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9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1:16

 

경향신문 

 풀과 함께/이승희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얼니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 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씨앗

 


꽃이 피거나 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
본성이 아닌 거야
검은 흙 속을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온 시간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려지는 일이야

 

감자꽃이 피는 것은
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
당 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
생겨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봐, 저 들판, 저 강가, 네가 발 딛고 선 이 언 땅 속 어디에는 바람 이 숨겨 둔 풀씨들이 발꼬락을 움직여 무엇으로 일어서려 하는지. 한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날개의 길이로, 그 불균형으로 바람을 타고 올랐을 것이고, 혹은 가능한 멀리로 자신을 뱉아 내는 그 모든 세상에서 밀려나 아주 쓸쓸한 저녁을 맞았을지도 모르지. 잘 보면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분명히 보일 거야, 바로 네가 발 딛고 선 그 자리일지도 몰라. 네가 가둔 것들, 네가 끝끝내 손에 쥔 그것들을 한번쯤 놓아봐.  

 

 

 

문화일보

  단풍속으로/박명숙  

        

드디어 산빛은 가속을 내고
폭풍처럼 불길이 들이닥칠 때
티끌도 흠집도 죄다 태우며
미친 하늘이 덤벼들 때
맞습니다,
길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 우리 몸뚱이 통째로 말아버리면
어디선가 어둠도 저린 발가락 피가 나도록
긁고 있겠지요.

접었던 시간의 소매를 내리며
먼 기억들이 박쥐처럼 날개를 펴고
휘몰아치는 단풍 속으로, 속으로
마구 날아드는 것이겠지요.
끝도 없이 서로 얼굴을 부딪치며
세상의 구비마다 떨어져 쌓일 때

서둘러 낭떠러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세계일보 

 만월/정지완   

       

 그날 밤 송암동 버스 종점 마을은 가로등 불빛 대신 달빛이 수상했네 달빛은 마을을 감싸던 안개를 가르며 조심조심 지붕 위를 걸어다녔네 달빛이 삭은 슬레이트를 밟느라 하수도 물위 에는 몇 줌 떨어뜨린 금종이 부스러기들로 번들거렸네 감나무집 담장 밑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담장 밑 하수물에는 꽃이 자란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호바꽃은 감나무집 지붕 위에 내려온 별 몇 개와 쑥덕거리고 있었는데
 보름달이다 보름달이다, 버스기사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밖을 내다보던 가게 주인도 보름달이다, 주뼛하여 불을 끄고, 누렁이는 버스 밑에 숨어서 킁킁거릴 뿐 도둑고양이들도 폐차 속으로 달려가 시퍼렇게 뜬 눈을 감아버렸네
 감나무집 지붕 밑, 깻잎들 소소소 잠을 깨고 바람에 밀리는 꼬소한 냄새 호박꽃잎을 흔들었 네 배짱 좋은 호박꽃 몇이 별과 헤어져 지붕을 내려갓네 호박꽃은 발개한 입술 사이로 단물 을 흘리며 흠벅 창문을 더듬었네 핼쑥한 형광등 불빛! 꿀꺽, 침을 삼켰네

 

 거구의 사내가 종이새를 접고 있다아
 방충망을 헤집는 더듬이들,
 호박꽃잎은 그만 터질 것 같네

 툭!
 부실한 푸른 감 하나
 지붕 위에 떨어지고

 

 보름밤 감나무집 지붕 위, 새까만 호박 몇이 사생아 같았네 무슨 날짐승 소리 들리는 듯도 했는데, 달빛이 안개에 젖은 빨래를 말리고 있었네  

 


조선일보 

  빛을 기억하라고/손필영          

 

1
 소백산 양지 자락에서 가을까지 벌을 모으다 윙윙거리며 돌아온 벌통집 산 5-707호.
 새우잡이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며 멍텅구리 배에 떠 있는 708호
 하루종일 방에 들어앉아 감감 무소식을 감감 희소식으로 바꾸고 수틀마다 물소리에 야생화 를 촘촘히 수놓고 별랑 끝에 자리잡는 710회, 711호.

