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97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1:07

 

■서울신문
폐차장 근처/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어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문화일보
지하역/이기와          


지하 30미터,
한때는 만개한 꽃처럼
구김 없는 선명한 모양의 화석들이 이곳 어디엔가
오랜 비밀로 박혀 있었음직도 한,
수천 수만 년 동안 지하 어둠의 사슬에 묶여
미동도 없던 영혼들이
길이 뚫리고 빛이 스며들면서 하나 둘
마법에서 푸려나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언저리를
휙휙 날아다닐 것도 같은,
지하역,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이
벽과 천장의 구석진 곳에 은밀히 흐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육체 없이 영혼만 타고 내리는 열차도 있을까?
요즘 들어 내 영혼보다 비대해진
몸뚱어리가 거추장스럽다
공복의 허전함으로 비롯된 심약한 생각의 끈을 자르고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충족되지 못한 뱃속의 허기처럼
보호구역 안에서도 늘 불안함을 느끼는,
206개의 뼈마디로는 지탱하기 힘든 지상의 무게가
선로 위에 앉은 빛 한줌까지 파르르 떨게 한다

 

희끗희끗 색이 바랜 벽화의 인물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승차구에 모여든다
어쩌다 땅 속까지 추방당한 아침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 시간들을 등에 지고,
깜깜한 터널 속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저 눈동자들
어두의 틈새로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동공이 환히 열린다
언젠가는 출구 없는 지하역에서 영원히 맴돌지라도
아직은 살아 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배용제          


 TV에서 본 <스타트랙>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 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은, 바람 같은, 짐승 같은, 로봇 같은 석탑 같은, 공룡 같은, 괴물 같 은...
검은 석실에 갇혀 바둥거린다, 나는 겁에 질린
영혼을 꺼내 짓이기면서 사나운 울음소리를 낸다
출구 없는 꿈을 벗어나려고
의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오, 꿈은 이토록 견고한 공포를 향해 나를 보냈던가
어쩌려고 내 생은 한동안 꿈의 의식을 건설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채 걷히지 않은 비명의 메아리를 토한다
나는 절망의 입자로 재결합된다
몸 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고 있다

 

2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 속 상상이 전송되고, 지친 희망들이 전송되고,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날마다 미래를 향하여 전송되고, 내가 가진 자그마 한 종교가 두려움 또는 가벼운 신앙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동아일보 가작
 부드러운 감옥/이경임
 
  아침, 너울거리는 햇살들을 끌어당겨 감옥을 짓는다. 아니 둥지라고 할까 아무래도 좋다 냄새도 뼈도 없는, 눈물도 창문도 매달려 있지 않은 부드러운 감옥을 나는 뜨개질한다 나는 높은 나무에 매달리는 정신의 모험이나 푸른 잎사귀를 찾아 먼 곳으로 몸이 허물도록 기어다니는 고행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잎새들의 춤이 바람이 불 때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잎새들은 우우 일어서며 하늘 속으로 팔을 뻗는다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의 모서리나 계곡의 풍경이 나를 밟고 걸어간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걸어나가고 싶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가로등 쪽으로 걸어간다 지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로등을 지나쳐 지하도 입구 속으로 사라진다 옆구리를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기어 나온다 거미의 그물을 뒤져본다 낡은 점자책이 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나의 뻣뻣한 손가락들이 닳아진 종이 위의 요철 무늬들을 더듬는다 몇 번을 솟아오르다 또 그만큼 곤두박질친 다음에야 희망이란 활자를 읽어낸다 문장들이 자꾸만 끊어진다 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조선일보 

 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박균수    

      

