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02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1:33

 


[2002년 동아일보] - 김중일

가문비 냉장고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2002년 문화일보] - 윤성학

감성돔을 찾아서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의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본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 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막,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2002년 전북일보] - 송승근

낡은 구두

  
집을 나서야할 이른 아침
차가운 시멘트 바닥 한 구석에서
밤을 지샜을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본다

오랜 세월 거친 길을 헤매면
몸 속의 멍도 감출 도리가 없는 듯
푸른색 실밥이 타져 나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쉬어야 하는 것일까
느슨하게 풀린 끈이
고갯길 바위시렁에 주저앉은 듯

그러나 알아야 한다
굽은 닳고닳았지만
문 밖을 향해 가지런한 것은
걸어야할 길이 아직 남아있기에,
그래서 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길을 기억하는 낡은 구두여,
오늘도 너의 끈을
단단히 동여맨다



[2002년 경남신문]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에 걸려있던 햇살이
누구의 집이었던
쓸쓸한 마당 한 귀퉁이에 툭 떨어지면
윗채가 뜯긴 자리에
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자라나고
등뒤에서는 해가 지는지
신도시에 서있는
건물 유리창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2002년 무등일보] - 문지원

바퀴는 끝없이 구른다

  
드디어 팡파레 소리가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좌석 뒤에 돗자리를 편 가족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간밤의 꿈을 응원한다
십이월의 바람은 시린 호주머니에 가득하고
배팅 된 전광판의 숫자가 달음질치기 시작한다
박수 소리보다 선수들의 헬맷이 야무지게 빛난다
비탈 진 길에서는 페달을 더욱 세차게 밟아야 한다
함성이 선수들의 붉은 다리만큼 굵어지면
욕설도 응원을 비는 무슨 부적이라고 간간이
카악 칵 가래침까지 뒤통수에 붙여준다
누가 들여왔을까 세 발 자전거, 아이의
작은 발등에 노란 전표가 붙었다 날아간다
경기 막바지에 다다른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빠르다
허기진 오후까지 채워주는 알진 통감자
사람들 입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온다
자리다툼하는 바퀴에 햇살이 사납게 퉁겨진다
조금만 더! 저기가 고지다!
선수들의 각진 턱이 페달과 함께 부러질 것 같다
골인 지점을 막 지나가는 바퀴들을 향해
사람들의 눈에선 정밀한 플래시 불빛이 터진다
우승한 선수의 주변으로 환성이 모였다 흩어지고
풀죽은 어깨들이 전표처럼 구겨진다
우승을 점치던 책자들과 빨갛게 벌렁거리던 밑줄들과
차갑게 식은 한숨들이 텅 빈 관람석에 채워지고
갈기갈기 라인이 그려진 가슴들이
하루를 올라타고 페달을 굴린다 갑자기 컴컴해져 오는 저녁을
응시하는 눈동자들, 두 개의 검은 바퀴가
이탈할 수 없는 어둠 속 트랙을 따라 털털털 굴러가고 있다.



[2002년 세계일보] - 심은희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

그만 살았으면 싶은 노인들의 푸념 또는 수작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진 가로수들이나
심하게 쳐진 할머니 입꼬리에 걸린 담배처럼 언제라도 툭
떨어질 듯이 과자 봉지를 들고 질주하는 어린 아이를 볼 때면
그것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기어이 아이의 과자는 축포처럼 공중분해되고
어디선가 날아든 비둘기들은 겁도 없는 상이군인처럼
버스전용차선으로 뛰어든다 순간 나는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어머니의 노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비틀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제 알겠다 콘크리트 벽에 일렬로 달라붙어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나이트 클럽 벽보를
무슨 복권처럼 긁고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왜
까닭모를 화가 치미는지를

버스는 이내 저 홀로 풍성한 계절을 맞이한 청소차를
아슬아슬 비껴나간다 청소차에서 분명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차가 덜컥덜컥거리며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짤랑거리며 들어서는 건 언젠가는 내 몸 가장
투명한 부분을 밀치고 들어설 낯선 불행들일 것이다;갑자기 숨이 가빠온다
(아까부터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2002년 부산일보] - 안차애

사냥감을 찾아서


1
배꼽에서 비스듬히 3㎝ 위쪽 지점을 깊이 맞뚫어
피어싱(piercing)한다
생각보다 많은 출혈량은 있었지만
멧돼지 어금니 모양의 둥근 봉 두 개를 마주 꽂아
기쁨을 장식한다
바야흐로 성인식이다

