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반어 그 현실 비판의 의미

아리박 2011. 12. 10. 12:09

반어 그 현실 비판의 의미 

 

   1. 문명 비판과 성찰의 시     

 

 IT세기가 되면서 디지털 문명이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에 따른 결과로서 고유영역의 붕괴 현상이 현저해졌다. 문자를 주요 도구로 삼는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인 디지털화가 아무리 긍정적인 효과를 수반한다고 할지라도 이에 맞서는 또 다른 힘이 부재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문명의 일방향적인 전개에 불과할 따름이며, 결과적으로 주체가 되어야 할 인간은 오히려 기술 문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위상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난 해에 창작된 시의 두드러진 경향은 서정성의 부각과 함께 생의 본원적인 문제가 추구되었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은 기술문명의 가속화가 초래한 비인간화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다.

최승호는 "지구 위의 새로운 死神,/엄청나게 망쳐놓고서야 늙어 죽는 존재."(<농담> 부분) 라고, 욕망 때문에 스스로 죽음의 신이 된 인간에 대해 냉소적 비판을 가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 명을 유지시켜주는 자연뿐만 아니라, 자기의 육체와 정신까지도 사물화시킨다.

새해를 맞은 우리는 여전히 탈가치화의 시대, 비틀린 현상이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 를 통한 철저한 현실 부정과 자기 반성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시인들의 과제이다.  

 

2001년도로 막 넘어선 지점에서 필자가 살펴본 시작품들의 내용과 형식은 서정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정적 감흥은 가볍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반성적 시각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 지속적 으로 창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는 실재의 삶에서 관념의 뼈가 드러나 지 않도록 채록한, 시인의 전부일 것이다.     

 

2. 반어에 갇힌 삶

 

장석주, 윤예영, 황인숙의 시 부엽토 두텁게 깔린 땅을 서성이는 졸참나무 숲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혼자 울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인적 드문 숲 속까지 숨어든 남자에겐 필경 그만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의 울음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나 세상의 한쪽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중략)

다시 졸참나무 숲 옆을 지나갈 때 남자는 점퍼를 땅에 깔고 자고 있다 번데기처럼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자고 있다                   -장석주, <웅크리고 잠들다> 부분  

 

 남자가 숲 속에서 울고 나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을 화자인 나는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동안 보게 된다. 아이가 자신의 슬픔을 위로받기 위해 찾아드는 곳은 어머니의 품 속일 것이다. 그곳에 서 부지불식간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아이는 그 슬픔의 이유조차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치유의 장소이다. 혼자 울기에 적당한 졸참나무 숲을 찾아든 남자는 어머니의 품 을 찾아든 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졸참나무 숲은 외부와 격리된 자의 아픔과 울음을 다스려주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산을 내려올 때, 울던 남자는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다. 번데기는 곤충이 애벌레에 서 성충으로 탈바꿈을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휴지 상태에 든 형태이다. 겉으로는 성장이 정지한 듯 보이지만, 성충이 되기 위해 세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번데기는   확장을 위한 잠정적인 '수축과 정지'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그런데 숲 속에서 웅크리고 자는 남자도 아픔 때문에 수축된 자신의 몸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장석주는 <웅크리고 잠들다>에서 숲 속과 번데기를 통해, 우화(羽化)가 예기되는 시적 구도를 마 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현실의 냉혹함에 대한 반어적 표현임이 드러난다. 시인은 그 남자의 절망이 희망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봄날의 해에 비유하고 있 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 자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봄날 해는/왜 그리 빨리 기우는 것인가" 라는 화자의 독백을 제시한다. "세상의 한쪽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질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진 남자가 차 거운 흙바닥에서 웅크리고 자다가 깨어났을 때, 발견하게 될 것은 해가 져버린 어둠 속에 갇힌 자신의 몸일 것이다. 또한 자신이 가진 상처의 원인이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일 것 이다. 위의 시에서 졸참나무 숲 속은 어머니의 품 속이 될 수 없으며, 번데기처럼 웅크린 남자의 육신은 탈신하지 못하는 번데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화(羽化) 같은 신화의 세계와 현실의 간극 이란 얼마나 먼 것인가. 깜깜하다. 그의 등이 보인다. 사람들의 등이 보인다. 환하다. 그의 등이 열린다. 나뭇가지 사이 하늘이 얇게 펄럭거리고, 깜깜하다. 사람들의 등은 빨리도 지나간다. 가만히 서서 휘파람을 불어볼까. 환하다. 함부로 내 중심을 거쳐 가는 수많은 등, 깜깜하다. 내내 깜깜하고만 싶었다. 누군가 나를 훅 불어 주길 바랐다. 겨울이었다. 눈은 오지 않았다.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다. 딱딱한 껍질이었다. 때로는 종이처럼 얇아 진 나의 생을 그의 등에 기대고 싶었다.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다.                            -윤예영, <겨울이었다> 부분   