안에서는 도무지 날씨를 짐작할 수
없었다 창틀에는 평행한 세로줄 위에 하트 모양이 붙어 있는 쇠창살이
있었고 먼지들 안쪽에 난시의 창문이
자기 눈알의 크기만큼 위로 오르는 철계단을 사선으로 잘라
보여주었다 그것들 사이로 그을 수 있는 몇 개의 직선 위에 시신경을
올려놓고 우산이 지나가는지 살펴보았다 언제나
한 개의 형광등과 두 개의 백열등과 또 한 개의 할로겐 등을
같은 채널의 라디오와 함께 켜 놓았고 그것들은 밤새
흰색 벽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가내수공업으로 거미줄을 짰지만 감각은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에 있었다 아랫쪽에서 발목을 울리는
소리가 났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닥이 조금씩
높아졌다 천정에서 당황한 발자국이 자정의 정수리를
가로질러갔다 한달에 한번쯤 등이 구부정한 사내가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살충제라고 흰 마스크가
말했다 분무기를 짊어진 사내는 구둣발로 걸어들어와 후미진 곳 곳곳에
살색의 약을 뿌렸다 생각날 때마다
벤자민 화분에 반 컵의 수돗물을 주었다 그것은 천천히
어린 잎들부터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물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화분이
놓인 창틀은 내내 축축했고 그곳으로 잠깐 늦은 오후의 햇빛이
예리한 각도로 쓰러졌다 멀리 갔다온 날이면
썩는 냄새에 빨리 잠들었다 인기척에 깨어 나가보면
낯익은 벌레의 알들이 문가에 버려져 있었다  

 


■중앙일보

가작1)

안개바다/ 이성일          

1

바다 근처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이 마을의 집들이
유리창을 번뜩이며
바다를 보고 있다 서로
다르게 비어 있는 窓 창속에서
조금씩 바다가 증발하고
있다 불빛만이 가려진
커튼 사이로 안개를
흘릴뿐

 

 2

韓紙한지를 두드리며
누군가의 생을 拓本탁본하는 밤이면
그대가
너무 깊게 박고 간 내 가슴속
못 하나가 쉼표처럼, 그대의
죽음 밖으로 삐져나와
바다로 간다. 아직,
行間행간을 건너가 보지 못한 생각들이
몇 척 배로 찍혀 정박해 있는
바다. 안개 속이다
고동에서 고동으로
生생을 탁본하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만
바다를 떠다닌다. 난파선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바다를 끌고 와
고동, 그 빈 먹통 속으로 확,
죽음을 펼쳐 보이는 안개. 멀리서

 

안개 경보 울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로 풀어진 자들의 신음,  

 

 

가작2)

가족일기/이용규

 

발가락이 가려웠다. 노을 밑으로 낙엽들이

서둘러 떨어질 때, 국문학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들이

허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밟아 보았다.

길은 덜 자란 마늘밭 하나 건너지 못하고 내려갔고, 그날 밤

법성포로 떠난 아버지의 굵은 손끝에 매달린 굴비 한 두름

짜게 절려두겠지. 밥그릇 속에 들어가 있는

쉰 밥풀 같은 하루, 밑으로 가볍게 뿌리를 내리고

여기저기 유채꽃같이 찾아가는 봄.

풀어지겠지, 개울에 갇힌 은어 몇 마리쯤.

 

언덕부터 고추꽃들이 매운 바람으로 불고, 아직 덜 꺼낸

유품 같은 우물을 팟다. 그날 돌아가신 할머니 팔까지 올라오던

물결, 씻고 헹구는 나의 발자국 멀리 흘러갔다.

자취방은 어머니 근심이 기어나오던 그날 같은 배고픔.

신문배달을 했다. 셔터 밑으로 자꾸만 쑤셔넣던 체첸 반군들.

군에 입대한 형으로부터 엽서가 오고

가지런히 기댄 등교길이 즐거웠다.

일몰은 눈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들은 하나씩의 풍경들을

들고 들어가 굼을 만들고, 검 십는 낙엽을 밟으며

술집 누이가 들어왔다. 그날 밤,

기도의 형식으로 버려진 수난들이 일기장 속에 접혀 들어갔고,

이유를 몰랐다.

신발을 신지 않은 개들이 고향을 향해 떳떳하게 짖어대고

기쁜 꽃들로 나가 계절을 바굴 수 있는 이유를.