어제는 들소 뿔 모양 장신구를
그제는 사슴의 목뼈 모양 링을
며칠 전엔 상아 모양 고깔을

미간에 귓바퀴에 귓불과 입술에 바짝 매달았다
비로소 야생 동물의 더운 피가 쿵쾅거리며 온 몸을 뛰어다니고

2
사냥감이야 늘 지천이다
혼다 4기통 오토바이로 시속 100㎞ 남짓 달리다 보면
알타미라 동굴 근처의 바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지중해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다 느닷없이
오호츠크해산 고래 한마리가 친구 입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깔깔대며 잡기도 한다

취향이야 늘 바뀌기도 하므로,
오늘밤엔 늙은 아버지의 가슴 뼈 밑에 숨어사는
느린 곰의 촌스러운 진지함을 새삼 사로잡아
혓바닥에 박고 싶다,아주 가학적으로



[2002년 한국일보] - 임경림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 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2002년 매일신문] - 이향

새들은 북극으로 날아간다


강 건너 쌍림공단 쪽에서 깃털에 따스함을 숨기고
쇠기러기 한 떼가 북국으로 날아간다
뭉텅뭉텅 욕설 게워내는 굴뚝 위로
폭설이 내려 세상의 길들 질척거린다
눈발에 못이긴 나무들 길게 휘어지고
섬유공장 연사실 대낮에도 알전구가 껌벅거린다
서른 두살의 조선족 김금화씨는
귀마개 꽁꽁 틀어막아도 눈내리는 소리 들린다
윙윙대는 기계소리가 푸른 뽕잎 갉아먹고
다급하게 실 토해내어 고치를 만든다
고치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수천마리 나비가 되어 꿈 속을 날아다닌다
몰래 숨겨둔 적금통장에는
삼만원 미만의 싸락눈이 하얗게 쌓인다
두고 온 북국 눈발에 파묻힌 무도
연초록 싹 내밀어 봄을 기다리겠지
막내의 바짓단도 겨울해만큼 짧아졌는지
더 자랄데 없어 서걱이는 강둑의 갈대가
그리움에 얼굴 묻고 우는 저녁
젖몸살로 뒤척이다 뱉아놓은 보랏빛 한숨
한 가닥 물고 북국으로 날아가는
저 쇠기러기 떼



[2002년 국제신문] - 전다형

수선집 근처


구서1동 산 18번지
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2002년 전남일보] - 박성민

어느 시인의 죽음


1
변두리 허름한 헌책방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시집 한권 툭툭 털며 읽는다
여성지와 중학교 문제집 사이에 꽂혀있는
시인 박정만
〈그대에게 가는 길〉 유고시집
기필코 한 주먹만 더 살아야겠다던
시인의 시집
靈肉을 짜내 쓴 시인의 피울음이
곰팡이로 앉아 있는 시집 속
시인의 눈은 눈물겹게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헌책방 나와 낮술 마시며
시인이 응시하던 하늘을 보았다
타다 남은 연탄 같은 여름 해 아래
질식할 것 같은
어떤 삶의 원형을

2
죽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밀려 떨어지는 톱밥처럼 우울하게
이 땅에서 시인의 죽음은
이래도 되는 것일까
정육점 쇠꼬챙이에 걸린
고기 덩어리 같은
아아, 시의 살과 피

3
짙은, 먹빛으로, 빠르게, 번지는, 구름떼
불현듯, 쏟아지는
장대비 (아아, 저 쇠창살, 쇠창살)



[2002년 조선일보] - 이윤훈

옹이가 있던 자리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2002년 경향신문] - 송유자

조치원(鳥致院) 지나며


밤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몇 달째 가뭄 끝에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논바닥처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으며
비에 젖은 풀잎들이 스적스적 일어서고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 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2년 경인일보] - 송정화

좌판


낯선 간이역에는 거대한 몽상과 혼돈의 장이 섭니다.
그곳에서는 가끔 죽은 바다도 싱싱하게 거래됩니다.

