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신춘문예 ■동아일보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 문학 이야기 2010.12.25
89신춘문예 ■한국일보 꼽추/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문학 이야기 2010.12.25
87신춘문예 ■중앙일보 봉함엽서/이상희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 문학 이야기 2010.12.25
86신춘문예 ■중앙일보 겨울 手話/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 문학 이야기 2010.12.25
85신춘문예 ■동아일보 안개 /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 문학 이야기 2010.12.25
84신춘문예 ■동아일보 서울로 가는 全琫準/안도현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 문학 이야기 2010.12.25
82신춘문예 ■대구매일신문 박기영/사수의 잠 그날, 어둠 쌓인 슬픔 속에서 내가 버린 화살들이 어떤 자세로 풀밭 위에 누워 있는지 모르더라도 나는 기억해내고 싶다. 빗방울이 모래 위에 짓는 둥근 집 속으로 생각이 젖어 들어가면 말라빠진 몸보다 먼저 마음이 아파오고, 머리 풀고 나무 위에 잠이 든 새들이 .. 문학 이야기 2010.12.25
81신춘문예 ■중앙일보 沙平驛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待合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流璃窓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콥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內面 깊숙이 할 말들.. 문학 이야기 2010.12.25
80 신춘문예 ■동아일보 유년 시절/하재봉 江 마을 외사촌 형의 새총을 훔쳐 들고 젖어있는 새벽강의 머리맡을 돌아 갈대숲에 몸을 숨길 때, 떼서리로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개 끝에서 물보라처럼 피어나는 그대, 무지개를 보았나요? 일곱 개 빛의 미끄럼틀을 타고 새알 주으러 쏘다니던 강안(江岸)에서 무수히 .. 문학 이야기 2010.12.25
78 신춘문예 ■서울신문 새벽 두시/신석진 새벽 두 시를 지나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시간은 방안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내가 버린 언어들이 다시 살아나서 나의 정신을 배반하고 이 고요한 밤을 배반한다. 간혹 저 별빛이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르지만 나는 별빛의 이름을 부를 수 .. 문학 이야기 201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