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고물상 [2001년 경향신문] (박옥순)
1
충대우 6로 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그 노인이 지은 집 [2001년 한국일보] (길상호)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금관(金冠) [2001년 매일신문] (조유인)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 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들지 않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식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듯.
기차역에서 서성이다 [2001년 농민신문] (이궁로)
기차가 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다
대합실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의자
일몰의 그림자 길어지면 차갑게 흔들리는
철로 주변의 측백나무 사이로 쓸쓸히 흘러가는 저녁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 지루한 표정
딱딱한 마분지 차표를 건네는 매표원의 가느다란 손가락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출발과 도착의 낡은 시각표
의미 없는 부호처럼 굴러 다니는 비닐 봉지
너무 일찍 나온 것이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가 보였지만
기차는 서지 않고 역을 지나쳐 간다
역을 지나쳐 가는 저 열차처럼
삶도 그냥 지나쳐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일까
대합실 밖에서 흔드는 이별의 손짓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과
재회를 꿈꾸며 사는 것도
열차가 다시 제 철로를 밟고 돌아오는 것처럼
생의 어느 지점에서 떠났던 사람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때에
한 번은 돌아올 것을 믿는 때문이고
자신이 타야 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침묵이
세상의 침묵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본다
수은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역 광장에
이별의 그림자처럼 서성이는 작은 별이 뜨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내가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각이다, 기차가 오기에는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 [2001년 문화일보] (고현정)
모형 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이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오후 두 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올려대기 시작한다.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우항리에서 [2001년 전남일보] (정경이)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때론 누울 곳 없는 정신 툭하면 집 을 나갔을 것이고. 발자국은 그렇게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다시 길이 되어 1억년 밖으로 나섰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참 어수선한 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화석처럼 박힌 관습의 발자국들을 정신없이 좇아 다녔을 뿐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발자국 신어 본다 지금껏 내 발등을 밟고 있던 발자국 하나 얼른 벗 어 놓고 도망치듯 빠져 나오는데 깨금발로 따라오는 커다란 발자국 나도 깨금발로 걷고 있 다 우항리를 벗어 날 때쯤 나의 걸음은 경쾌하고 길도 신발을 신고 내 팔짱을 낀다
*우항리: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화석지
복숭아 [2001년 중앙일보] (서광일)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딛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사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꼇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봄, 야유회를 가다 [2001년 경남신문] (정선호)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바람만이 저녁밥을 지어
논둑의 뱀풀이며 씀바귀들에게 퍼 주었네
염소들 그것들을 뜯어먹으며 아이들을 불렀지만
아이들은 해변에서 바다를 뜯어먹고
되새김질하여 수평선 너머로 공을 차내고 있었네
바람은 날개를 접어 몇몇은 빈 교실에서 헤진 추억들을 풀어놓고
몇몇은 야유회 온 사람들의 배낭을 비집고 들어가
아이들과의 이별을 준비했네
저녁식사엔 염소 한 마리 잡아 만든 수육이며
국물이 나왔는데 바다냄새와 풀냄새가 물씬 났네
풍성한 저녁식사는 시작되었지만 일행은
부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처럼 말없이
질디기질긴 식사를 하는 것이었네
파도소리는 보채는 아이들을 잠재웠고
소쩍새같은 숨소리를 내며 커가는 아이들,
이슬을 불러 염소의 쓸쓸함을 덮었네
파도소리가 더 크게 들리자 일행은 저마다
염소의 울음소리를 내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하얗게 늙어갔네
그들의 턱에는 수염이 빠르게 자라고 있었으며
새벽녘에서야 막혔던 귀가 뚫리고 있었네
뿌리 [조선일보] (정임옥)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수선집 [2001년 강원일보] (박대성)
보퉁이에 담아 보냅니다.
앞서가는 계절의 깃을 달아 보내기도 하고
지난 계절을 잠 깨워 가기도 합니다.
섶섶에 묻어 온 향긋한 피로와
땀으로 얼룩진 소망의 연흔들
보드랍게 풀려나간 욕망의 실밥들을
맡겨두고 갑니다.
털어내고, 지우고
펴고, 접고
줄이고, 늘이고
이어 붙여야 하는 나른한 소식들이
따갑게 쪼아대는 재봉틀에 붙들려
한 땀 한 땀 다시 일어섭니다.
생살이 미도록 해어진 그리움 하나
누가 이 그리움의 솔기를 미어 놓았을까
튼튼하고 곱다란 사랑 조각 찾아내어
기워줍니다.