수전증에 걸린 노파에게
좌판의 生으로 끌려 다니는 그녀는 등 푸른 생선입니다.
미끈거리는 그녀의 몸을 좌판 위에 올려놓고,
노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손으로 진로를 더듬습니다.
제발 나를 풀어 줘. 몽롱한 그녀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가지만
푸른 물살의 전율을 기억하는 몸은 여전히 싱그럽습니다.
가는귀 먹은 노파의 손은 좌판만 땅땅 두드립니다.
비릿한 바다 냄새에 이끌린 사내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신명이 난 노파는 덜덜거리는 손으로 바다를 들고 한껏 부풀립니다.
그녀의 푸른 등에는 매혹의 바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매력적인 바다야. 뭇사내들의 탐욕이 번득입니다.
불빛도 슬쩍 끼어 들어 그녀의 등을 한 번 쓰윽 쓰다듬어 봅니다.
탄력 있는 몸이야. 몽상의 바다 속으로 한 사내가 출렁거리며 걸어 들어옵니다.
노파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도마 위에 모로 눕힙니다.
그녀의 몸에서 우우 깃털처럼 바다의 지느러미가 일어섭니다.
한껏 달구어진 몽상의 도마 위에서 그들이 몸을 섞습니다.
지폐를 챙긴 노파의 손은 알고 있습니다.
비릿한 그녀의 몸 속 깊이 깊이 들어가 보면 바다는 이미
딴 세상으로 훌훌 떠나버린 지 오래란 것을.



[2002년 대전일보] - 전유나

학습지 공장의 민자

 
고향친구 민자.
지난겨울 서툰 자전거를 타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 기브스를 했다는,

삐끗한 삶에 질질 끌려 함박눈이 길을 지워버린
용문동 뚝방 어디쯤 허름한 학습지 공장에 다닌다는,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대들보에 목을 매달 수 밖에 없었던
상이용사 아버지를 두었던,

씨받이로 탐낸 동네 남자들 피해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이사해 하룻밤도 편히 주무시지 못한 어머니의 슬픈
노랫가락 젖은 눈빛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아리다는,

그래서 3교대 낮, 밤 시내버스 안내양 아가씨로
서울시내를 빙빙 돌며 돈을 모아 친정 집사주었다는,

영업용 택시 운전하는 남편과 맞선으로 서른 고개
훌쩍 넘겨 결혼했다는,

민자, 이제 영세한 학습지 공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알콜중독되어, 밖으로 방문 잠가놓고 출근해야 하는 시어머니,

일보다는 고스톱으로 한탕 잡아보겠다는 남편,
빙빙빙 집에서 노란 주둥이 빼물고 하루종일
모이 물어오길 기다리는 새끼들 주변을 돌고 있다.

뭔가 기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더듬이를 잃어버린 일개미 같다.

엉성한 문틈으로 들어온 황소바람이 힝힝거리며
학습지를 들춰보기도 하고 난로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따뜻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는
학습지 공장 안에서 그녀는,

늘 밀려난 삶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제자리를 돌 수 밖에 없는 가젤 한 마리.

식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고구마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집을 갖는 것만이 소원이라는,
어릴 적 이웃집에 살았던, 언니들이 식모 살아
중학교까지 마치게 했던,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내 친구 민자는,



[2002년 광주일보] - 김해민

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삼거리 `희망약국'앞 난전이 벌어진다.
보따리에선 배추씨 무씨 아욱씨 아주까리씨 삼씨,
잎담배에 당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쏟아진다.
장돌뱅이끼리 마수걸이 인사 잊지 않는다.
신식 종묘사에 밀려 이제는 손님구경이 수월치 않다.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리는 한 노파,
누런 옥니를 보이며 하회탈처럼 웃는 한 노인이
무씨 반 줌과 한 묶음의 잎담배를 사갔을 뿐이다.

일광욕을 즐기는 양 씨앗들은 이리저리 몸을 트는데
성미 급한 한 씨앗이 행여 싹이라도 틔울까 볕이 몸을 사리고 있다.

씨앗의 환(還)을 꿈꾸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약국 안 시계가 한시를 가리킨다.
담배 한 개비로 허기를 막으며 서 있다.
자전거의 삼천리표 글자도 흔들린다.
시계가 세 시를 가리킨다.
그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 꿈을 매만지며 고개를 떨군다.
균형 잃은 약사의 걸음이 봉투 앞에 멈춘다.
그는 여전히 씨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약사가 건네준, 알싸한 박카스 노란 액속에
애간장 타는 그의 뒷모습이 섞여 넘어간다.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킨다.

환(還)의 길을 찾아주지 못한 씨들을 다시 품고 삼천리표 자전거에 앉는다.
그가 종묘처럼 떨궈놓은 새끼들은 떨이한 간고등어 대가리를 뼈까지 야무지게 발라먹을 것이다.
방죽 지나 흥얼대는 울고 넘는 박달재에 자전거머리도 흥얼흥얼 박달재를 넘는다.
검은 대지에 뿌려진 씨처럼 푸른 별들이 하늘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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