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8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1:13

 

매일신문


공터에서 찾다 / 문채인

 

공터에서 페트병을 물어뜯는 개를 본다

나의 턱배가 얼얼해짐을 느끼는 저녁

 


뭐 이렇게 질긴 고기가 다 있을까
좀체 속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뭉스런 애인 같다
어딘가에 분명 뼈를 감추고 있을 거야
고기의 진미 희망의 정수 아아,
뼈다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란 대로에서
진종일 어미, 누이와 붙어있는 일보다
은밀하고도 즐겁게 느껴진다

 


페트병 한 개와 물고 뜯는 시간, 나는
이것을 단순해지기 위한 노력이라 부른다
썩은 고깃덩이로 던져진
이 도시에서 단단한 무기질의 희망
얻기가 그리 쉬운가
누르기만 하면 입발린 언약들
당장이라도 쏟아내는 자판기들아

 

웃을 테면 웃어라
욕창이 번진 몸에 비명까지 지르는 이 물체는
이제 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은 더욱 식욕을 부풀리고 나는
이것을 기꺼이 먹기로 작정한다
완강하던 페트병에 드디어 금이 가고
텅빈 속살 들여다 본 순간, 나는
속았음을 직감한다.  

 

어둠 속을 휘적휘적 걸어갈 때

앗! 저기 또 푸른 슬리퍼 한 짝이......

내 야성의 턱뼈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중앙일보

3월/ 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중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세계일보 

북극성/나비  신해욱          

 

북극성
- 팔백 광년, 그것은 거리를 넘어선
그리움의 공간이다

 

팔백 년이라나
우리 서로 마주하기 위해
빛이 날아온 먼 길은

 

우리 그렇게 눈물겹게
만나긴 만난 것인데
그대 그 맑은 빛은
팔백 년 전 어느 날의 앳된 눈동자
그대가 마주한 얼굴은
서경별곡 부르던 눈물의 여인
대동가 푸른 물이 된
두어렁셩, 나의 전생이리

 

팔백 년의 어느 길목쯤
스치우는 옷소매에
눈웃음만 가볍게 묻히고
그대는 나를 향해
나는 그대를 향해
바쁜 걸음 걸음 재촉했을 우리
그 길목의 나무둥치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지친 몸 달래어나 볼 것을,
오늘밤에사 마주하긴 마주한 우리는
먼 옛날 까마득히 사라진
어슴푸레한 잔경인 걸

 

아무리 발돋움해보아도
팔백 번의 겨울을 보내고야
나의 언덕에 다가올 그대
오늘밤의 얼굴, 안타까움만
목구멍 가득히 넘쳐올라
달맞이꽃잎 위에 떨어지고
이 먼 길의 저쪽 끝자락엔
들을 수 없는 북극성, 그대의
아득한 숨소리.

 

 

나비

 

바람 한 가득 입안에 머금고
숨을 멈춘 햇살
아래, 보드랍게 날고 있는
붉은점모시나비
온통 날개로만 살아가는
그 사뿌난 몸짓을 시샘하다가, 아니
어쩌면 생이 저렇게 가벼워서야 되리
혀를 차려다가
문득 저 날개도
땅으로 팽팽하게 끌리는 물체임을
깨닫는다

 

이 가벼움은
죽음 앞에 선 전쟁용사의 굳은 입술
찢길 듯 말 듯 위태로운 날개
무쇠갑옷인 양 차리고
투명한 공기 속에 몸을 숨긴
교활한 지구의 중력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맴돌던 꽃이 떨어져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벼웁!게 날아다니는 나비
의 날개 속엔
돌로 굳은 눈물방울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자모의 검/ 여정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나면 자객들은 섬한 미소로 조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 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심장이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 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 떼의 날개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 떼를 불러 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한국일보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부산일보

폐가 /  조말선          


 안채의 주인은 어둠이다입구마다 봉인되었던 빛은 밀려나고 한때 문지방 너머로 쓸려나가던 어둠의 자물쇠가 비명을 지른 이후 집의 내력을 말하는 문짝이 떨어져 나간 방문의 검은 입 어둠의 검은 혀가 끊임없이 널름거린다

 

 희망을 끓여내던 밥상에 두꺼운 먼지가 차려지고 둘러앉은 어둠은 말한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폐허 쪽이다 꿈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절망이 빠르게 교체되고 희망을 떠받치던 대들보는 오랜 골다공증에 허리가 휜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관절 구석구석 추억이 삐걱이는 저녁