 

2
 동대문에서 동소문으로 가시는 길을 아시나요. 뒷길로 벼랑을 끼고 몸 하나 간신히 빠져나 가는 돌동네로 오시면 거기서 가깝습니다. 마주 오는 사람끼리 비켜서지 않고 서로 스며들 면 바로 거기가 동소동하이지요. 그곳은 해가 동네사람 하나 하나를 다 거쳐야 산을 넘어갑 니다.

 

 제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는 동소문을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전에서 어른거렸습니다. 자 전거를 타고 가는 계란 아저씨와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서로 스며 동소문에 들어섰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는 아래로 내려가고 아주머니는 언덕을 올라가고.

 

 두부 할아버지가 종소리를 앞세워 저쪽 골목 끝에서 오고 있습니다. 모판에 그대로 핀 서광 꽃도 종소리에 맞춰 일렁거리고, 나도 그 소리에 맞춰 마주 걸어갑니다. 할아버지와 내가 서 로 스며들다 보니 할아버지의 왼쪽 가슴이 무척 밝았습니다. 아직 해를 품고 계시군요. 어느 새 나도 동소동하 주민이 된 것일까요. 가늘게 뻗쳐오는 황금빛 한줄기.

 

3
잠들어도 시간에 쫓기는
나는 709호에 살고 있네요
구민회관 옆 넓은 마당을 좁게 걸어 돌아오면
706-7-8호로 기울던 해가 710-11호로 줄지어 넘어가네요
709호는 거치지 않네요, 빛을 기억하라고, 빛을 내라고?  

 


매일신문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배영옥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네모난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고스란히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 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지금 나를 읽고 있는 소리,
온몸이 뻐근하다  

 

동아일보 

 흑백사진/최경민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놓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을 밖으로 잠겨 있네. 

 

 

중앙일보  

어라! 햐! /이희철          


 어디 보자, 이게 피라민가 빙언가 속이 보여야 빙어이제. 어디 보자 자리를 벌리고 비집고 들어와 냅다 겨울 햇빛 한 조각을 집어 들던 사람. 빵모자를 눌러쓰고 초집장에 한 번 찍어 소주잔을 걸치고 입술을 쓰윽 쓰다듬던 사람 어라! 햐!

 

 그 겨울이 그립네. 겨울의 깊이를 웅크리고 웅크려서 얼음의 두께로 한겨울을 보여주던 저 수지. 손도끼 곡괭이로 내리쳐야 닿던 완강한 겨울의 복판.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얼음을 깨어내 내부로 닿던 적막. 속이 투명한 빙어가 어라! 햐! 얼음빛을 닮아 빛나고 있네.

 

 얼음 밖이 딴 세상이라, 얼음 밑이 딴 세상이라 조심조심 겁 많은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않다 가 안심이다 정말 안심이다 마음 놓을 때 쩡쩡 갈라지며 울음 울던 물의 소리 저 검푸른 빛 구들장만하게 떼 오고 싶었네, 몸으로 뗄 수가 없어 엎드려 어쩔 줄 모르던, 어라! 햐! 그래 서 더욱 첩첩 산중이던 상주 어디쯤에 아직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그리운 사람.  

 

 

한국일보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나겠습니다' 

 


대한매일  

어달리*의 새벽/정영주 

         

묵호는 검은 고래다.

 

새벽마다 허옇게
바다를 벗겨내는 어부들이
선창가에 비릿한 욕지거리를 잔뜩 풀어놓으면

 

고래 입 같은 아가리 배에서는
온통 욕지기질로 헐떡이는 생선들...