 

화자인 나는 세상과 차단된 채, 세상의 등 뒤에서 잔등(殘燈)으로 깜빡거린다. 나의 삶은 세상 에서 소외되어 있다. 게다가 "그저 생의 언저리에서 찰랑대는" 나의 삶은 나 자신에게조차 소외되 어 있다. 그러한 내가 세상에 편입될 수 있는 방법은 증명사진을 찍고 서류를 제출하는 것이다. 증명사진과 서류는 내가 밝은 빛이 비추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나는 세상 밖에 있는, 종이처럼 얇아져 가는 나의 생을 증명사진과 서류를 지불하고라도 그 속에 포함 되기를 갈망한다.   나의 외부는 환하고 나에게 속한 것들은 깜깜하다. 환한 바깥의 사람들의 등은 나를 끼워주지 않을 만큼 빠르게 나를 지나쳐 버린다. 그러한 그들을 통해 내가 가질 수 있는 나의 실재감은 전 혀 발생하지 않는다. 세상이 환할수록 나는 깜깜함에 포위된 나를 자각할 뿐이다. '환한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직접 표현되지 못하고, "내내 깜깜하고만 싶었다./누군가 나를 훅 불어 주길 바랐다."

나는 차라리 나의 잔등마저도 누군가 훅 불어 꺼뜨려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환한 세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자기파괴라는 반어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세상의 등뒤에서 깜빡거"려야 하는 나의 절망감은 오히려 더 철저한 어둠 속으로 추락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의 시에서 '등'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등"은 등불의 뜻과 신체의 일부인 등의 뜻 중에 한 가 지를 지시하지 않는다. '깜빡거리고', '훅 불어 주길' 바라는 나의 심리적 박리감은 약하게 타오르 는 등불로 암시된다. 반면에 나를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바깥 세계의 등은 신체 의 등으로 암시된다. 세상은 확고한 육체를 가지고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세상 바깥에서 웅크 린 나라는 존재는 쉽게 꺼져버릴 등불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충격으로도 쉽게 사라져 버릴 '잔등 (殘燈)'인 나와 그런 나에게서 완강하게 돌려져 있는 '세상의 등'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나는 후욱 흐린 거울을 불어본다 흐린 거울 속의 흐린 나무들과 흐린 불빛이 흔들린다 (그런데 진짜 거미의 집은 어디일까?) 거미가 깊어간다 바람이 소슬, 거미줄을 흔든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소슬소슬! 거미줄을 흔든다 나는 문득 쇠약해진다.            -황인숙, <거미의 밤> 부분   나의 일상시간은 거미에 비유되어 있다. 여기에서 시간은 소모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일상이 진 짜 삶일 수 있는가에 대한 화자의 강한 회의가 드러난다. 왜 화자는 거미와 자신의 일상시간을 결합시키고 있는가? "거미는 흐린 거울의 공간을 지어놓고/그 테두리에 숨었다". 거미는 자신이 쳐 놓은 거미줄을 식별할 수 없게 위장한 채,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자신의 몸을 숨기고 조용하지만 음흉하게 기다린다. 준비는 다 되었다. 거미줄에 일단 희생물이 걸린다면,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위장된 거미의 집과 그 집에 걸려들 먹이의 운명은 소모되어 가는 시간의 그물에 걸린 채, 조만간 파괴될 운명에 처한 인간의 모습과 적절하게 결합된다. 일상시간의 거미 줄에 걸려든지도 모르고, 거짓의 삶을 사는 인간의 모습은 "흐린 거울"에 함축되어 있다. 흐린 거 울의 공간은 "빨랫줄과 탁자사이에/거미가 그물을 친", 일상이 쳐놓은 위장된 공간이다. 거울 속 에는 나무와 불빛이 진짜처럼 흔들린다. 그러나 화자는 "(그런데 진짜/거미의 집은 어디일까?)" 라고 반문한다. 일상은 흐린 거울 속의 흐린 사물들처럼 불명료한 세계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깨 닫는다. 거미는 소모되는 시간이며, 거미집은 거짓세계의 상징이다. 흐린 거울에 비치는 흐린 세 상이 내가 소유한 삶의 전부이다. 거짓의 세계가 곧 나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다.     

