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불교 신문]
(강 / 이주렴)
1
깊이 흐를수록 뜨거워진다는 건 돌아올 메아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건 열매들이 익어가는 소리이거나
팽창하는 하늘의 속삭임일지도 몰라요 갈대가 맨발로
웅숭그린 강가에서 당신을 떠나 보내고 물수제비를 뜨며
단발간격으로 수면 흔들어 놓는 납작 돌멩이의 몸부림이
낯설지 않은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저 돌멩이의 마지막
흔적이 바닥을 울리는 순간 찡한 뜨거움으로 녹아
흐르겠지요
2
맨 처음 당신을 찾아 나섰던 그 자리 거기 나는 꼼짝없이
발묶여 있는데요 깊게 흐를수록 멀어지는 당신을, 아득한
바닥에서 푸른 피 흘리며 나는 다슬기처럼 시큼해지는데요
뜨겁다니요 시리디시린 혈관 껴안아 주는 건 피붙이같이
뿌리 얽힌 갈대 뿐이었어요
3
어쩌면 물구덩인 듯 보여요 깊어지라 한 마디를 水深(수심)만큼
던지고 뗏목 따라 떠난 당신을 돌아올 거라 손꼽는 망부석
하나가.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먼 나루 하나 남겨
놓고 떠났는데요 혹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수증기나 구름
혹은 비가 되어 당신이 깊게 박아놓은 혈관의 뿌리를
뜨겁게 헹궈주리라 믿는데요
[2003년 세계일보]
(신발論(론) / 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2003년[매일신문]
(낙타 / 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2003년[전북일보]
(왕오천축국전 / 장창영)
지금도 무릎이 시큰거리느냐
천 삼백 년이면 불심 강한 이도 한 수 접고 가는 길
어쩌면 너도 천축(天竺)서 관절 꺾고
절 마당 목욕탕인냥 푸욱 담그고 싶었겠지
북녘땅 접어들 때엔 미처 예측 못했겠지
살아 있는 부처 만나기 위해 떠났던 기약 없는 길이었기에
다들 흑백사진 속 표정 없는 얼굴과
써금써금 해진 활자 이야기로만 기억하지만
너만은 또렷이 알고 있지
총령(蔥嶺) 거쳐 오대산 한 달음에 달려오던 발길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지
중국 공안에 쫓기던 어린 눈동자
고향이 함흥이랬지
단속 피해 신발만 챙겨든 채
훈춘 화룡 거치면서 몸은 숨 죽이는 일에
더 빨리 익숙해졌다지
장춘행 기차에서
매운 기침으로 쏟아지며 안겼을 때
네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지
부처님 진신사리 접했을 때보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변변히 옷가지도 못 챙기고
도문 국경* 저편에서 물끄러미
강 이쪽으로 씁쓸히 시선만 던지던 아우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안으로
성큼, 건너 설 때는 언제인가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부처 때문인가, 꽃제비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무심한 우리 때문인가
오늘도 목숨을 승인 받기 위해
연변, 길림, 용정으로 떠돌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혜초, 내 어린 아우여!
2003년 경인일보
(타관에서 / 박세인)
몇 번이고 물어서 갔다
저물 무렵 차는 늦게 도착했다
강원도 옥수수 술을 마셨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
무너진 탄촌 바라보며 저문 강물소리 들었다
여행지에서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 생각의 끝에 늘 두고온 사람들 있었다
추억은 잊어버리려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진장 쏟아지는 저 청천 하늘
별 속에도 그 사람 있었다
토방에서 중늙은이 몇 화투를 치고
나는 낮게 엎드려
두고 온 도시와 지난 생을 생각하였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가끔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
검은 밤이 길고 길었다
강물 거센 물살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 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래도 삶이란 살아 볼만한 것이다'
그곳을 나올 때 한 번 더 보았다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 / 천수호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올린 비린내 묻은 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 / 김병호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은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
2003년 전남일보 | |
(함평 병어젓) / 박옥영 1 이 새 저 새 해도 먹새가 으뜸이라 고흥 진석화 낙월도 백하 영암 모치젓 강진 꼴두기 함평 병어젓 푸욱푹 삭아 짭잘하게 간이 들어도 바다를 끼고 사는 제 어미 품속에 자라서 입맛이 다 다른 법이라 2 오늘이 벌써 칠일이니 설장이 서겠네 한창 병어젓, 엽삭젓 맛이 들겠네 칼칼한 겨울비 내리는 장터 해 지기 전부터 장작불 지필 것이네 평생 보따리 챙겨들고 살아 더러 모나고 휘어졌지만 억척스레 살아남은 얼굴들 온 나절 선짓국 설설 끓다 병어젓 한 쪽지에 간 맞추며 훌훌 막걸리 들이켜 불을 쬘 것이네 파장한 시장 모퉁이 구구절절 마지막까지 지키고 서서 수더분한 손매로 몇 십 번 손을 잡았을 온갓 자식자랑 늘어놓는 목숨들 아,설 대목 바쁜 틈에도 짭짤한 겨울비 내리고 장바닥 여기저기 펴 놓은 장국냄새 아직 그리움 버리지 않았을 게고 오랜 근심에 삭아 골골한 할머니 무릎 앞 비좁은 틈새로 꾸역꾸역 파고 들어와 갖은 흥정에도 저렇듯 넉살좋은 병어새끼들 아직 싱싱하니 설 밑천이 되겠네 철퍼덕 앉은 병어 몇 마리 인사성 밝은 뉘 집 새끼 만나자 도톰한 손바닥들 탁탁 치며 금방이라도 팔딱 뛰어오를 듯 뛰어오를 듯 3 비 오는 함평장터 입심 좋게 타던 장작은 삭아들수록 옹골찬 불담이 되고 함평 병어젓은 뼈마디 살점 하나 하나 푸욱푹 삭아야 제 맛이지 겨울엔 더러 비가 내려야 제 맛이지 2003년 한국일보 (삐비 꽃이 아주 피기 전에) / 김일영햇빛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 |
(두실역 일번 출입구) / 최정란 퇴근길,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맥도날드 불빛을 등지고 일 톤 트럭 한 대가 가파른 작은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아래 손짓으로만 말하는 두 사람 이마에 맺힌 근심을 닦으며 말을 굽는다 말과 말 사이, 사이 숨을 고르는 손으로 꽃 모양 틀에 묽게 풀린 소리의 반죽을 붓고 그 위에 잘 발효된 침묵을 한 줌 얹자 설익은 말들이 숨을 죽이고 돌아눕는다 반죽 묻은 손으로 간을 맞추고 삐걱거리는 관절의 안부를 묻는 동안 젖은 말들 불의 온기를 들이마시고 완숙의 음절로 한껏 부풀어올라 두꺼워지는 어둠을 몇 걸음 뒤로 밀어낸다 종이봉지 안에서는 단골이라고 한 마디 더 얹어준 덤의 말 속에 든 말없음표까지 골고루 뜸이 들고 보드랍게 말랑거리는 말을 받아든 나는 목에 걸린 고등어 가시 같은 누추한 설움에 목 메인 일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무성한 차가운 말들이 파놓은 캄캄한 지하도 같은 숨은 함정들을 용서한다 오늘도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농아 부부 소리 없이 따뜻한 느낌표 같은 붕어빵을 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