수유리(水踰里)에서 [2001년 세계일보] (장만호)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러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2001년 대한매일] (신혜정)
말을 타려고 하는데 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보이네요
말장사 아저씨가 입은 회색 점퍼 소매에도 눈런 솜털이 삐죽거려요
아까부터 아저씨는 저기 공장굴뚝처럼 기침을 토하고 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말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위로 솟으면 초록과 빨강 줄무늬 천막이 보이고
내려오면 내 바지처럼 군데군데 구멍난,
쓰레기더미 같은 판자집이 보였어요
연탄재들은 오늘 아침 차에 실려 떠났어요
말장사 아저씨는 네발 달린 의자에 안장처럼 앉아 있네요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발굽 소리 대신 녹슨 프르링만 자꾸 삐그덕거렸어요
창호지 바른 우리집 창문에 불이 켜지네요
이제 말들이 리어커 바퀴에 실려 떠날 거예요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다리가 없는 분홍빛 말 위에서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연탄재는 왜 또 내놓으세요?
아버지의 파업 [2001년 국제신문] (오영수)
햇볕에 풀어져버린 기와집은 아버지를 밀어내고
활자가 부서진 우편함에는 주인 잃은 일련번호들이 빗물에 잠겨 얼룩을 물어 뜯고 있었다.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세간들이 퇴행성 관절염에 걸려 전신을 삐꺽거리며 엎어진다
여기 저기서 숨어있던 먼지들이 뛰쳐나와
아버지의 독한 체위에서 잠수한다
허기진 방안을 매운 온기가 가족사진에 곰팡이를 피워내고
내 어린 시절을 떠내려 보냈다
청마루 밑에 흩어진 헌 신발들이 맥박이 뛰고
빈 뜨락에는 녹이 슨 농기구들이 동강 나서 비명을 지른다
한 구석에는 잠을 털고 일어선 우물가에는 절구통이 무게를 잰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버리고 있었다
역경 [2001년 전주일보] (오영수)
두 손으로 들어올린 잘생긴 호박돌 한 개
그 많은 모래와 자갈의 속세에서
찬란한 색깔이 희석된 채 윤회의 단아함을 내색하며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황금 모래알의 묵상
힘겨운 오후
야생화들의 몸부림치는 소리가
주황빛 노을의 뜨거운 입김에 가려
하나의 고행으로 만져지는 호박돌의 감촉
고통과 아픔의 껍질을 벗기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불꽃을 외면한 채
저 깊은 살 속
번뇌를 에인다
단단히 여물어 가는 빛나는 돌맹이의 고통
빛좋은 호박돌 속에 녹아있는 힘겨운 체온
흩어진 가슴을 미동으로 만지며
희석된 정좌의 심경을
발가벗은 몸짓으로 이야기 한다.
이삿날 [2001년 광주일보] (김행란)
하나 둘 도시의 집들이 나와 거리를 간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집에는 집이 없다
낯선 자의 비좁은 집에 편승하여
세 식구 잠시 인생을 포개어 앉는다
밀어낼 수 없는 따스한 불편
살아온 사십여 년을 싸놓은 짐보다
무거운 아내의 한숨이
보자기를 풀어놓은 듯 물결친다
못질을 한다
세 식구 밝은 웃음을 걸어두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꺼낸 희망도
단단하게 더욱 단단하게 걸어 놓는다
오래된 살림살이 낡은 남루를 벗듯
아내는 오래오래 닦는다
부엌문에 딸아이가 제 그림을 붙인다
아내와 내가 어설프게 도화지에 서 있는
아내와 내가 가난하게 서 있는
방 한 칸과 두어 평 부엌을 이어 놓는다
딸아이의 여섯 살 웃음이 진달래꽃으로 곱다
이층에서 본 거리 [2001년 동아일보] (김지혜)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몸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걸음씩 비켜 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않고 있으므로.
젓갈 골목은 나를 발효시킨다 [2001년 대전일보] (이가희)
짠 손바닥에다 새우를 키운다
멸치떼도 몰고 다닌다
헝클어진 비린내를 싣고 와
육거리 젓갈시장 골목 가득 풀어놓는다
날마다 그는 해협을 끌어다
소금에 절여 간간하게 숙성시킨다
그가 퍼 주는 액젓은
오래 발효시킨 수평선이다
그는 저울에다
젓갈의 무게를 재는 법이 없어
누구나 만나면
후덕하게 바다를 퍼 준다
저무는 수평선처럼 강경상회가 셔터를 내리면
골목에다 몸 풀었던 바다 갯내음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상거웠던 내 몸,
어느새 짭짤하게 절인
젓갈이 된다
찻잔 앞에서 [2001년 부산일보] (이선희)