 

3. 거대한 감옥,

 

금화의 도시- 허혜정, 하종오의 시   도시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그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이다. 밝음과 화려함으로 상징되는 도시 공간은 그 이면에 어두운 공간들을 내포한다. 도시의 모든 공간은 불연속적이고 단절되어 있다. 이처럼 파편화되고 단절된 공간은 인간관계의 심리적 단절과 소외를 파생시킨다. 이질적인 공간 들의 부조화와, 그곳을 실존의 토대로 삼는 인간들의 심리적인 불일치가 도시를 구성한다. 도시 에 인간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양적으로 계산된 공간들, 그 파편적인 공간 들이 도시라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뭉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그 힘은 위력적인 금화로 부터 온다. 하늘을 가리고 별빛을 가리는 낡고 거대한 도시 어지럽게 바뀌는 전광빛에 현기증을 느끼며 어느 순간 기억할 수도 없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어딘가를 들렀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이상한 망각의 창살 뒤로 서서히 충혈되다 부서져가는 하루 으스스한 몸살기를 느끼며 끝없이 돌아오고 있었기에 집이 되는 공간들 허연 의치처럼 벌어진 텅빈 벽의 모서리를 타고 반사적으로 지갑을 꺼내들고 있었다는 꿈 가방을 꽉 쥐고 걸었다는 꿈 제발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엄청난 일이 무시무시한 일이 밤의 철제문을 두드리는 미친 주먹들처럼 고막이 파열하는 정적 속에 난폭하게 자판을 두드리며 저건 진짜 세상이 아냐 진짜 하늘이 아냐 그리고 지친다. 어두운 감방에서 텅 빈 숨을 몰라쉬는 죄수처럼                       -허혜정, <교환> 부분   사람을 포함한 자연물들은 모두 하나의 상품으로, 교환가치로 전환된다. 도시는 연약한 자연과 인간을 파괴시키며 번영한다. 모든 것이 화폐로 교환되는 도시는 점점 비대해져 간다. 위의 시에 서 여자교도소와 대형매장의 모습은 병치되어 있다. "겨우 백 미터에 불과했다. 이 대형매장과/청 주여자교도소의 거리는. 주차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는 길목에/벌거벗은 거지여인처럼 교도소는 서 있었다" 이 시의 초점은 대형매장에 맞춰져 있으므로 교도소라는 특정 공간은 대형매장, 혹은 도시에 대해 가지는 화자의 비판을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장치인 것이다. 낡고 거대한 도시에 자 리잡은 거대하고 휘황한 대형매장에서 모든 물품들은 화폐로 교환될 수 있다.   "때로 너무 이상하다. 이렇게 돈으로 무언가를 살 수 있다는 것은/돈을 주기 때문에 택시문은 열리고/도로로 만들어져 있기에 달려가고 있는 길/하지만 이것이 진짜 세상이라 누가 말할 수 있 겠는가" 낡고 거대한 교환시장인 도시에 거주하는 화자가 자신의 실제 생활을 꿈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화자인 나는 왜 도시를 감옥으로 여기고, 자신을 수인처럼 생각하는가? 나는 교환체제가 지배하는 생활 속에서 숨이 막힌다. 내가 매장에서 물건을 사고, 택시를 탈 수 있는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화폐를 지불하고 얻게 되는 힘이기 때문에 나의 주체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될 수 없다. 나는 화폐의 힘을 잠시 빌리는 사람에 불과하므로, 화폐는 나의 주인이며, 나는 화폐의 대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비주체적인 나의 구매행위는 조건반사적이다.   나는 화폐를 대신하여 살아가는 나의 일상을 벗어나고자 한다. 화폐에 의해 주체가 박탈된 채, 종속된 존재가 된 나는 금화의 도시에 완벽하게 갇혀버린 수인이다. 누군가를 위해 도로표지판이 수직으로 서 있다.     그 위에 햇빛이 금화같이 찰찰 수직으로 쏟아지고 좌회전 한국은행, 우회전 대한투자신탁, 직진 코스닥. 누군가를 위한 벤츠 한 대가 수직으로 질주한 뒤에도 누군가를 위한 사람들은 수직으로 서 있다.           -하종오, <괴로운 수직> 부분        수직은 타율성을 상징하는 선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서 있다는 것은 이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도시 공간의 타율적인 법칙 속에서 모든 것들은 수직으로 서 있어 야만 한다. 그 법칙의 결정권은 화폐가 가지고 있다. 도시에서 화폐는 절대 권력자이다. 그것은 화폐를 지불하고 대신 무언가를 얻는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자연물조차 화폐의 교환법칙에서 벗 어날 수 없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의 노란 빛마저도 금화처럼 번쩍이며 쏟아진다. 화폐의 힘 이 "누군가를 위해" 수직으로 서 있게 만든다.     

