌리를 잇대고 산다


 

 


 

 


 

■경향신문
중세의 가을 4 /노만수
 
 
신장이식수술을 끝낸 친구는 간호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죽으러 가는 잎새들로 바람은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며칠전에 만난 까치에게 눈인사를 했다
개미처럼 달
려가고 싶다 어머니의 젖을 물러,
수양버들 이파리가 흙먼지처럼
흩날리는 것은 그리움이 미쳤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결국 믿음이 없어 떠나왔던 것이다.
수레바퀴국화를 선물했던 누이의 탓이 아니다.
나의 생태계, 손금은 알리라
다시는 나의 손으로 포장할 수 없는 사람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던 날의
나를.
사실은 우리 모두 귀족이고 싶었다.
토익TOIEC 점수로만 나를 계산할 수 있었던,
대학시절, 인간임을 기억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겨울철이 와도 거리엔 영정을 든
여인들이 추엽처럼 아스팔트를 떠돌았다.
사진을 보면 천년을 썩지 않을 눈망울들,
누이가 사 준 볼펜을 잃어버려 더더욱 어쩔 줄 모르겠던 한 해가
초상집 잉걸불 연기처럼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기에 살고 싶었다
형광등이 떨어질까봐 두려워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취방 벽에
이름 석자를 적었다.


 


■부산일보
 찌그러진 모습으로도/조영석          
 (부제 : 깡통을 위하여)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나는 살아있다. 거리를 힘차게 굴러다니며 토해놓은 만큼의 세상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 줄어드는 뼈 속으로 오염된 언어들이 넘나들지만, 결코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아이의 싱싱한 울음보다 선명하다.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춥고 윙윙거리는 냉장고 속에 잘 진열된다. 맛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때론 상한 냄새에 진저리치며 심한 두통을 앓기도 한다. 어느 한 순간, 문이 열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나를 감싸쥔다. 나는 선택된 기쁨으로 고통을 기다린다. 그는 내 모자를 딱, 하고 한번 천천히 벗긴 후 내 살을 자기의 살 속으로 들어붓는다. 눈물 같은 거품을 게워내며 내 살은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어떤 힘에 의하여 신나게 공중을 날아간다. 나는 다시 찌그러지는 연습을 시도한다.  


 

 


 

■문화일보
해묵음에 대하여/박경원          


 


원래의 길이 지워진 녹슨 나사를 풀다가
나는 보았다. 녹이 벗겨지고 잇몸만 남은 수나사에 비해
아직은 생생히 남아 있는 암나사의 해묵은 틈,
이가 주저앉은 자리마다 세월의 꽃이 피어 원래의
청춘을 버리고 그리움의 뒤안길로 견뎌온 우리들의
녹슨 골목길도 함께 보인다.
빠진 못자리처럼 녹슬고 지친 눈빛을 닦으며 돌아오는 길
나무 아래 작은 벌레들의 울음에도 헐거운 발길을
곧추세우는, 평생 샛길 한번 내지 못한
골목과 골목 사이 우리들의 작은 풍경.
문패가 바뀌고 늦은 귀가의 흐느적한 노랫소리 지워졌어도
그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텅 빈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습관의 해묵은 자리는 깊은 밤 떠난 사람 아닌
우리들의 몫이다.
밤새 서성이던 골목도 잠들어 이제는 눈 좀 붙여야지, 하며
혼자만의 일상에 머리를 낮추는 짧고 나른한 잠의
담장 너머…한 폭 수채화처럼 걸리는 아침 햇살.
긴 잠에서 풀려나는 심장의 박동과 눈곱에 매달린
하루의 무게를 다스리기 위해 몇몇은 수돗가로 혹은
십분만 더, 하며 쥐죽은 듯 물러나는 해목은 틈, 닦고 털어내도
녹슬고 있었다.  