 

 폐허는 익는다 감나무 붉은 열매가 절망을 익힌다 추녀 아래 필라멘트 끊긴 백열등으로 더 이상 이승의 꿈은 송전되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부터 밀려난 어둠은 도처에 흘러넘친다 죽은 이들의 인광처럼 달개비 푸른 꽃 발광하는 몰락의 시간 으깨어지는 한 쪽 어깨로 달빛도 무겁다  


 

조선일보 

장닭공화국/ 이종수  

       

새벽녘 목청을 다듬으며
칠성무당벌레마냥 높은 곳에 오른다
누구나 아침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까
잠깐 벼슬을 주뼛거리다가
길게 한 소리 뽑는다
높은 곳에 올라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처럼 멍청해 보인다
폐계 천 원 폐계 천 원 한다는 양계장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
튀김닭으로 팔려 가고 닭도리탕감으로 팔려 가는
저 수백 단으로 쌓인 유통의 나라를 굽어보며
그레코로만 선수처럼 발바닥을 닦어본다

 

아침이 온다고 다 같은 아침이 아닌데
아침만 질러놓고 보면 이 나라 모두
아침 빗자루질 같을 거라는 막연한 몽상을 하며
지난 밤 닭장 횃대에서 자다
쥐들에게 뜯겨 살이 다 드러난 암탉들을
거느리고 한껏 목을 꼿꼿이 세운다
양계장에서 팔려 온 암탉들 끌고 운동도 시켜야지
그래야 살이 맛있어지지
자, 이제 휴게소로 나가볼까
존경하는 주인 아저씨,
벌서 일어나 나를 보러 오는 걸 잘 봐
내가 얼마나 신임받는 줄
조금 있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몸 생각한다고 촌닭, 토종닭 아니면 먹질 않는
사람들의 머릿속이나마 꽉 채워주려면
꼭 내 연기가 필요하지 단칼에 쓰러져 죽는 시늉하는
일품 연기를, 연기가 끝나면 양계장 닭으로 바꿔치기 하는 아저씨도
일품이지
어차피 못 쓰는 날갯죽지 조금 아픈들 대수로냐
휴게소 가든 벼슬살이 이만하면 좀 좋아
휴게소 가든 닭도리탕 정치하는 맛에 세월가는 줄 모르는 재미 말이야  

 

 

 

문화일보 

 대숲이 있는 작은마을/ 김명국    

      

시리도록 투명한 햇살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깨진 사금파리들이
은빛의 언어가 되고
아침 해가 떠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강물은 잔잔하다
아침 마당에 빨래줄처럼
늘어진 햇살을 칭칭 감아 올리던
나팔꽃눈들이 보랏빛 물방울을 터뜨려 놓았다
풀끝에 이슬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려
밤새 오므렸던 채송화꽃송이를 부끄럽게 벌리면서
고요한 하루가 시작된다
봉숭아꽃들이 줄을 지어 늘어진 마당 한 귀퉁이
민들레가 피었던 산밑 방죽에서부터
들판 안개가 살며시 밀려나간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한다
울창한 수목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숲 오솔길
잎이 푸른 한그루 상수리나무가 되고픈 시절이 있었다
가지를 떠난 새들이 어디론가 휙 날아갔다 날아오기도 하면서
풍성한 아침 햇살을 풀어 놓은 채
개울물이 낮은 돌그림자를 건드려
작은 여울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물흐름 소리가 좋아,
조용히 지느러미를 너울거리며
고기떼가 납작한 돌틈 나뭇잎새 사이로
날래게 몸을 감춰 숨어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요한 강 언덕까지 나가본다
나무등짐 하나 가득히 지고
노루목께를 내려오는 산나무꾼처럼
털 끝에 이슬이 묻은, 검은 까마귀떼 깃털이 떨어져 있는 외길목
당산나무 그림자에 탑처럼 선다
줍지 않은 논바닥 진흙땅에 박힌 이삭과도 같이
하늘 우물에 빠뜨린 눈썹 몇 개쯤 아득히 잊고
갈수록 빛이 나는 저 억새 풀밭에 억새꽃이라든가
갈대가 바람에 몸을 꺾는 들판
후두두 잎턴 싸리나무가 기러기 울음에 젖을 때
마음의 장작에 불씨 몇줌 꺼내 노을을 지피고
감나무, 그 붉디 붉은 전설이 까치밥으로 영근 대숲 마을에서
나는 동면하는 산짐승마냥 긴 겨울을 나고
이른 봄의 햇살로 다시 태어나리라. 

