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09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12:06

 

    
    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압 / 이병승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옥상 바닥 
    시원한 물을 뿌려주려고 
    잠가 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거침없이 몸을 흔드는 고무호스 
    긴 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시뻘건 각혈과 마른기침이 노래로 변하고 
    늘어졌던 마음의 통로에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른다 
    사방에 뿌려대는 열정의 땀방울들 
    더 이상 짓눌린 눈물이 아니다 
    무지개를 띄워라 거침없이 신나는 춤사위 
    꼼짝 말라고 두 발로 밟아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딴딴해지는 오기의 몸짓 
    그 정도 힘으론 날 못 누르지 
    흐물흐물 늘어진 생은 끝났다는 저 팽창의 힘 
    자기를 채워 흘러넘치는 나눔의 통로 
    채워라, 터질 듯이 채워라 
    내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려 솟구쳐 
    신명나게 춤추는 고무호스 
    건너 집 옥상 화단, 벽에 매달린 넝쿨까지 살리고 
    스스로 뜨거워 목마른 해도 적신다. 
    2009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시 당선작 
    술빵 냄새의 시간 / 김 은 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200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200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글에서 온 풍경 / 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떼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람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이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날들은 불안한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알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싸
    그 옛날 그 땅에 고엽제를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의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기어 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힘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200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담쟁이 넝쿨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200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童話) / 정원 
    봄은 아이들 시린 손끝에서 왔다
    골목 안은,
    어김없이 가위질 소리로 짤랑거리고
    덩달아 온 세상 흰 밥풀꽃 가득한 뻥튀기 소리 
    와아, 골목 안 가득 풀려나오면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이 되는 아이들
    달그락달그락 알사탕 같은 꿈들은 호주머니 속 숨겨둔
    꽃망울처럼
    시린 바람 끝에서도 붉었다
    햇살에 투영되는 꽃무늬, 유리알 속엔
    알록달록 봄을 틔우는 화원(花園)이 열리고
    동네 골목골목 안은 그 화음에
    구슬 같은 아이들의 눈빛으로 가득 채워지곤 했다
    냄비, 헌 세숫대야, 그렇게 찌글찌글한 “찌글이” 아저씨는
    아이들 입에서 동실동실 허연 엿가루의 봄날을 띄우고
    봄바람에 갈라 터진 손등, 닳아빠진 소매 깃엔
    이따금 춘삼월을 어루는 흰 조팝꽃 같은
    이른 봄빛이 마구 피어오르곤 했다
    골목 길, 
    아이들 하나 둘 길 위에 비워지고
    전등불 스윽 노란 개나리꽃 한 다발 피워낼 즈음
    봄날은 그렇게 장난기 많은 얼굴로
    아이들의 긴 그림자 꼬리를 물고 서 있곤 했었다.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피쉬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냄비 속의 여자 / 강성남
    1 
    화기를 가하는 건 늘 내부 쪽이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불은 두꺼운 바닥을 투과하여
    이마까지 달군다
    속이 비치는 뚜껑
    꽃망울처럼 부푼 목젖과
    허파 밑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보인다
    방울토마토 같은 
    레몬 같은
    타이레놀 같은
    둥근 시간들이 그녀 안을 떠다닌다
    정작 그녀 자신은
    제 속을 볼 수 없어 바닥을 새까맣게 태울 때가 많다
    2
    바닥이 다층인 그녀
    확 끓어올랐다 파르르 식어버리는 성깔이 아니다
    급작스런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함부로 열을 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쪽 창으로 들어온 날 선 빛 한줄기
    옆구리에 박힌다
    빛 날에 긁힌 기억 속으로
    두레박줄을 풀어 내린다
    햇살과 바람으로 파도치던 시간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달콤한 시럽약 맛
    쓰디쓴 가루약 맛
    통증의 맛을 구분하는, 목구멍 씁쓸한 그녀
    하얗게 불린 침묵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열에 들뜬 이마 점점 달아오르고
    뿌옇게 흐려진 안부, 끓기 시작한다
    내장 뜨거운 짐승이 푸른 눈을 뜬다 
