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에게 묻는다 여행가방에게 묻는다 박 영 대 집 나설 때 채워서 떠날까 비워서 떠날까 미지로 서너 걸음 나를 넣고 지퍼로 잠근다 잠겨진 침묵들이 스르르 문을 열고 나온다 허리춤을 풀고 다른 물맛을 배설할 때까지 내게서 이탈되는 거리가 순간인지 평생인지 매 끼니 만나서 이별을 비벼 먹는다 잠.. 자작시 2015.12.24
감기 감기 박영대 두 살짜리 숨소리가 쌕쌕 그르릉 동지가 바람 끝으로 할키고 갔다 창틈으로 엿보다가 며느리 몰래 낚아챈 발톱 뭐 먹을 게 있다고 숨소리 펄펄 끓이는 가마솥 온 집안이 식지 않은 손자의 이마에 三代가 뻘뻘 진땀 훔치고 있다. 자작시 2015.12.15
시한부 시한부 박영대 시한부 아닌 것이 없는데 시한부라는 말 한마디에 너를 정지해야할 것 같은 경각에 매달린다 흙이 된다는 것 나무의 밥이 된다는 것 물속 바닥이 된다는 것 초조하고 억울하고 두려워서 타협을 타협하고 원망을 원망하고 포기를 포기하고 늙었으면 싶다 더 늙었으면 싶다 .. 자작시 2015.12.04
간월도 간월도 박 영 대 손등에 짠물 파고들어 고단이 번지는 달빛 먹빛이더라 적잖이 굽은 허리에 비린내 둘러맨 몸빼바지 갈퀴손으로 파내는 어리굴 비추는 갯길이더라 누가 바라만 보고 즐기는 간월看月이라 했는가 콕콕 찍어내는 가슴팍에서 젓물같은 어머니의 꼼지락이더라 갯바위 매달.. 자작시 2015.11.30
누군가의 시 누군가의 시 / 박영대 9월이면 나무들 긴 화두 하나 붙들고 시를 쓴다 어린 입술 딸싹이며 옹알이 시작하더니 어느새 걸음마 꽃몽오리 시절 견뎌내고 꽃은 한 때 사랑 휘날리던 스카프 그땐 그 사랑에 목매어 운 적이 있었다 고목도 처음 겪는 계절의 난장판에도 쏟아낸 땡볕 숨 막히는 열대야에도 불평 한마디 안 하고 그 꼭대기까지 언제 물 길어 올려 달디단 시어로 열매 맺는구나 밤잠이 깨져서 시가 되듯 견딤이 모질게 익어 열매가 되듯 누군가의 가을에 시 한 편 되어 황금률로 익고 있구나 다래가 익는 산중 자작시 2015.09.17
화촉 화촉 박 영 대 꽃은 필 때부터 푸른 요를 깐다 요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듯이 졸업식 같은 단발 복장단정이라는 굴레를 벗고 최소한의 여심으로 주체할 수 없는 색욕심 이 세상의 모든 색깔을 찾아내 그래서 유치한 푸른 꽃은 배제하였는가 부러워서 따라 하다가 채워지는 본능 바람끼.. 자작시 2015.08.12
말 수가 적어서 말 수가 적어서 박 영 대 강아지풀 손 흔드는 평平과 안安의 야생 바지랑대에 잠자리 내려 앉은 연착륙 맘에 쏙 들게 보드러운 힘이 없다면서도 세월은 묶어두고 바람 지나다가 물이 흐르다가 대신해 주기도 바라지 않은 울음까지 그저 말하지 않은 말 많게 우거진 가시덩쿨에 감겼다가 벗어난 가장 편한 것들 가장 만만한 것들. 자작시 2015.07.31
포크레인의 꿈 포크레인의 꿈 박 영 대 뚝심 타고 났다 말하자 마라 죽을 힘 다해서 파고 있다 어깨쭉지 절절거려 밤마다 등짝에 약 붙이고 산다 평생 멍에로 신겨진 신발 무거움 견디고 조심조심 걷는다 울고 싶어도 그 덩치에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속으로 웅웅거린다 누군들 돌밭 가시밭 가리고 싶.. 자작시 2015.07.27
자전거 타는 대화 자전거 타는 대화 박 영 대 바람은 누가 만들까? 꽃들이 저기 노란 달맞이꽃은 무슨 바람을 만들까? 노오랑 바람 민찬이는 어떤 바람을 좋아해? 빠알강 바람 그럼 우리 꽃밭으로 가 보자 강가 코스모스밭에는 빨강 하양 입술들이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하늘 할아버지. 꽃들에게 바람 .. 자작시 2015.07.23
그 산에 나만 없을까 그 산에 나만 없을까 박 영 대 창밖으로 산바람 크는 걸 엿본다 풋내 나는 젖을 물리고 드러낸 허리 위로 살 냄새 푸르게 보드라움 끼리 어우러져 보드랍다 아침 안개 피우는 푸른 허벅지 구르다 가시에 찔린 사춘기 선혈 크려고 찾아온 쿨렁거리는 성장통 음지조차 눈부셔 고개 들지 못.. 자작시 201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