세월은 넘지 못하는 것일까. 누이의 이마 하나,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한국일보

  夜警야경/이대의 

         

자정이 넘은 밤길.
눈발은 그치고
마실꾼들 이야기를 밝히는 불빛은
차가운 바람을 달랜다.
불꺼진 방에, 사람은
잠들었을까
조용하다.
개짖는 소리도 잠 못드는 이 밤
우리들은, 마실방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남겨두고
야경을 돈다.
북을 두드리며 마을을 돈다. 

 


■매일신문  

의자. 계단.창문/ 김현옥  

        

낡고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그녀는 창 밖을 건너다보며
태양의 느린 걸음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지겨워, 라는 중얼거림이
하루종일 구름 몇 송이로 떠다녔다
암수 붙어 해롱대며 날아가는 잠자리들이
엑스트라처럼 그녀의 창문을 지나갔다
은빛 날개 번쩍이며 하늘의 전령사라도 되는 듯
비행기 한 대가 바쁘게 비명 내지르며 달려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은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떠나가는 뒷모습처럼
하늘 깊숙이 점점이 침몰해 갔다
모든 것들, 그렇게 아무 일 아닌 듯 그녀의 창문을 다녀갔지만
그녀의 창문 같은 수많은 창문들을 지나 발랄하게 제 갈 길 떠나겠지만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할 키 큰 나무 한 그루,
사랑이란… 그 끔찍하게 지겨운 기다림?

 

지겹고도 지겹게 그녀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마치 못박혀 있는 듯, 정물처럼
어쩔 수 없이!
키 큰 나무,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 줄 때까지

 

<내 몸 속의 무수한 계단들, 하늘이 날 부르면
난 매일 휘파람 불며 그 계단들 오르며 내 얼굴을 버리지
내 몸의 창문들, 그 수만 개의 이파리들 활짝 열면
바람과 햇빛들 놀러와 나를 투명하게 반짝여대지>  

 

■부산일보  

먼 집/ 손순미      

    

 문 밖엔 늦은 저녁이 서 있다 폐타이어가 엮어진 지붕 위 설익은 꿈이 자주 바람에 들춰져 도 마음들은 꼭꼭 여미고 산다 가파른 골목을 밀고 온 지친 눈들 불빛을 당기고 부엌으로 들어간 식욕은 세간을 달그락거린다 시렁 위엔 칸칸이 달빛이 포개져 있고 간고등어 한 마 리 온 식구들을 구워낸다 오순도순 둘러앉은 눈빛들 한 그릇씩 비워내는 얘기에 아랫목 온 기가 올라온다 식구들 한 이불의 별빛을 덮고 자면 어둠이 풀풀 새어나오는 집집이 몇 채의 꿈을 꾼다
 신발들 저희끼리 내일을 쓰윽 신어본다 

 

 

■세계일보   

  정동진 역 /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직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들 내려놓고
가끔 두 칸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 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줏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강원일보

 길에서 길까지/ 최금진   

       

자동차에 오르자 곧 내 숨통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푹신한 의자와 안전벨트의 포옹 속에서
부디 즐거울 수 있기를 내 여행에 시동을 걸며 나직이 중얼거리면
벌써 나는 행복해진다
창 밖으론 흥겹게 눈이 내리고 있고
사람들 또르르 미끄러져 백미러 뒤로 사라지는
거리는 돌아가는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추억을 상영한다

 

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너무 어렸거나 너무 몰랐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중에는 눈처럼 맑은 음으로 나를 허물고 지나간
내 인생의 곧은 발자취가 되어준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라디오에서 듣는 흘러간 노래의 리듬처럼 익숙하지만 더러는 잊혀진
그러나 삶의 창가에 문득문득 하얗고 깨끗한 성에처럼 어리는
그들을 통해서 나는 부드러운 커브의 곡선처럼 완만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제 나는 급제동을 걸지 않고도 그 옛날의 자리에 멈추어 서서
지금의 내 속도를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삶의 이유를 안다