 

 

서울신문

  望海寺/이병욱 

         

대나무 잎새 몸 부비는 소리 등에 업고
바다를 바라보는 망해사,
파도가 읊어대는 경전 소리에
처마 끝 종소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절간을 지나는 동자스님의
발걸음이 바람에 떠밀리는 마른 잎 같다
파도 소리, 묵묵한 바위의 등을 내리칠 때마다
허공을 떠다니는 낮은 소리들
단청 없는 대웅전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걸음도 대웅전 앞으로 밀려간다
낮은 숨소리 웅웅대는 절터를 비추며
조용히 내려앉는 서녘 해,
노을빛 단청을 그린다
내 얼굴에도 단청이 그려졌을까
바다로 발을 옮겨 얼굴을 비추면
이내 얼굴을 삼키는 허연 물거품
귓가에 파도의 일렁거림만 맴돌고
바다의 들숨에 석양마저 빨려들어간다
법구경 읊는 소리도 바다 밑으로 묻혀진 걸까
쉴새없이 어둠을 내뿜는 잔주름 깊은 바다,
잔불 소리도 없이 내 속을 비워내고
바닷바람 소리 없이 범종을 흔드는 망해사,
아무 말없이 바다 위로 단청을 털어내고 있다  

 

경향신문

 나무에는 꽃이 피고/ 송주성          


언젠가 아주 잠깐 살았던 봉천 몇 동이더라 집 보러 아니 방 보러 가던 길에서 나는 얼마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택시 기사는 여기라 하고 가겟집 주인은 돌아서 두 정거장 더 내려가 라 하고 하교길 아이한테 물어보면 자기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모른다고 하던
   봉천동 같은
   봉천동 같은

 

여기저기 시장만 해도 닷새장 구포장보담 몇 배나 크던 그 어디어디에 주인집 여자는 암호 같은 단어들로 정약국 돌아 쌀집 옆으로 어떻게 어떻게 오라고 하고
고부줄 뛰던 계집애들은 이쪽인가 저쪽인가 하고 이리갔다 저리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골목 지나 공터에 섰을 때 그 막막한 한가운데
   봉천동 같은
   봉천동 같은


 나는 생각했다 그때 마치 숨겨져오던 진실을 발견하듯 어쩌면 봉천동 사람들은 제 사는 곳 이 어디인지 정말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소스라치게 생각했었던 봉천동 같은
 여기

 

 고장난 우주 정거장 미르호의 창 밖 같은
 문과대학 2층 복도의 창 밖을 내다보면
 누구에게 길을 물어서 집을 찾아왔는지
 나무에는 꽃이 대문을 열고 쑥 들어온다  



강원일보 수리재/ 김순실   

       

어린 고기 달빛과 어울려 노는 물가의 집 수리재에는 물고기가 많이 사는데 봉숭아 분꽃을 거느린 잎 넓은 토란 위만 빼고 벽이란 벽에는 물고기가 노닐고, 마당가 물 마른 연못 위 정자의 나무 난간 깎아버린 물고기 몸통으로 바람 들랑거릴 때마다 돌맹이로 쌓아올린 탑 네 귀퉁이에 매달린 물고기 덩달아 풍경 소리를 낸다.
하얗게 칠한 해우소 벽에도 물고기 떼지어 몰려다니다 쭈그려앉아 우울 날리는 사람 기웃댄 다.

수리재를 둘러싼 숲의 낙엽송 그 큰 키를 올려다보노라면 티베트로 그림 공부하러 갔다는 이 집 주인 다정거사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다가 아 물고기로구나, 그처럼 자유 로운.

그날 나는 눈을 뜨고 잔다는 물고기와 어울려 하루를 놀았다.  

 

 

국제신문  돌담/ 김정숙

          

너는 언제나 등을 돌리고
쓸쓸하게 서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는 한낮
잠시 그늘에 가리워 쉴 때에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만치서 누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듯하여
몸체가 기울어지고
행여 바람결에도 멈칫 돌아보곤 했다.
언제부터였던가 하염없이
토라앉은 등처럼 외로워 보였다.
나뭇잎 하나 둘 너의 모퉁이를
스쳐 지나갈 때면
말없이 지켜보던 시선
수없이 너의 곁을 거쳐가는
수척한 나그네의 한숨을 지켜보면서
너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하늘을 보았다.
총총히 옷자락 날리며 기웃거리다가
오늘 하루 꽃 상여에 실려가는
외로운 인간의 뒷모습이 보였다. 

