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2000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1:23

 

중앙일보

거미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술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더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세계일보

  낙엽 한 잎
/ 최 운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날이 저물고,
마음 맨 안쪽까지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낙엽 한 잎이 다 닳아진 옷깃을 세운다
밥 익는 소리 가만히 새는 낮고 깊은 창을 만나면
배고픔도 그리움이 되는 걸까
모든 길은 나를 지나 불 켜진 집으로 향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마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일수록
실직의 내 자리엔.
시린 발목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새우잠을 청하던 동생의 허기진 잠꼬대만
텅텅 울린다
비워낼수록 더 키가 자라는
속 텅 빈 나무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섰을 때,
애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먼데서부터
우리 삶의 푸르른 날은 다시 오고 있는지!
길바닥에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부르르 떨기도 하면서
구로동 구종점 사거리 횡단보도 앞,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세상을 둥글게 말아 엮던 달빛이 하얀 맨발을
내려놓는다  



경향신문

ㅎ방직공장의 소녀들
/이기인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 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 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전선)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조선일보 

우물
/ 최영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동아일보

고래
/이승수   

아까부터 내 옆에 앉은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전철 바닥에
누런 갈매기들을 토해낼 때마다
그가 멸치떼를 쫓아다녔는지
오징어를 잡으러 다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과녁을 맞히려면 과녁 위를 겨냥하라*〉는
구절에 이르러 나는
마구 흩어지고 있는 활자들을
애써 끌어 모아야 했다 그는
과녁 대신 자신의 다리를 찌른 듯이
한참을 절룩대다 앉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솔기가 다 닳아 구지레해진 바지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간신히 입에 문
〈장미〉담배가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성한 무릎 위에는 어린 계집 아이가
마지막 남은 영토를 지키듯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뒤돌아 노려본 창문의 하늘엔 새들이 잠시 내뱉아진 침으로 흘렀다 그의
두눈에선 독기오른 작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기어이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또 활자들은 모조리
바닥 위에 쏟아졌지만 한남, 옥수, 응봉
세 개의 海域(해성)을 지나는 동안 웬일인지
그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
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
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
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
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
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책을 주우며 무심코 올려다 본 전철의 천장은
묘하기도 하지, 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
남겨진 사람들 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 

*에머슨



매일신문

  의자
/ 김성용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는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문화일보 

집 속엔 길이 없다
/ 김규진          

1
신발을 숨겨버리고
전화도 끊어 버리고
종일 집 속에서 뒹군다.
―일찍이 출근하는 시인은 없었다.
숨쉬는 것은 오직 나와
베란다의 난초 몇 그루뿐.
내가 뒹구는 집을 꿈꿀 때
이 식물들은 떠나는 길을 꿈꿀까?

집은 하루 종일
수도꼭지로 마시고 솥과 냄비로 끊여내고
변기의 똥구멍으로 쏟아낸다.
―우리 시대에 '존재의 집'은 철거되었다.
가격의 단지가 서 있을 뿐이다.

몇 개의 길들이 문을 두드린다.
난초잎 두어 개가 흔들렸으나
기척을 느기지 못한 길들은 이내 돌아가 버린다.
열쇠의 구멍은 언제나 밖에 있다.
지친 나그네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2
기원전 588년
싯다르타는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에서 죽었다.
기원전 4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 위에서 죽었다.
행복했으리라
존재의 집마저 짓지 않았던 그들은.

56번 도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포장되지 않은 길.
칡넝쿨이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비포장길을 달리다
낮술을 마신다.
목마름을 목마름으로 다스리기 위해

어데까지 가제예?
난데없는 주모의 물음.
마치 혜능에게 점심을 어디다 두었냐고 물었던 주모처럼.
낮술 때문에 길은 비틀거리고

3
갑작스런 흐드득 흐드득 비
해발 1,300미터 구룡령 넘어가는 길.
비안개는 뿌리고 차는 진창에 빠지고
---차를 버릴까?
나는 아직도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액셀을 북북 밝으며 간신히 한 굽이 돌아
아,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연보라색 도라지꽃.
비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던 꽃무리들.
하늘도 언덕도 뭉개버리고
비안개를 타고 놀며 저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던 꽃무리들.
함께 비안개를 타고 놀며
교접의 뿌리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던
산비탈의 꽃무리들.