이제 그만 엎질러버리고 싶어요 휘저어버리고 싶어요 좀처럼 헹굴 수도 없는 목마름,얼룩처 럼 앞치마에 찍혀 있어요 뜨거운 목숨도 아닌데 어쩔 수 없는 꿈도 아닌데 꿈속에서 내가 잠시 기울었다 일어서는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무시로 송곳처럼 쿡쿡 찌르는 아픔 알 것 같 아요 비어 있는 가슴을 더욱 더 긁어대던 더부살이 같은 물살을 알 것 같아요 견고한 언어 의 씨앗 다투어 잎 아무는 기척 알 것 같아요 목마른 얼룩 앞치마에 파고드는 저녁나절의 쓸쓸함도 알 것 같아요 내 삶의 그림자였던 보랏빛 실핏줄에 닿던 칼금 지금도 징그럽게 꿈 틀거려요 그리움이란 변증법 데리고 꿈틀거려요 나를 떠난 그대는 이미 멀리 있는데 그 무 관심도 관심인 듯 짓궂게도 출렁거리는 나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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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아래 엎드린 아이들은 황사바람을 털고 있어요 어딘가에 있을 풀밭을 기웃대며 지나간 시절을 꿈 꾸어요 먼 풀밭 너머 장다리꽃 사이로 아직 알을 까지 못한 벌레들은 썩은 밀랍 을 게워낸대요 벌레들이 잠든 밀랍의 무덤을 지나 무개차가 지나가지요 풀잎 같은 허리 꺾 으며 툭툭 마디 끊어지는 소리 들려요 쇠비름처럼 붉은 길의 줄기를 타고 장다리꽃이 오고 있어요 종알대는 꽃잎이 흔들거려요 무수한 발자국이 파놓은 길바닥을 지나 바람은 가고 장 다리꽃 속으로 아이 두엇 종알거리는 소리 들려요 아직도 오지 않는 풀밭을 기웃대는 나를 종알거려요
철로변 [2001년 전북일보] (이길상)
저탄장 탄가루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아침을 여는 길은 객지를 떠돈다
막장에 들어가는 반딧불들, 날개를 떨구면
검은 산엔 절망의 삽날이 꽂힐 뿐이다
등록금 낼 때쯤이면 아이들은 학교가 불 꺼진 빈집 같다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잠 못 이루며 출렁이는 삶이 거품으로 올라올 때
그 빈 공간 메우자고 떠난 아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 소식 궁금할 때마다 강물은 말이 없고
고요와 적막에 남은 논밭마저 드러눕는다
갈대처럼 함께 모여 살던 이웃들은 흔들리고 있는가
갈기 선 바람이 불자 희망의 불이 꺼진
길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
떡잎 같던 시간이 뿌리를 거둔다
시린 눈발에 하늘도 허기진 달을 내건다
달처럼 텅텅 울리는 마음은 철로로 놓여 먼 길 떠났을까
거죽만 남은 풍경은 주저앉아 빈 밭을 키우고
세간은 더 야위어 간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좌판에 햇살 가득 찰 날이 올까
아버지가 오실 길에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
겨울 그놈의 겨울이 또 눈과 바람을 데리고
무쇠처럼 달려오고 있다
춘궁기 [2001년 국제신문] (오영수)
촘촘히 박힌 돌담, 한 모퉁이가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흙더미 속에서 일어난 붉은 장미 한그루가
햇살을 당기며 울타리를 만들었다 울타리는 안간힘으로
서서 얼굴을 가리고 봄 날을 만났다 풀섶을 헤친
틈 사이에서 못다핀 꽃 한송이가 빗장을 푼다
넓은 마당에는 낡은 의자가 부러져 움츠리고 앉자
슬픈 상처를 달래고 있었다 욕망의 살갖을 태운
얄팍한 브라우스가 창가에 서성이며 잃어벼렸던 암내를
찾고 있었다 암덩어리 끄집어 낸 돌담은 무게 무거워서
길 하나 열어놓고 불그레 취해있는 장미와 물레방아를 돌린다
속살드러낸 이데올로기 길 밖으로 질주한다
해바라기 [2001년 경인일보] (박명옥)
발자국처럼 시든 꽃잎
사다리 타고 내려온다
문을 열면 마당 한 가득 벌어진 해바라기
긴 그림자 안 방까지 들어와
잠을 자기도 하던
낮 동안 키웠던 몸이 뜨거웠다
제 열망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했던 그 높이
푸른 하늘 짓무르게 고개 들었던
목덜미에서 푸르고 넓은 대지가 떠내려갔다
온 힘을 다해 긴 터널을 통과했던 물방울들이
둥지를 틀고 소란스럽게 몸 흔드는 날은
제가 감당하기 힘든 큰 꽃을 피우기 위해
노랗고 긴 손가락을 펴고 있었다
한 줌의 햇살 같기도 하던 노란 꽃술 부려놓고
앞마당을 달빛같이 채우던
그림자를 딛고 나는 자랐다
그 작은 씨앗 속에서 거인처럼 솟아오르던
희망의 줄기를 붙잡고
너무 느리게 자라는 내 키를 기대면
기차소리처럼 다가오던 먼 미래
잘 익은 태양을 가득 싣고
불꺼진 간이역마다
해바라기 같은 등을 매달고
천천히 달려오던 녹색의 터널에 웅크리고 앉아
천천히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해 그림자 길게 모래알을 흘려놓고 가던
여름철마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
해바라기 속에 씨앗처럼 많은 집을 지어놓고
햇살을 파먹던 그 높이
녹색의 터널은 길고 지루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