 

 


 


■강원일보
세월/ 윤종영          


 


장마로 불어난 강은 둑을 넘고 텃밭을 지나 마을까지 걸어와 사람들의 눈물로 더욱 큰 물을 만들고 계곡의 발치를 간지럽히던 나뭇잎과 풀들을 바다까지 옮겨놓곤 하늘에 닿는다


 

강은 뿌리가 약하거나 배후가 없는 것들을 쉽게 가슴 넓혀 안고 흐른다 그리고 수십년, 수백년 뿌리내린 고집도 결국 강에게 꺾이고 만다는 사실, 장마로 엄청나게 불어난 강을 보고 알았다


 

장마철에는 강이 빨리 흐른다


 

하늘과 땅속으로 흐르고 산천의 안부를 두루 물으며 흐르는 강은 강에 분해된 나뭇잎과 풀들의 이름은 바다에서는 간이 섞인 짭짤한 이름으로 다시 불려지곤 한다


 

강에 몸을 풀어 바다로 갈거나
바다에 모인 나뭇잎, 풀들과 춤이나 출거나
강은 바다에서 어떻게 깨어날까?


 

장마철에는 모든 것이 강을 따른다.  


 

 


 


■대전일보
군불 지피기/박미라          


 


젖은 나뭇단으로 군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넉넉해야 한다.
시간이 넉넉하고, 불쏘시개가 넉넉하고, 무엇보다도 성냥알이 넉넉해야 한다.
(성냥알은 불을 사르다가도 저 혼자 꺼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불길 들인 지 오래된 아궁이에는 묵은 재가 차 있기 십상이다.
(잘 아시겠지만 묵은 재를 저 혼자 쳐낼 수 있는 아궁이는 세상에 없다)
번거롭지만 말끕히 쳐내야 한다.
물론 재티가 날리고, 더러 얼굴에 묻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들, 나무고, 풀이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었다.
때절은 소맷부리로 아무렇게나 문지를 일이 아니다.
젖은 나뭇단이라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얼마쯤 덜어내어 아궁이 속에 가만히 펴넣고, 마른 불쏘시개에 불을 붙인다.
(불쏘시개는 갈대의 흔들레도 바스라지는 가랑잎이거나, 산새의 기침 소리에도 툭툭 부러지는 삭정이어도 상관없다)
불쏘시개를 단번에 화르르 태워 버리면 안 된다. 그래서는 미친 불길이 아궁이까지 태워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랑잎 혹은 삭정이를 타고 조금씩 불쏘시개를 얹어가며 불길을 키워야 한다. 젖은 나뭇단은 눈물을 쏟아가며 기침을 참아가며, 제몸을 말리느라 뒤척일 것이다. 그때는, 슬쩍 도와주어야 한다.
몇번에 나누어 따뜻한 입김을 불어준다. 따뜻한 입김에 기대어 젖은 나뭇단은 비틀비틀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는 제게 다가오려고 애쓰는 작은 불길 위로 왈칵 쓰러질 것이다. 함께 타오를 것이다. 불길은 오랫동안 잠들었던 구들장을 깨워 어둠 저쪽의 방바닥까지 덥혀 놓으면서, 서서히 굴뚝을 차고 올라 구름에게로 갈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아주 은밀히 이루어져야 한다. 


 

 


 


■ 영남일보
비상을 꿈꾸며/박상규          


 


지향하는 곳 어디인가 돌아보면 가시밭길 탱자나무 청아한 꽃잎 제 가시 다가가 살점을 찍 고 한 점 눈물없이 지고 있다 봄날 새떼들 웅성거려 나 너의 주검 앞에 부끄러움 고하지 못 하고 눈물 내 가슴에 울컥거린다 지향하는 곳 어디인가 흩날리는 바람 그 세월 속에 겁없는 부속품처럼 밤마다 설움에 떨었다. 부러 너를 생각하는 날엔 구멍뚫린 하늘에서 비가 오더 라 사정없이 몰아쳐서 내 한 몸 온통 젖게 만들더라 그런 날 늙은 개처럼 밤을 쏘다니며 수 척한 아침 안개를 만나고, 행여 쓰러진 네 안부 들으면 뒷날까지 몸살나더라 영영 아파서 일어설 수 없더라 너 있는 길 지척, 서역만리 내 마음 하루에도 천만 번 흔들리고 흔들리다 지친 생채기 검은 반점 암세포처럼 사방에 퍼져 나 낯선 벼랑 굽이치는 언덕 발을 멈춘다 명경지수 그 강물 세월 끝까지 닿아 몸을 유혹하고 여린 어깨 자꾸만 떠미는데 홀연, 급격 히 솟구치는 강물 거친 호통소리 환영인 듯 내 면상을 갈긴다 꺼이꺼이 울다 눈물 훔치면 어느새 고요해지는 강물 그 속에 하늘이 있고 바람이 있고 네가 있고 내가 있다 웅크린 새 되어 비상을 꿈꾼다 


