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06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2:03

 

200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십이월의 교차로 / 한인숙


상여를 보낸다
초겨울. 언 슬픔이 기억의 행렬을 짓고 있다
한 세월 이정표도 없는 길
소리꾼의 요령소리가 산역으로 향하는 몇 구비 능선을 넘어서고
흑백의 한 생이 울음에 섞인다
상여꾼의 후렴소리를 더듬던 누군가
알 수 없는 기억에 찔린 듯 추위 한 자락을 움켜쥐고
한동안은 눈물도 상처도 없는 길이
북망의 깊이를 더듬적거린다

슬픔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노잣돈을 뒤척이는 햇빛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도
교차로를 통과시키고서야 안식의 길로 접어들 것이고
인연들 또한 죽음을 통과하고서야 눈물의 깊이를 알 것이다

졸고 있던 새 한마리
꽃상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움찔. 날아오른다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해발 680m의 굴뚝새 / 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 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산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m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 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금이 간 거울 / 정용화


얼어있던 호수에 금이 갔다
그 틈새로 햇빛이 기웃거리자
은비늘 하나가 반짝 빛났다
그동안 얼음 속에서
은어 한 마리 살고 있었나보다

어둠에 익숙해진 지느러미
출구를 찾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 속을 헤엄친다
넓게 퍼져 가는 물무늬
한순간 세상이 출렁거린다

질긴 가죽도 없이
깊고 넓은 어둠 속에서
너를 지켜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픔 속에서 반짝임이 나온다
반짝이는 모든 것은
오랜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

금이 간다는 것은
또다는 세상으로의 통로다
깊이 잠들어 있는 호수 속에서
물살을 헤치고 길이 꿈틀거린다

 

 


200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 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200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이방인의 뜰 - 바다는 멀다 / 임해원


어둑 새벽
바다의 낙조가 억새들 꺾인 무릎에 얹힌다
풀씨 같은 초저녁별을 품은 거기
눈이 부셨으나
바닷가에 사는 시인은 늘 바다가 부족하다
바다가 멀리 달아났기에
하늘을 허물어 그리로 흘려 보낸다
새떼들이 날갯짓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시간은 소멸 쪽으로 다가가고
사랑이라는 것조차
무너지는 허당을 어찌하지 못한다

떠나보내야 할 사람들 발을 묶은 섬의 한 끝씩
몸에 갇혀있던 어둠은 물음표를 세운다
주지 않았음에도 받아버린 상처 때문인가
물 위에 뜬 얼굴
괄호에 갇혀 뭉개진다
젊음의 거의를 소진하고도
설명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말없음이 살가워지는 만큼만 세상을 이해하겠다며
어쩌다 늦게 피어난 흰 꽃에 어둠이 앉아
뜰 가득 바다가 출렁이는
하늘은 마침 밀물 때였다.


 


200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바람 들어 좋은 날 / 김광희


도마 위에 퍼덕이는 순풍씨는요 한 마리 바다여
입이 댓 발 나온 분녀가 단칼에 기절시키고
바닥만 긴 미주구리* 아랫도릴 올려쳤거든요
성난 파도로 일어서던 비늘이
날 무딘 칼날에 힘없이 쓰러지데요
두터운 파고를 한 숨에 쓰윽 떠냈어요
대추씨 만한 부레
저렇게 작은 꿈 가지고 태양 향해 펄떡였던가 봐요
물컹한 가문에 뼈대라도 세우려는지
발라낸 뼈에서 활시위처럼 탱탱한 시간이 꽉 찼어요
가실 삼켰던지 살 속 깊이 박혔네요
바람 부는 데로 출렁였던 것은 고통의 몸부림이었던가
천 날 만 날 바람 들락였을 허파는 다 녹아 없어지고
참빗 같은 아가미에 그 바람 걸렀던 것 같아요
어딜 쏘다녔던지 얼룩진 상처 비릿한데
바다 깊은 심장 속에서 헤엄치는 분녀
꼬들꼬들 바다를 씹는 달디단 성찬 차려
황홀한 순풍씨, 쇠주 한 잔 받으셔

 

*미주구리: 물가자미의 경상도 사투리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서울목공소 / 양해기


굵은 팔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해 나무 아래에 파묻은 딸 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겁질이 떨어져 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테를 차례로 안아 낸다 얇은 나무 판자에 땅-땅 못총을 쏘아대는 사내의 얼굴이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땀은 가장 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 다닌다. 갈래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 아이가 뛰어 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엮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바뀐 신발 /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200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불가리아 여인 / 이윤설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같아서 뼈째 씹어야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200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우주물고기 / 강경보


미래과학그림展에서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200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봉제동 삽화 / 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2006년 국제일보 신춘문예 시

 

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2006 호남투데이 신춘문예 시

 

라면을 끓이며/ 유우현


노란 남비에 태양의 창자를 삼는다.
물이 연기 내며 타오를 때
삐딱한 오리 알 깨서 넣으면
더운 아내 쉰 김치가 되고
아이들은 고춧가루 되어 선다.
울타리에 양심을 버리는 이웃 백인
굵은 털 쭈뼛 쏟은 다리
굵은 파되어 송송 끓고
그 아내는 찹스틱 들고 부엌 벽을 밀고 온다.

라면이 다 익었다
배추 생절이는 언제부터 삼각관계였을까
수십 개의 검은 눈 달린 노란 단무지 먹을 때마다
보호소에서 불려 다닌 보리밥과 소금기 시퍼런
단무지를 토해내고
조사실 창문에 갇혀있는 별들이 불상하고
수갑 차고 있는 나무들도 불상해서
굵어지는 면발에 원을 긋고 앉자
안간힘에 허공을 기어오르는
냄새를 보며 하나님께 묵념을 올린다.
올해는 제발요,
퍼져버린 라면이라도 편안히 먹게 해 달라고

** 찹스틱 : 젓가락
** 남비: 냄비 사투리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북어 / 기명숙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꽁치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200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눈발 날리는 마당 / 김운영


눈발 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으면요
마른 저녁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데요
발목 잃어버린 눈발은요
땅에 닿지도 못하구요
약한 한숨처럼 담벼락 위
아버지의 여윈 어깨 위
에도 말이지요 관절
절룩거리면서 아버지 뒤란으로
가시더니요 불쏘시개 송구나무
가마솥 물 끓이는데요
등겨같은 닭털이 공중에
몇 날아다녔나요?
오래오래 눈발이 아버지
빈 어깨에 배꽃처럼 쌓이면요
오래오래 가마솥 연기
마음의 暴政(장작불) 몸 밖으로
서서히 증발되고 있으면요
아버지 사발에 담아
안방에 어머니에게요
아버지 붉은 동맥 모세혈관 풀어
어머니에게 비는
견고한 용서
닭백숙의 용서를 말이지요
살과 뼈 허물어지는 解産처럼
맑은 국물 눈물 말이지요
어머니가 밤새 소리없이
우시는 날에는요 다음날
말없는 닭백숙 한 그릇
눈발 날리는 마당에서 말이지요.

 

 


200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개성집 / 김명희

 

내 유년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눈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둘러댈 붉은 변명들을
입 안 한 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도.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 가볍게 스치었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200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개기월식 / 곽은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k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콘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 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 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레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200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가작)

 

여행, 스무살의 열차 / 이병철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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