 

경매가 시작되면
선창가는 거대한 고래의 뱃속이다.
부시시 무너지는 어둠 속에서
퍼덕거리다 뒤로 나자빠지는 그네들의 흥정

 

독한 비린내까지 경매로 팔려나가면
묵호는 체증에 걸린 고래 뱃속을 빠져나간다

 

오징어처럼 먹물을 뒤집어쓰고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파장의 도시 ―
하루를 새벽에 몽땅 떨이해 버리면
그제서야 졸음은 해일처럼 몰려온다

 

지난 밤
오징어 배에 수없이 켜놓은 알전구로
눈이 먼 어부들, 이제
눈꺼풀 안쪽에 비친 햇덩이가
200촉짜리 집어등만큼 뜨겁다  

 

*어달리:강원도 묵호항(현재는 동해시)에 소재한 선창가 마을

 


부산일보

휠체어를 타고/신민철    

      

나는 두 손으로 지구를 굴렸다. 손끝에서 세상이 휘청거렸다. 자전하는 손바닥은 유년시절의 푸른 길을 쉴새없이 뽑아 올렸다. 나는 봄꽃처럼 피어난 무한궤도 속으로 부활의 꿈을 굴렸 다. 하늘까지 뻗은 길의 중심이 손바닥 속으로 모여들었다. 수평선을 지우고 달려가는 휠체 어 아래로 집들은 높이를 잃고 있었다. 곳곳에서 중심을 잃은 사람이 휘청거렸다. 하늘을 가 르는 바큇살에 보폭을 벗어난 햇살이 잘려지고 있었다. 나는 썩은 다리의 절망을 잘랐다. 사 방으로 퍼지는 무수한 꿈의 잔해가 굳은살로 박혔다. 바퀴를 굴릴 때마다 길은 손바닥의 중 심에서 뛰어다녔다. 나는 두 손에서 벗어난 길이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전남일보 
 감나무 옆에 방이 있다/ 최인철          

1
누이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고
석고기둥 같은 전신주 불빛 아래 눈이 쌓인다
생을 널어서 겨울햇볕에 말리던 친구는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도 내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겨울은 춥고
그 빛나는 결빙의 세례 끝에서
은백양 벗은 몸들이
우수수 떨린다
검정 고무신 신고
눈처럼 하얗던 어린 아이 때
나도 봄날이면 언제나
연푸른 새 잎이 저절로 돋아나는 것인 줄 알았단다
너처럼 고통을 모르는 어린 나무였으니까
이제는 내 등걸도 제법 상처를 입고
아픔을 무서워할 만큼 두터워졌지 참,
어제는 한없이 초저녁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어
소원 한 가지 못 빌고 울면서
내 속에 움트는 새싹 한 가닥을 본 것도 같아

 

은백양 벗은 몸 위로 눈은 점점히 굵어지고
불빛은 흘러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꺼져간다

 

2
밤은 쉬이 지나지 않는다
문을 열면
하얗게 눈이 내리고
긴 어둠을 통과하는 목포행 열차가
철길을 건너며 겨울을 지나간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렇게 잊힐 것과 추억할 것들의 무덤을
천천히 채워간다는 것일 거야
살아서 걸어가는 발자국
우리들의 무대는 어설프게 읽혀지고
뜻없이 하늘을 이는 바람처럼
서른의 옷깃을 천천히 적셔가는 것
눈은 어둡게 쌓이고
친구는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을 껴안고
죽음처럼 깊은 잠을 이끌어 들인다.  

 


국제신문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권정일    

      

그때 나는 세모시 저고리에서 달빛보다 더 선연한
바늘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열 손가락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화처럼 가지런한
이마가 환한 빛을 내던 토방 쪽마루를 보았다

어머니 반짇고리 곁에는 내가 이름 지어준 별들이
내려와 집을 짓곤 했다 못에 찔려 피 흘리던 내
꿈들 우리집 추녀 끝에 밤마다 찾아드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한 채 섬이 된 우리집 마당으로 물방울처럼
별 하나, 별 둘 똑똑 떨어지는 기척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푸른 슬레트 지붕이 녹스는 소리마저 정겨운
여름밤이었다 흑싸리 화투패 같은 빈 껍질의 어머니
가슴에서도 녹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쩜 그것은
내 가슴팍을 적시는 물살이었다 추깃물 같은 반딧불이
우리집 낮은 담장 너머에서 몇 번 어둠을 흔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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