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산방 115

고추

고추 박 영 대 시월, 때가 되었나보다 지난 달까지 울긋불긋 잘 생긴 얼굴 하나로 밥상머리에서 위세 부리고 자식 욕심에 휘어진 허리 평생을 청려장에 의지하고 살면서도 늘상 손님 상에 낯 가리지 않고 된장만 있으면 몸땡이 하나로 칠첩반상을 차린다 어릴 적 한 동네서 자란 불알 친구도 알짤없이 사춘기 겪고 난 후 아이들 범접 못 하게 내쫓고 눈물 돌게 호된 성깔 아직 그대로 설령 가루가 되더라도 매운 끼 히나로 제가 뭐라고 톡톡이 꼬장부리고 있다 남자라고 바람 매단 빨래줄 타고 노는 치마자락 앞에만 서면 펄럭펄럭 `사랑입네' 하고 기 죽지 않는 가을 하늘 저 허장한 줏대

자작시 2013.10.14

꽃눈

꽃눈 흔한 잎자리 대신 요이불 깔아 다습게 꽃자리 펴놓았다 바람의 꽃 시샘 갈 데까지 가 보자 비탈진 계절의 매질 속에 맞으면서 감춘 피멍 툭 불거져 나온 견딘 흔적 바람에 숨기며 치마인지 바지인지 사랑인지 이별인지 입 다물고 있다 꽃이라면 물불 모르고 달겨드는 서슬 퍼런 봄판 잎눈인지 꽃눈인지 벌 나비 화전놀이에 빠진 동안 가지 얼굴에 울음 맺힌 봄날이 왔다 너무 쉽게 알아버린 설음 울음맺힌 꽃눈 당산중학교정에서.

자작시 2013.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