 

 


 

 


 

■전남일보  
씨옥수수전/이현승          


 


가슴에도 너테가 끼는 한겨울 농가 창고에는 시렁마다 고드름 같은 씨옥수수 주렁주렁 매달 려 있단다. 단정하게 갈래머리 땋은 채 한여름 열기 다 식고 눈물기 다 말라 지조 높은 청 죽에나 앉는 시설도 슬그머니 얹힌단다. 시렁 위를 지나가는 새앙쥐들 허기도 놀리면서 사 흘 굶은 흥부 이빨마냥 고즈넉하단다. 소슬바람 엄동한설 다 보내는 동안 밤궁금증에 티밥 마실 가면 여문 이력에 할머니 틀니에만 자꾸 끼지만, 가지마다 엉긴 바람 같은 걱정에 보 름 기울고 명년 여름에 새끼 볼 딸년에게도 섭섭잖게 보내야지 느지막이 오느라 시집살이 시킨 막둥이 외아들 헛물켜는 객지살림에는 알 굵고 다디단 옥수수로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딸부잣집 큰며느리 어머님 시한도 바쁘게 지난다나. 이듬해 명지바람 끄트머리 초여름 신록 에 슬그머니 밭섶에다 두 알 세 알 뿌릴 좋은 씨앗이란다. 땅 한 움큼 억세게 후여잡고 기 지개 켜듯 쑥쑥 금방 자라나 어느 틈에 샌님처럼 수염도 난단다. 세월이 선생이지 첫애기 낳고 퉁퉁 불은 에미젖모양 바람 많은 살림에도 살오르는 기차게 실거운 종자란다. 고시랑 고시랑 할머님 옛이야기 엿듣는 씨옥수수들이 뉘얏뉘얏 저희들끼리 여물어간단다.  


 

 


 


■전북일보
 비에 대한 우상/고선주          


 


1
비가 내린다. 만경들판 홀로 선
허수아비의 초라함으로
주인 모를 황토에 칼날처럼
꽂힌다.
제각기 말 못할 아픔의 깊이를
지금 내리는 비는 알까.
얼마나 많은 날들
피고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세상
한 꺼풀이라도 벗겨내며
한 해 두 해 내리는 비처럼
쌓아두지 못하고
흘러보내야만 하는 세월을
알 것 같기도 한데.


 

 


 

2
나는 한 번이라도 기다려지는 비이고 싶었다.
설령 폭우로 버려지는 들판일지라도
농부의 근심에 불 붙이며
커다란 물줄기로 징검다리처럼 남는
발자국 데리고 끝없이 달려가서
땀구멍 같은 너의 흔적을 부순다.
무언가 남기는 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감추고 사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의 모습을
오늘 비는 내리는 것이다.


 

 


 

3
그렇다. 비는 제 몸이 흠뻑 젖어도
나뭇잎에 앉지 않고
나무 아래서 뜻맞는 저들끼리 모여서
살아온 날들은 잊고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해
모여서 걱정하는 것을 안다.
걱정도 모이면 깊어지는 것일까.
우리도 모여서 걱정을 하기 위해
사랑했던 사람을 기다려 보지만.


 

 


 

4
비처럼 몰려다니며 만경들판 한가운데서
논두렁을 타고 끝없는 길을 간 적이 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장대비의 비위를 건드리며
내가 가는 곳은 이 세상에 없다.
살면서 사람이 어떻게 돼가는지를
보기 위하여
비오는 날 만경들판에 섰다.


 

 


 

5
아무것도 모르겠다.
몇 날 며칠의 근심을 한꺼번에
강물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그 근심을 부리를 한번도
송두리째 뽑아본 적 없지만
강단한 마음먹고 빈 들판에 선
나는 너희처럼 구름의 몸에서
먼지 같은 비를 털어내지 못했다.
이제 새롭게 삶을 시작하려는
전과자의 간절한 마음으로
몸을 세상에 맞추며 살아야 한다.  


 

 


 


■ 평화신문
성당부근/정 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만 성경 구절을
성에 낀 창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봇대가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도 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오 성가의 앉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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