4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 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
또한 마음의 길까지도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욱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은 출근하지 않네
집 속에 길이 업네
이리로 오게
이리 와 걸어가세
바다의 밑바닥을.
한번도 걷지 않은 가슴 속의 황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한국일보

이발소 그림처럼
/ 조 정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부산일보 
알타미라 벽화
/ 정진경          
1
통로는 좁았어요
에스컬레이터로 도착한 층계에서 핸드백 같은 하이힐 같은 그리고 벨트 같은 짐승들의 허울을 보았어요
내게도 하나쯤 매달려 있는 쇠 가죽 핸드백 지퍼를 열 때마다 슬프게 눈 껌벅거리는
황소의 긴 숨소리가 옆 구리에 지근지근 파고들었어요 세상 모든 짐승들이 내뿜는 숨소리의 올가미에 나는 깔려 있었어요
어둠을 찍어 짐승들은 내 뇌리에 벽화 하나씩 그리기 시작 했어요 뿔을 그리고 등뼈를 그렸어요
천정 어디쯤엔 별 몇 개 옛날의 수림을 찾아 푸른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층계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슬픔을 껴안은 조그만 동굴 하나 수렁처럼 아득히 뚫려 있었지요

2
그날은 아마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었지요
아직 떨어질 수 없는 홍조 띤 잎새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굽신한 등이 눈에 들어왔어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털갈이 중인 비둘기들 땅콩 모이로 더 여문 살이 오르고 있었어요
철제다리 너머, 잎새든 깃털이든 상관없는 바람이 불고 벤치와 벤치 사이 깃털 같은 흙먼지가 벤치의 발목을 잡고 놀았어요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 일이라고 지루한 평화라고 말하는 듯 했어요
알타미라 벽화였어요 황소 눈알 같은 슬픈 껌벅임이 들리는 듯 했어요  

*알타미라 벽화: 알타미라 동굴에 원시인들이 그려놓은 짐승들의 그림.



대한매일

乾鳳寺 不二門 건봉사 불이문
/ 이덕완          

두 개인 듯 하나로 보이는 구름 한 조각
금강산과 향로봉에 걸쳐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건봉사 불이문에 들어선다

부처님 치아사리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에는
불상이 없고
계곡 건너 금강산 대웅전엔
부처가 환하다
만해(卍海)의 뜨거운 발자국이 보일 듯
돌다리를 경계로
금강산과 향로봉이 포개진다
같고 다름이 하나인데
이 곳에는 모두가 둘이라니

민통선 철조망이 반세기 동안
녹슨 풀섶에서 가람을 두르고 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독경 소리가 풀향기에 섞인다
깨진 기왓장에 뒹구는 낡은 이념들
초병들의 군홧발 자국 절마당에 가득한데
목백일홍나무에서 떨어지는
자미꽃의 핏빛 절규는
나무아미타불탑 위의 돌봉황에 실려
북으로 가는가 갔는가

적멸보궁 터진 벽 뒤로 날아가는
하얀 미소를 보며,아내와 난
보살님이 준 콩인절미를
반으로 나누어 먹는다



전남일보

달 속의 길
/ 정시우          

달이 거리에 얼어 있다
제 속으로 깊어지는 달을 걸으며
금남로를 유영하는 눈(目)
쩡, 하고 금가는 소리에 하늘을 본다
낮달이다
반은 어디론가 숨고 반은 낮에도 눈빛이 형형하다

거리를 기웃거리며 보이지 않는 달의 반을 찾는다.
사람들은 퇴적암처럼 층층이 시간을 딛 고 있는 멀티비전 속 공룡과 자동차,
사라진 시대와 사라질 시대가 손 잡는 것을 본다.
눈이 자꾸 지상으로 가라앉고,
균열진 콘크리트 틈새에서 오롯이 자라나서 말라가던 꽃대는 허물 을 벗는다.
나는 본다. 걸을수록 낯선 거리, 부유하는 열망들 사이,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얼굴로 눈사람처럼 뭉쳐져서
겨울을 건너고 있는 맹인의 적선 바구니에 어린 손가락이 넣는 동전 하나를.
한낮에 교감하는 해와 달의 빛에 반짝 환해지는 눈사람.
어린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달의 반쪽을 감싸고 있다.

