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82

섣달 열야드레

섣달 열야드레 박 영 대 어매 손 맛 형 하나는 일찍이 서울로 돈 벌러 가서 없어졌으니까 하나 빼고 아홉 남매 빠지지 않고 생일이면 미역국에 시루떡을 해 주어야 했다 어김없이 섣달 열야드레날에는 시루떡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나는 그래서 태어난 해는 중요하지 않아 그건 설날 아홉 살, 열 살이면 됐으니까 한번 쩌서 하루에 다 먹지 않는 시루떡 식혀두고 한 사나흘간은 팥고물 잡고 시원컴컴한 시루에서 손으로 찢어내 들고 다니며 자랑하고 다닌 생일날 왼손 약지 금가락지 한번 돌려보고 아부지에게 대놓고 낯 세울 수 있는 삼백예순날 중 하루 어매 자식 자랑 드러내는 날 우린 그저 시루떡이 좋아라 그때는 나이를 얼마나 잘 먹었는지 몰라 낳자마자 뱃속에서 한 살 섣달 열야드레 지나고 얼마 안 있으면 설날 또 한 살 먹었..

자작시 2024.10.22

통일전망대에서

통일전망대에서 박 영 대 아는 길을 묻습니다뻔히 다 보이는 길을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남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산노루 멧돼지는제 맘대로 오고 가는데오징어 문어 고등어맘껏 헤엄쳐 바닷길 오고 가는데다 아는 길을 우리만 몰라 허둥대고 있습니다 바람 불어서도눈이 쌓여서도낙엽이 쌓여묵전길이 되어 버린 것도 아닌데빵빵한 길 놔 두고도 오고가질 못합니다그것은길목 가로 막고 있는 저 문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면 열리게 만든 문인데몹쓸 것 들어오지 말라고 만든 문인데걸음 당당히 오고가는 길이 되는 문인데닫힌 채 열리지 아니 합니다열리려 하지도 아니합니다오지도 가지도 못한 우리가 몹쓸 것입니까?문은 길이 될 때 행복합니다 문은 열쇠로 엽니다자물통 밑구녁에 팍 찔..

자작시 2024.10.03

오년 만에 눈물

오년 만에 눈물                                      박 영 대다정을 태운 얼굴항아리에 눈익은 푸른 낮달 '보고 싶다'그 한 마디에 목이 매인다말도 안되는 가을잎소리 지기를 다섯번 다섯해 전 그날은 티 내면 안되는 줄말로 하면 안되는 줄눈물 보이면 안되는 줄죄인이라서 안되는 줄 소꼽놀이로 왔다가훅 그렇게 가버리면눈물도 보이지 않고한숨도 들리지 않는잠긴 유리창 너머 저 세상에서는귀만 막으면 그만인가요 구름 타고 기어 오르는 따라쟁이 하늘수박 풀도 자라고아이들도 자라고키 재보면 세월만큼 다 컸는데한숨은 찧고찧어도 부서질 줄 모르는가 저린만큼 깊게 찌르는 가시 돋힌 그리움이 아픈 줄은 알고 있제?뒤돌아 참은 눈물 훔치고 서서아직도 기둥으로 비빌 언덕대들보 텅 빈 허리받침이여 짓없는..

자작시 2024.09.11

호랑이귀풀(호이초,바위취)

호랑이귀풀(호이초, 바위취)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집에 올 때 호랑이귀풀의 긴 더듬이팔이 3개였는데 2개는 환경적 요인이거나 관리 소홀로 사라져가고 있다 한 줄기가 길게 자라서 살고 있는 바위 끝까지 뻗어 그 곳에서 새 생명인 호랑이귀 두 쪽을 피우고 있다 저 가느다란 줄기팔을 생명의 끈으로 새 삶의 자리를 찾고 있다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긴 줄기팔로 물기를 전달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발 붙일 흙이 없으면 줄기팔로 물기를 전달해 오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새끼 호랑이가 태어난 기쁨이다 볼수록 새끼 호랑이 같은 털숭숭한 호랑이귀가 귀엽기만하다 그렇지, 호랑이가 아무데서나 살 수는 없지 아무나 근접하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는 엄중함이 더욱 호랑이답게 하는 것이다 대단..

자작시 2024.08.13

바람의 맛

바람의 맛 / 박 영 대 육백마지기 바람의 맛을 아는가? 스물여섯 대의 갈비뼈에 핀 꽃갈빗살의 풍미 돌밭에서 맨 처음 견뎌내기 시작한 발굽 발목에서 힘을 쓰는 힘줄 네 다리 허벅지 근육질이 허리를 받치고 보습날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땅속 헤집는 쟁기의 숙명으로 걸었다 자갈밭 익숙할 때까지 엉금엉금 비탈밭 갈아 엎기까지 비틀비틀 구비구비 빠르게 가는 길 오르막내리막 편안히 가는 길 벼랑 휘돌아 스릴 재미 주는 길 숨 한번 고르고 오줌 누고 가는 풍경 쉼터 견디고 기다리고 힘내고 기다리고 속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드넓은 엄두도 나지 않는 광활 드높은 눈앞을 가리는 고도 한 발짝 한 발짝 황소의 뿔질 응원 끝끝내 해낸 어미소의 해탈 울음 육백마지기 바람의 맛 음~ 머~ 바람의 맛 / 박영대

자작시 2024.05.30

설 만두

설 만두 / 박영대 섣달그믐 핏줄 한데 모인 눈사발에 샘물 떠온 종재기들 새해를 씻는다 내나 할 일 찾아나선 간간한 핏줄 젖가락 끝에 집히는 혈육동화작용 손주 까탈까지 보듬는 할머니 품안 학교 앞에서 칭얼대는 초등 숙제장 만두피에 집어넣고 다짐을 빚는다 일년동안 서성거린 입가심 세월만큼 차이나는 눈높이 밝아오는 새벽녘 동편 창에서 붉어가는 석양빛 서쪽 창으로 길게 늘어뜨린 온기를 퍼 나른다 찜솥에서 한 살 더 익어가는 설가심 한번 더 간 손길로 전해주고 싶은 맘이 허기에서 핀 한 단 장미꽃다발로

자작시 202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