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서야 첫
박영대
첫눈이 내리면
지그시 눈 내려깔고 공손해진다
구름이 가린 존재의 이유를 대고 있는 눈썹달
예법처럼 두손 모으고
더 이상 당하기 전에 무서운 줄 알고 알아서 긴다
첫눈이 내리면
도시는 소란스럽게 잠결에 든다
한 때 버르장머리들이 목소리 낮추는 회초리
소리까지 소리로 재우고
더 이상 혼나기 전에 낮은 잠자리로 소롯이 정적
부끄러워 마라
다독다독 오는 줄 모르게
좋은 때 다 놓친 국화보다 늦게
첫이라는 죽은 시간을 돌려 놓는 늦은 산통
11월
한번은 꼭 하고 넘어야할 일정이 이렇게 많있다니
*** 시작 메모
올해 첫눈은 너무 많이 왔다
원래 첫이라는 시작이 하는 듯 마는 듯 시늉만 하고 마는 것이 상례지만 이번 첫눈은 깜짝 놀랠킬만큼 요란하게 등장했다
새벽 집을 나와 대면한 첫눈은 모든 세상을 고요로 뒤집어 씌워 적묵의 바다로 모든 소리를 덮어 조용하다
도시는 침묵으로 평정되어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첫눈에게 순응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색색 옷으로 가을 패션을 펼치던 가로수들
때를 모르고 푸른 가지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야한 춤으로 유혹하던 수양버들
아무런 준비 못하고 씨도 남기지 못한 국화는 마지막 가을꽃이라고 노란 입술 짙하게 저 혼자 즐기던 가을을 단 한번에 때를 빼앗기고 눈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신세가 되어 있다
저 혼자 춥겠지 다 벗고
때를 준비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첫눈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바뀐 상황에서 제 처지를 의아해 한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인지 아무런 준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
준비 안해도 살기에 좋다고 때맞춰 해야할 것들을 무관심 무대응 무준비로 그냥 지낸다
당장 살기에는 이것이 편하니까
11월이면 늦은 종반이다
곧 섣달인데 준비하지 않으면 그 댓가를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
준비하지 않은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다
국화가 그것을 여실히 반증하고 있다
시답잖은 꽃으로 씨도 받지 못한 모습으로 눈속에서 떨고 있다
꽃이 필 때면 연애하고 짝을 만나고 열매를 맺을 때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낙엽이 지고 첫눈 내리면 강물처럼 순연히 바다를 받아들여야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순환의 연역을 거스를 수는 없다
첫눈이 깨닫지 못하고 늦은 세상살이를 혼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