가끔씩 아이들이 근접하는 하늘
달의 길이 사람의 길에 닿을 때
지구가 잠깐 자전을 멈춘다. 



국제신문

귀농
/ 강리

새벽마다 유리창이 잠을 깨웠다
얼음산 몇구비 방안에 들어섰고
발시린 보리밭은 퍼렇게 일어섰다
갈가마귀 두 마리 날개를 둥글게 말아
허공에 검은 울음을 쏟는다
싸늘한 구들장 철마산이 뒤척였다
저문 금숭화 빛으로 손등이 갈라지고
머리칼에 내려온 사락별이 빗질을 한다
창가에서 손톱으로 세상을 지웠다
하얀 산맥들이 우수수 무너지고
죽은 새울음소리 소의 혼령이 되어 지나간다
서릿구름이 산허리를 치댈 때
눈가루를 뒤집어 쓴 기차가
사내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온마을 동솥은 아낙네 한숨을 끓이고
아랫마을 산모의 허기는 서까래를 들먹거렸다
겨울모퉁이에서 삭지않는 눈바람은 숨이 가빴다
아침 햇살이 으깨어진 길을 일으키며 다시 돌아왔다  




농민신문 

무기력에 대하여
/ 성향숙  

욕실 수채구멍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머리카락이 뭉쳐있다
많은 무리속에서 나약한 소외감으로
떨어져 버린,
뿌리잃은 생으로 한가닥씩
나뒹굴던 머리카락들
더 이상 꿈을 공급받지 못할
이미 버림받은 생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풀썩거리고
아주 작은 물 흐름에도
소용돌이로 휘말리며
여기 저기서 밟히고 뒤채이다가
그곳에 소외된 힘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한다
더러는 좁은 구멍 속으로 빠져나가
전혀 다른 무리들과 섞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들에 잠시 붙어 있기도 하며
구석의 먼지라도 껴안고 뒹굴면서
안간힘을 써 보기도 하는,
그것들이 비로소 힘을 내기 시작하는가
구멍을 꼭 막고
거센 소용돌이를 정지시키는
힘이 발휘된다 



전북일보 

후리지아를 든 남자
/ 김형미          

크고 황폐한 내부 속에 길을 감춘 건물들
사이에 사내 하나 서 있다
작은 미동도 없이 후리지아 한 다발을 가슴에 품은 채
귀가 어긋난 보도블럭처럼 퉁겨져 나온 사내를
건물들이 흘깃거리며 내려다 본다
사람들이 사내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사내는 서서히 신호등이 되어간다
그 자리에 그대로 보도블럭 사이 발을 묻고
후리지아꽃을 피워낸 나무가 된다
이제 사람들은 크고 황폐한 내부가 되어버린

사내를 의식하지 않는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사내는,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내를 중심으로 지구가 생기고
역사가 맥을 잇고
나와 길과 건물들이 태어나서
건물들이 길을 가두듯 사내를 가두었는지도
사내가 갈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길이 사내의 몸 속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 켜진 사내의 몸 속을
21세기는 두 팔 휘두르며 건너갈 수 있을까
노란 차선처럼 다문 입술에서
일순간 먼지 먹은 바람이 새어나왔을 뿐
말 없는 사내 머리 위로
새가 날아갔다 세월이 흘러갔다
눈 속에서 꽃대 올라온 후리지아가 쇠었다
사내는 문득 듣는다
늙은 봄이 가쟁이를 벌리고 벼룩 잡는 소리  



평화신문 

소금의 말
/ 이인평      

네 손으로 내 몸을 한 웅큼
집는 순간
창백한 내 피부에서
해풍에 말려진 쓰린 결정체의
짠 빛을 볼 것이다

삶은 매섭게 짠 것이라고
저물게 깨닫는 단 한번의 경험으로
바다에 닿는 긴 아픔을
깨물게 되리라

너는 원래 소금이었다
내 짠 숨결이
흙으로 빚은 네 몸을 일으킬 때
네 눈엔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의 짠맛이
네 유혹의 단맛을 다스렸다

보라, 파도의 씨눈들이 밟히는
네 영혼의 길에서
하얀 내 유골의 잔해가 빛난다

나를 쥐었다 놓는 그 시간에
한 주먹 내 몸이 흩어지면서
피안으로 녹아 흐르는
절여진 네 목숨의
긴 호흡을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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