 

길은 금방 미끄러워져 세상은 느린 춤곡으로 움직이고 있고
쌓인 눈 속에서 투명한 얼음의 눈이 내다보고 있을 세상엔
길 위에서 만나는 얼굴 익은 사람들 깔깔깔 엉덩방아 찧는 사람들의
풍경들이 한 화면에 슬로로 천천히 지나가고 약속이나 한 듯
길 위의 발자국들이 어깨동무로 하나 둘씩 일어나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저렇게 이웃처럼 살다가 가야 할 곳 거리에서
힐끗 돌아본 그들 속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아예 핸드브레이크를 당겨놓고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나는 노래한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인생에 도달할 수 있기를  

 

 


■경향신문

외출/ 김창진  

        

이른 봄, 나는 외출을 하였다
겨울에 익숙한 외투로
아직 한쪽은 겨울로 남은 몸을 감추고
봄길로 나서면 봄햇살에
콘크리트 벽돌도 금세 싹을 틔울 것만 같다.
내 몸의 어디에서도 살갗을 뚫고 무엇인가 돋는 듯하다.
길가엔 동시상영 포스터와 선거 벽보들이
나란히 봄볕을 피해 긴 담을 따라
월장을 한참 준비중이다
신축성 없는 마분지 같은 얼굴들이
고민 끝에 모조하는 근엄한 미소들은
깨알 같은 자신의 약력 밑에 한 줄의 그것들을 더하기 위해
이 낯선 곳으로 애마부인 7과 외유를 나왔다.
난 그 앞에서 문맹이 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귀중하다는 나의 한 표 행사를 고민해야 할 걱정에 싸였다가
딴전 피듯 파란 하늘을 본다.

 

봄볕을 받고
개나리와 아지랑이가 출마를 하였으면
노랑나비가 빨리 봄을 노래하였으면
나도 아직 일부가 차가운 몸을 안고 봄으로 간다.
봄이 공천하는 많은 새 생명이 돋는 곳으로
나는 외출을 한다.
봄날은 우리에게 공약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햇살을. 


■전남일보

 예당기행 /이수인   

       

기차에 오르며
멀리 흰 종이꽃 눈물처럼 달고 가는
아침 상여를 보았다.
아직 길 떠나기에는 이른 새벽,
서둘러 길으 f나선 저 서운 생애는
또 무엇이 되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강물처럼 출렁이는 기차,
기차처럼 흔들리는 강물에
늦가을 마른 풀잎 같은 나를 싣고 예당 가는 길
남평, 앵남, 증주 그리고 삭정, 이양 …
들꽃 이름을 닳은 마을들을 스쳐
덩치 큰 미루나무 줄지어 선 보성을 지나
예당에 이르면
빗장 풀린 그리움들 확 쏟아져
흐린 안개되어 길을 막는다.

기차는
철길을 놓으며 떠나고
말없이 먼 길 따라오던 산맥들 바라보며
나는 문득,
산 같고 강물 같던 그 사내,
찔레꽃처럼 수줍고 아린
스무살 어귀의 내 첫사랑을 생각했다
그리움은 언제나
제 가슴 태우며 번지는 들불처럼
먼 길 떠나와 이젠 아득해져 버린 벌판 위에
나를 혼자 세워두곤 하고,
키 작은 옥수수밭 지나
찬찬히 길 내어주며 이루는 숲 위로
소쩍새며 뻐꾸기들
손풍금 소리처럼 쓸쓸하게 울며 날아가는데,
지독한 안개로도 다 지우지 못한 지나간 시간들
나는 작은 배에 실어 떠나보낸다.  

