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당위의 갈등 그리고 융합

아리박 2014. 2. 22. 13:33

  당위의 갈등 그리고 융합

우리는 그 동안 너도나도 새 천년, 새로운 세기를 운위하면서 하루아침에 무슨 천지개벽이라도 될 듯이 호들갑을 떨어왔다. 그러나 막상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지만, 어디에도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어떤 변화도 없다. 결국 그 호들갑은 급변할 수 있는 문명의 동력과 요인을 20세기에 인류가 구축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지, 어떤 본질적인 것의 전복이나 멸망의 뜻이 아니었다. 문학의 본질도 마찬가지여서 당장 어떤 21세기의 양식이 하늘에서 내려오지도 땅에서 솟아나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지엽적인 변모가 진행될 뿐이기에 그 진행 과정은 당시에는 쉽게 찾아내기 어렵다. 역시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아름다운 잎과 꽃을 드러낸 {문학마을}의 시마당에 들어서 있는 나무들도 지난해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모습으로 피어 있다. 그것은 문학이나 시의 본질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은 까닭이다. 따라서 이 글은 비록 21세기 첫 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시대적 변화의 양상보다는 나무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양새나 그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 수단이다. 그리고 시는 언어를 사용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문학예술의 꽃이다. 그러므로 시의 본질적 존재 이유는 미(美), 즉 아름다움의 발견이나 창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의 유형(미적 범주)은 흔히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 등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이 글은 {문학마을}의 시나무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중에서 주로 비장미에 주목하면서 몇 개의 작품이 주는 아름다움의 파장을 읽어보고자 한다. 곧 당위(當爲)의 갈등에 대한 주목이다.

비장미는 원래 고대 비극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비극은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당위의 적극적 가치가 인물과 융합하지 못하고 상반되는 갈등 속에서 침해 또는 멸망하는 과정이나 결과를 그려낸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의 고뇌 속에서 가치감정이 고양되는 특수한 미가 비장미이다. M.Dessoir에 의하면 비장미는 인간과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에서 야기되며, 최고의 인간적 가치의 파멸과 가혹한 고뇌와 비극적 파국의 원인을 수반한 비통한 사실로부터 비롯된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하는데, 이는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로 볼 때,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임을 짐작하게 된다. 인생의 좌표는 '겨울'이라는 시간과 '사막'이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와의 지속적 갈등 속에 놓인 인간 운명의 비극성의 상징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장인성의 [바다에 내리는 눈]이다.

겨울 바닷가에서
바다에 내려 바다가 되는 눈발을 바라보면
나는 왜
세상에 내려 세상이 되지 못하는가

바다를 치닫던 섬 하나가
눈 내리는 바다에 영혼을 쉬고 있다.
이런 날은 눈발이여,
온 세상이 하얗도록 지척없이 흩날려
내 헛딛고만 살아온 발목을 덮어다오

안식하던 주소와 우울한 추억과
닳아빠진 수첩 속의 이름들을 덮어주고
다만
외로운 사람의 눈물이 되는 법을 알려다오

내 영혼 너처럼 무거운 짐을 벗고
누군가의 가슴에 질펀히 녹아흘러
그의 조그만 바다가 되고 싶다.
                         ―장인성, [바다에 내리는 눈] 전문

