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신춘문예 중앙일보 거미/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술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문학 이야기 2010.12.25
99신춘문예 경향신문 풀과 함께/이승희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얼니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 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씨앗 Ⅰ 꽃이 피거나 열매 .. 문학 이야기 2010.12.25
98신춘문예 매일신문 공터에서 찾다 / 문채인 공터에서 페트병을 물어뜯는 개를 본다 나의 턱배가 얼얼해짐을 느끼는 저녁 뭐 이렇게 질긴 고기가 다 있을까 좀체 속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뭉스런 애인 같다 어딘가에 분명 뼈를 감추고 있을 거야 고기의 진미 희망의 정수 아아, 뼈다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란 .. 문학 이야기 2010.12.25
97신춘문예 ■서울신문 폐차장 근처/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어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 문학 이야기 2010.12.25
96신춘문예 ■중앙일보 퓨즈가 나간 숲/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 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문학 이야기 2010.12.25
95신춘문예 ■서울신문 전망좋은 방 /장경복 눈을 뜨는 일도 밖을 살피는 일이다 자전거가 내리막에서 급하게 길을 긋거나 아이들의 고무줄놀이가 이곳까지 합창을 날려도 하늘이 가까워 위를 본다, 머리 위엔 길거리만큼 복잡한 햇살의 골목이 있다 떨어진 나뭇잎이 새로 난 신작로를 알려준다 그 도로.. 문학 이야기 2010.12.25
94신춘문예 ■세계일보 세숫대야론/김호균 세숫대야를 보면 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를 하고 비누거품으로 가득찬 물을 버리면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투로 그려진 세선의 물결 무늬 물 속의 네 육신이 흔들리고 어푸어푸 물먹은 네 육신이 흔들리다 멈추어 섰을 때 지나온 내 꿈보따리를 뒤적이다 .. 문학 이야기 2010.12.25
93신춘문예 ■ 동아일보 혈거시대 / 이정록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 문학 이야기 2010.12.25
92신춘문예 조선일보 남행시초 1/ 김수영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 문학 이야기 2010.12.25
91신춘문예 ■경향신문 황야의 정거장 /서규정 - 복지국가로 가는 차표를 어디서 팔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잔털 털 보숭보숭한 여공 하나 데리고 떠나고 싶어 앵두꽃 피는 시절 기쁨과 슬픔마저도 탕감하는 저 반달 달빛이 스며드는 기숙사에서 앞장 뜯어진 노동자 천국을 읽으며 뒷장을 다 넘긴 줄도 모르고 .. 문학 이야기 201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