 


■경인일보   

    하역에 대하여 / 윤요성

          

하필 그 일쯤으로 생각하는 어드렛일감에 패를 건다
끈으로 봉해진 속내까지 감이 잡힐 나이에도
정한 시간에 닿기 위해선 피 말리나 오히려 호기롭다
욕망의 길이가 넓이로 그런 삶의 부피가 무게로
나름의 요령으로 환산되던 방편들
이름 석 자가 이씨 김씨로 끝내는 이봐 저봐로
악수하고 ᄐ옹서명 나누며 행선지별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얼얼하도록 후회의 지문처럼 남아
짐 부린 후의 배처럼 생생하다
실어놓기만 하면 제 갈길 알아 떠나는 짐짝처럼
고삐 풀린 가슴에
기항지가 풋풋한 바람으로 떠돌기라도 하면
일이 밴 손마저 늘상 대함에 낯설게 하듯
세상 사는 거 별건가, 딴 곳이라고 이만 못할까 싶으다가도
다시금 몸푸는 일이 사려질 때 있다  

 



■광주일보

호롱불을 켜고/ 이현옥   

       

 유황냄새 실 같은 연기를 따라 피어오르는 성냥개비 푸르스름한 등잔 밑에 내려놓습니다 우물가에선 아버지의 물 푸는 소리 허름한 부엌의 무쇠솥 여닫는 소리 뒤이어 들리고 방문 밖 내 고무신에는 벌써 어둠이 가득 고여 잇습니다 토방 아래에선 작은 별 두서넛이 내려와 놀 고 아버지는 땀내 나는 잠방이 탈탈 털어 들며 허리 쭉 펴고 긴 숨 뱉어내는 하루를 감나무 에 겁니다 물 담긴 흰 고무신 벗는 기척에 방문을 열면 저수지 건너 마을에서 대답처럼 켜 지는 호롱불빛 아궁이 펄펄 끓도록 타던 생솔가지는 몇 알 묻어놓은 고구마 위로 사위고 심 지 돋운 가을 저녁 창호지 바른 문 위로 아른거립니다 그러면 바람이 살그머니 마실 나오는 고샅길로 가만가만 무릎걸음으로 다가앉는 산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다시 호롱 등잔을 사서 형광등 아래 동그랗게 앉혀놓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먼 길 밖에서 가슴에 호롱불을 켜고 가까이 다가오는 산... 

 

 

■ 국제신문

 방패연/ 윤 혁  

        

내 갈비뼈가 다듬어질 때부터
나는 한낱 광대로 운명지어졌다
남사당 같은 분장을 하고
하늘에다 광댓줄을 걸쳐서
신명나게 줄타기를 시켰다
바람이 곱지 않게 부는 날
힘겹게 전신을 비틀면
구경꾼들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나는 두려움 하나 없이
익숙하게 하늘을 잡아당겼다
무든 내려다보면 관객이 빈 초가와
용이 되려는 샛강의 몸부림이 보였다
샛강의 거뭇한 피부는 굳어 있고
허공에서 외줄을 타는 질긴 순간
텅 빈 가슴은 시리기만 하였다
매서운 북풍이 몰아칠 때는
둥글게 뚫린 구멍으로
하염없이 잡념을 쏟아 버려라
호통치는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와
매를 휘두르는 모습에 겁을 먹었다
끝없는 하늘을 나느 새가 되는 등판 위에
묵인 생명줄이 나의 나태함을 일깨워주었다
가슴이 없는 삶으로 치솟다가
아득히 북 치는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으면
긴 그림자로 하늘을 우러르면
이무기가 된 버드나무 가지에 걸린
슬픈 친구들의 잔해가 보였다
나는 한사코 앙칼진 대추나무 손끝을 비켜가면서
바람이 부는 먼 나라를 갈망하였다.  

 

 

■대전일보

  맨 가장자리의 중심/ 김강조          


훌륭한 비유 다 놔두고
당당하게 직선적으로 말하는 점성술의 그 별들
쏟아져 흩어져
내려와 박혀
언 땅 위가 죄다
중심의 기쁨으로 들떠

소설(小雪)날 잔디밭
그 맨 가장자리의 개나리
노오랗게

피워, 수줍어서 활짝
얼어 시들어져 꽃잎 떨어져
이 시각 명운(命運)들의 중심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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