 

 

전북일보

가족사진/ 김민희          

 

1.
주연이 없었다 우리집에는
하릴없이 바쁜 아버지 운명 가끔 빨래처럼 펄럭였다
빈 수숫대 몸 비비며 자진모리로 쓰러지는 바람에
삼류극장 영화처럼 썰렁한 안방에 모여 쿨러쿨럭
희망의 아랫목에 발목을 묻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추억의 푸른곰팡이로 주린 배를 채우고
새벽 휘파람 소리에 골목길 빠져나가던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 오래도록 기다렸다

 

2.
만화경 같은 세상 문득 멀미를 하고
어지러워, 회전목마는 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없는 것이 많아서 더욱 부끄러운 스무 살
남루를 걸치고 외출한 내 청춘은 귀가하지 않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을 한 계절의 끝에서
식구들은 저마다 단역배우가 되어 서성거렸고
음정 박자 놓친 늙은 개구리 울음 같은
추억이 우울한 목청으로 우우우 노래 불렀다
아아, 잊고 사는 아름다움이 물결보다 고울까
오래 배고팠던 하루의 피곤함이
덜컹거리는 세월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아슬아슬 지나갔다
바람이 결석한 날은 추위가 때로 악수를 청하고
동상 걸린 손으로 어린 동생이 코스모스 같은 이웃들이
가슴에 지느러미를 달고 항해를 계속하였다

 

3.
제 몸짓에 어지러운 한 시절
소화불량에 걸린 꿈을 하역하며
빗물에도 얼룩져 흐르던 슬픈 나이를 다독였다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별을 우러르고
추락하지 않기 위해 끼룩끼룩 끝없이 날갯짓하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물새떼 그림자
썰물 사이로 찢길 대로 찢긴 폐선이 보이고
희망의 소금밭을 찾아 집을 떠나 온
돛도 닻도 없는 작은 배들이 불안하였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포구에 정박하고 싶습니다  

 

 

대전일보    저녁/ 안국현   

       

저녁은 눈부시지 않아서 아름답다

목련은 저녁빛을 얼마나 모아왔을까
가지 끝마다 꽃을 피웠다
눈부시지 않는 빛의 깊이를 본다
그 깊이가 바로 아름다움이어서
저녁빛 같은 꽃잎을 피우는,
즐거운 일이 내게도 일어났으면 싶다
그러나 저녁은 무섭다 저녁은
스스로 어두워져 가벼운 빛들을 드러낸다
사실, 꽃을 피우는 일이 서 있는 일보다 어렵고
사실, 꽃빛의 깊이를 갖는 일이,
향기 내는 일이 꽃을 피우는 일보다 아름다운 것인데
나는 뿌리내리는 법도 익히지 못했다
눈부신 것만을,
너무나 눈부셔 가벼운 것만을 쫓아다녔다
울고 싶다 무섭고 아름다워서
저 거리의 눈부시지 않는 것들을 한참 보면  

 

 

영남일보 세탁/ 박미향     

     

세탁기 안에서는 세탁기보다 넓은 세상이 돌아간다
자전거를 타던 흙먼지와,
저녁밥을 짓던 양념 자국과,
넥타이 속에 갇힌 양심의 속때들이
세탁기의 세상 속에서 저마다 어지럽다
속속들이 박힌 시간의 찌꺼기가 덜어져나가고
참을 수 없었던 오욕의 시간이 떨어지고,
잡다한 일상의 흔적이 떨어진다
떨어졌다 다시 엉겨붙는 악연의 오물들이
헹굼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떨어져나가고
주체할 수 없었던 몇 방울의 눈물까지도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파고든 미세한 세균들이
깨끗한 어디에서 엄청난 음모의 집을 짓고
세상과 당신 사이에 정전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럴 땐 강력살균제로 소독하라
그래도 세상 역겨운 냄새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때엔
마무리 단계에서 당신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줄
비앙카향 유연제를 몇 방울 떨어뜨려보라
햇빛 가까운 옥상 어디에서 부드러운 빛으로 건조되는 동안
보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축축한 과거들도 건조될 것이다
떨어질 것, 지워질 것, 묻힐 것
그렇게 모두 세탁되고 건조되어
가장 투명한 빛깔로 당신의 그대들 앞에 서보라

이렇게 깔끔한 아침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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