 

4. 깨달음의 소리와 탈신의 공간-

 

최동호, 최하림의 시   인간의 물신 욕망이 스스로를 타율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곳이 도시라면, '선원(禪院)'과 '하늘'은 탈속과 탈신의 공간이다. 그곳은 속악한 외부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육신은 하나의 형상이며, 물 질로서의 육체를 지닌 인간은 그의 육체가 처한 삶의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육체를 가짐으로써 발생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다음에 살펴볼 두 편의 시에는 탈속의 공간 을 배경으로 탈신의 과정을 보여주거나(<돌무더기 아기 눈부처-'무금선원'에서의 하룻밤>), 자유 롭게 비상하는 새에 생의 본질을 비유하고 있다.(<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이같은 시적 사유를 통해 시인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부과되어 있는 삶의 조건과 내적 욕망 으로 비주체적인 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천정에서 대들보 갈라지는 소리가 죽음의 지척에 있다. 돌아누우면 혼불이 빠져나가듯 육신이 무처럼 쩍쩍 갈라지고 냉한 바람이 들이친다. 개울가의 돌무더기 아기 눈부처는 환한 달빛 아래 백설기처럼 두툼하게 솜눈옷 갈아입었는데 귀신 발뒤꿈치 소리가 배회의 바람을 일으키던 마당에는 겨울바람이 달빛은 놓아두고 나뭇잎만 쓸고 간다. 선방에선 한밤중 천정의 들보가 갈라지고 가슴 무너지는 저승소리가 문풍지에 하얗게 떨린다.        -최동호, <돌무더기 아기 눈부처-'무금선원'에서의 하룻밤> 부분   지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대들보 갈라지는 소리가 화자의 가슴을 뒤흔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화자인 내가 그 소리를 인상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바로 이 시의 부제인 "무금"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한다. "무금선원(無今禪院)"에서 무금(無今)의 뜻은 지금, 혹은 현재는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 다. 이때 '지금(今)'이라는 것은 불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그것은 파편적인 시간이며, 흩어져버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무금'은 '지금' 같은 시간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 '무시간'을 의미 한다. '무금'이 시간으로서의 '지금'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때,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인식하는 주체 의 부단한 거부이다.   한편 '무금'에서 '지금(今)'은 사물의 본질적인 면을 자각하는 각성의 '순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것은 화자가 자신과 본질적으로 대면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무금'은 각성의 순간인 '지금'이 라고 인식하는 순간까지를 거부하는 철저한 부정이다. '지금'을 파괴하려는 정신은 "대들보 갈라 지는"소리에 비유된다. 어떤 형상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할 때 나는 '깨지는 소리'를 화자 가 크게 자각하는 것은 깨달음의 순간인 '지금'조차도 끊임없이 거부하려는 의식행위이다. 자기 자신을 깨뜨리고자 하는 의식이 화자로 하여금 "대들보 갈라지는" 소리를 듣도록 만드는 것이다.   무금선원은 깨달음의 순간과 죽음이 격렬하게 뒤바뀌는 공간이다. 화자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육신과 욕망이 "무처럼 쩍쩍 갈라지"는 탈각의 과정을 생생히 감각한다. 의식의 탈각은 "죽음의 지척"에 이르러서야 가능할 만큼 고통스럽다. 아기 눈부처와 환한 달빛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 에서 자기를 깨뜨리며 밤을 새우는 인간을 고요히 지킨다.         