    [200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진열장의 내력 / 임경섭 
    누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아침, 샴푸 통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졸음 있는 힘껏 짜낸 
    김 대리는 네모반듯하게 건물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마다 김 대리의 자리는 한 블록씩 깊어진다 
    아래층 이 과장은 한 박스 서류뭉치로 처분되었다지 
    누군가 음료수를 뽑아 마실 때마다 덜컹 내려앉는 일과, 
    버려질 것을 아는 이들도 사방으로 설계된 빌딩 속으로 
    차례대로 몸을 누인다 
    모든 가계의 비밀은 진열장에 숨어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녀야 할 것들을 가득 담아 놓은 과일바구니 
    모인 것들은 축축한 바닥에 한 번 튕겨보지도 못하고 
    뿌연 먼지로 내려지는 셔터를 기다려 
    어둠 속으로 무른 멍 자국을 감춘다 
    바닥에 떨어지거나 모서리에 부딪쳐 생긴 것보다 
    서로에게 짓이겨 생긴 멍 자국에서 과일은 
    더 지독한 향기를 뿜는다 
    곪은 사람들로 붐비는 퇴근길은 진한 매연 냄새를 풍기고 
    김 대리는 살구를 고른다 먼지 닦아가며 고르다가 떨어뜨린 
    살구 한 알 탱탱하게 굴러가는 것을 본다 
    짓무르지 않는 것들은 저렇게 꿋꿋이 굴러다니는데 
    쌓여 있어 한 쪽으로 절뚝이는 것들아 
    살구를 주우러 가는 김 대리의 발자국에 통증처럼 
    저녁이 배고 높은 허공으로 신음처럼 새가 난다 
    곧지도 않고 함부로 꺾이지도 않는 길을 가는 새의 둥근 비행 
    그 아래서 김 대리는 둥글게 몸을 말아 살구를 줍는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증명사진 / 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2010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뼈의 기원 / 안병호
    문득, 뼈가 시려오면 
    내 뼈의 아득한 시원을 찾아 
    눈과 바람의 길을 걸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이 
    대체로 나의 문명이지만 
    그것은 비석에 판각되거나 정의되어진 것만이 아닌
    단단한 그 무엇이 내 속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말 속에도 뼈가 있다하고 
    문중의 아재 한 분은 
    바람조차 투명한 뼈를 지니고 있다하므로 
    뼈는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모든 족속은 그 조상으로부터 
    몇 개의 맑고 흰 뼈를 물려받아 사는 동안 
    또 한 생이 고요히 마감되는 것이다 
    “뼈가 시릴 적엔 몇 모금 음복술로 덥히면서 오백년 전, 
    통정대부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삼십대에 무슨 사화로 졸(卒)하신 당신, 
    처자식은 관노가 되고 
    그 때 당신의 눈물은 눈발이 되어 사방 백리까지 날렸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뼈마디마다 수수눈꽃을 피우면서 
    아버지와 저의 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발 속에도 맑은 뼈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가 졸(卒)하시던 그 때처럼"
    아버지는 신발공장 공원에서 출발하여 
    생의 마지막 즈음 공사판 반장직에 올랐는데 
    젊은 나이에 병으로 졸(卒)하셨다
    그 때 아버지는 뼈만 남은 문양으로 
    어린 내 손을 꼭 잡은 채, 흐린 물기를 보였는데 
    물기는 뼈를 타고 흐르다 서서히 결빙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앙상한 뼈의 모습이 
    너무 무섭고도 생경해 입관 하던 날조차 
    차거운 뼈를 따습게 데우지 못했다
    그 날에도 먼 곳에서부터 눈발이 날려 왔고 
    오래지 않아 강아지처럼 여린뼈를 가진 
    내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 오늘 밤 수북이 눈이 내립니다. 
    눈송이 송이마다엔 당신의 눈물이 담겨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북편에서 날리는 눈발에는 종가에 계자로 와 당신 집안은 
    절손 된 9대조 조부님의 눈물도 보입니다. 
    저와 아이는 오늘 같은 밤이면 뼈를 살포시 맞대고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눈 오시는 밤은 참으로 마음 따습습니다.”
    뼈가 잘 맞물려서 사계절을 보냈다
    펼쳐진 시간 속에서 
    나의 뼈는 좀 더 유연해지고
    아이의 뼈는 좀 더 옹골차졌다 
    몸속의 뼈들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순하게 낮추는 오늘,
    뼈마다 하얀 풀꽃이 피어난다
    향불을 피우는데 음력 시월 을해(乙亥)
    이른 눈이 축문과 함께 투명하게 날린다 
    기서유역氣序流易 
    상로기강霜露旣降 
    첨소봉영瞻掃封塋 
    불승감모不勝感慕 
    근이謹以 
    청작서수淸酌庶羞 
    지천세사祗薦歲事 상尙, 
    향饗 
    “당신들께서는 하얗게 뿌려지는 눈으로 혹은 투명한 축문의 곡조로 살아오십니다. 
    맑은 눈발 속 나폴 나폴 떠다니는 어린 것이 또 다른 뼈의 기원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뼈를 추스르며 어린 뼈를 돌보려합니다. 
    아이를 가만히 껴안아봅니다.” 
    [2009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관계 /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한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200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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