하늘에는 수천 새들의 날개소리로 시끄럽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요요마는 거울 속에서 거울의 부축을 받으면서 연극한다 황혼이 거울 속으로 몰아든다 새들이 또다시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날아가면서 꾸르륵꾸르륵 운다      -최하림, <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부분   수천의 새들과 수천의 나뭇잎들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시간의 거울은 내가 서 있는 공간 이다. 새들의 날개짓은 강렬한 생명의 흔들림을 보여준다. 반면에 그것의 배경은 정적과 정지의 상태이다. 시끄럽고 활기찬 생의 소리는 고요한 하늘을 배경으로 붙박힌다. 위의 시에서 새에 부 여된 보편 관념-자유로운 비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부조리하고 왜곡된 세계에서는 인간의 삶조차도 '반어'라는 불일치의 형식을 취하여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시의 화자는 우주, 자연, 인간, 사물들, 모든 것의 본질과 직접 대면한다. 그의 인식 행위에 장애가 되는 어떠 한 현상도 끼어들지 못한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숲 속으로 강하하는 새의 날갯짓에서 감각 적인 생명의 활기는 '그대로 나타난다.'         

 

5. 생의 푸른 탯줄-

 

이하석, 안찬수, 이은봉의 시   반어가 일상인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그 삶을 생명의 원천과 이어주는 탯줄이다 생명의 원천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푸른 길>), 욕망이 외부세계와 조화로운 아이들의 순수함으로(<눈부 시게 웃는 아이에게>) 나타난다.

또 그것은 인간 문명이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에서(<침팬지의 집>) 발견되기도 한다.    고향 가는 모든 길 끝에서 나물 캐는 저 할머니, 순천 박씨인가 그렇다면 내 어머니 향기 푸른 어둠 속에서 뒤척이며 먼 여행 떠 다니는 내 그림자 캐내는 길 밖 타고 앉은 햇빛 짐승 모든 길들이 어머니의 산밭을 돌아가네 햇빛은 그 길 모퉁이에서만 애타게 타네        -이하석, <푸른 길> 전문   

화자는 길에서 보게 된 할머니에게서 아마도 화자의 어머니 성씨일 "순천 박씨"를 연상하고, 곧 "그렇다면 내 어머니"라고 발화한다. 나의 이같은 막연한 추측이 갑작스럽게 '내 어머니다'라는 분 명함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어머니를 향한 나의 절실한 그리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화자의 모든 행로와 마음의 방향은 어머니를 향하여 나 있다.

또 화자의 어머니는 길 밖에서 그림자일 망정 떠돌이인 나의 흔적을 캐내는 햇빛 짐승이 된다.   길은 화자가 어머니에게 이르게 해주는 탯줄이다. 경외스런 생명감을 함축하고 있는 탯줄은 신 비로운 색채인 푸른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모성과 또 다른 개체로서의 나의 삶을 이어주는 길은 푸르다. 푸른 색은 비현실적인 색채이며, 또한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 없는 상태를 암시하는 색채 이다.

어머니와 나는 하나의 길 위에서 만나지 못하지만 떠돌이인 나의 삶을 견디게 해 주는 생 의 원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길에서 만나는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어 머니의 노동이 깃들어 있을 고향의 산밭을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길 밖 타고 앉은" 어머니는 나와 같은 길 안에 있지 않다. 내 삶의 길은 오로지 나에게 속한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를 수 있는 그리움의 통로가 길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갈 수 없는 길 이기도 하다.

탯줄은 어머니와 자식을 이어주는 생명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체와 개체의 분리가 전제된 길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하나의 개체로서 삶을 이 끌어 나간다.

아이들이 눈부시게 웃는다 아이들이 눈부시게 뛰어간다 아이들이 눈부시게 하늘과 어울린다 나무와 어울린다, 새와 어울린다   여름, 날은 더운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분수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올라간다 어린 시절, 그날의 풍경화가 하늘에 걸려 있다 놀고 또 놀고 지치도록 놀 수 있는 아이들은 좋겠다 엄마가 부르실 때까지 놀 수 있는 아이들은 좋겠다         -안찬수, <눈부시게 웃는 아이에게> 부분   

"뿌리치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세 치 혀도 없는 입에서/웃음이 피어나는" 화자의 삶을 이끌 어 주는 힘은 무엇인가. 꿈에 이르는 길을 모두 잃어버린 어른인 화자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길 의 흔적을 짐작한다. 생기 있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마음껏 놀이를 하고, 감정을 분출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욕망과 현실의 괴리가 전 혀 발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조화로운 만물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눈부시게 웃는 아이에 게>는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환희로운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 아이들의 활력은 어른인 화자가 강팍한 삶 속에서 잠시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 반짝인다.     

바윗덩어리들 속, 아직 덜 진화된 침팬지들, 오순도순 살림 차리고 있는 모습, 눈에 띈다 언뜻 보면 마냥 돌덩어리다   돌덩어리 속 침팬지들, 안으로 끌어들인 산기운, 파랗게 키우고 있다 생령(生靈)들 우쩍우 쩍 모여들고 있다 돌 부스러기들보다 작은 침팬지들, 쪼르르 모여 살림 살고 있다   

저 바윗덩어리들, 그렇게 나다 아버지다 할아버지다 누구도 제 손자들, 여기 옹기종기 모 여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제석산 오랜 소나무들처럼                          -이은봉, <침팬지의 집> 부분   

위의 시에는 깨뜨릴 수 없는 자연, 깨뜨릴 수 없는 우주가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앎〔知〕의 세계가 아니다. 문명인인 인간은 앎(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해석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과 정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깨뜨리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침팬지들이 살고 있는 집(공간)은 인간의 이해 영역 바깥에 있다.

침팬지의 집은 자발적으로 생을 이끌어가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우주 자연을 상징한다. 화자가 그곳의 바위와 돌을 가리켜 침팬지들의 집이라고 일컫는 것에는 문명인인 인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내재한다. 화자는 문명 이전의 인간들과 조 화를 이루었을 옛날을 그리워한다.

소나무는 서 있고, 바위는 앉아 있고, 바위 주변의 돌부스러기 들은 옹기종기 살고 있다. 화자는 무생물인 바위들에서 생명의 움직임과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성 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활발하고도 완결된 생명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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