흔히 문학을 의미예술이라고 한다. 이 말은 문학이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를 떠나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없다는 뜻이며, 결국 인생탐구의 예술이 된다는 뜻이리라. 존재나 사물의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와 부정적인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앞의 것은 융합, 조화, 화합, 합일 등이고 뒤의 것은 상반, 부조화, 갈등, 분열 등이다. 위의 [바다에 내리는 눈] 역시 이 관계의 절묘한 형상화이다.
모두 4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의 제1연은 눈발과 나의 대조를 통하여 갈등을 찾아내어 발단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눈이 바다에 내려 바다로 융합되는 것이 당위인 것처럼 세상에 내린 나도 세상과 융합되는 것이 당위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인생인 것임을 이 시는 비장하게 드러낸다. 즉 '누군가의 가슴에 질펀히 녹아흘러' 외로운 사람의 눈물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서정적 자아의 비극성을 그린다.
제2연의 상황은 갈등의 구체적 형상화인데, 역시 대조를 통해 바다와 나의 차이를 드러낸다. 바다는 눈발과 합일되는 존재이므로 섬이 그 영혼을 쉴 수 있는 어머니나 가이아(Gaia) 같은 존재가 되지만,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서정적 자아는 그의 세계에 안주하지 못하고 유전하는 삶이기에 눈에게 헛살아온 '발목을 덮어다오'라고 애원한다. 그것은 다른 영혼을 품어 평안케 하는 바다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자아의 염원인 것이다. 그 염원은 어떻게 해서 이루질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제3연에 그려진다. 첫째는 '안식하던 주소'를 덮는 것이다. 자신이 안식하는 집안(주소)에서 어머니는 자식들의 영혼을 길러주고 재워줄 수 없다. '우울한 추억'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빠진 사람이 자식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또 '닳아빠진 수첩 속의 이름들'도 마찬가지다. 낡은 관습이나 가치에 안주하는 사람도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이것들을 모두 덮고 '외로운 사람의 눈물'이 되는 것만이 갈등을 해소하고, 남을 내 가슴에 품어 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영혼이 외로운 사람을 위하여 눈물, 즉 희생으로 주는 뜨거운 마음 그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바다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추운 허공을 휘돌아 떨어지는 눈을 품어 하나의 몸이 되는 넉넉한 사랑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인 나는 그렇지 못하여 마지막 제4연에서 '그의 조그만 바다가 되고 싶다'라고 소원할 뿐인 비극적 존재이다. 이 비장함에 대한 발견을, 은유적 수사와 비극적 배경(겨울)과 염원의 목소리와 깊이를 만들며 떨어지는 리듬으로 시인은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거울 앞에 거울을 놓는다
거울 속에 거울이 서로 들어가
끝없이 파고든다

사람 앞에 사람이 선다
사람 속에 사람이 서로 얽혀
끝없이 가슴을 파고든다

나무 앞에 내가 선다
나무를 뚫고 내가 들어간다
그러나 되돌아오지 않는 나

나의 실종
                   ―임보, [거울] 전문

이 시는 거울의 반복반사를 모티브로 이루어진 것으로 역시 두 존재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 제1연에서 두 개의 거울은 서로 파고드는 관계인 것처럼 제2연에서는 인간이 서로 가슴을 파고드는 관계로 되어 있다. 기승전결을 정확히 연으로 구분하고 있는 이 시에서 전(轉)에 해당하는 제3연에서는 그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 즉 양쪽 존재가 동일한 거울이나 사람이 아니라, 나무와 사람이라는 이질적인 것으로 만나고 있다. 이 때에는 반복반사가 되지 않고 따라서 사람인 나의 형상은 나무쪽에 없다. 그래서 결(結)인 제4연은 '나의 실종'으로 끝이 난다. 시인의 '시작노트'가 암시하는 바처럼 그것은 두 존재의 관계가 파괴된 '고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울의 반복반사를 보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파고들어 가는 두 거울의 관계를 융합이나 갈등 어느 쪽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한쪽 거울의 모습이 다른 쪽에 반사된다고 하여 그것이 합일이나 융합이 아님은 분명하다. 둘은 별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대립적 거울이 버티고 있는 길항(拮抗)의 모습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두 거울의 관계는 합일이나 융합이 아닌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사실 인간 세상은 따뜻한 천국이기보다는 겨울의 사막이라는 것을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의 제3연을 보면 나무와 나의 관계는 이질적인 두 존재가 하나로 합일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를 자연으로 본다면 인간의 생태학적 세계관의 표출로도 이 시를 읽을 수 있으며,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기에 그것과의 융합 속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깨달음을 형상화한 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없애고('나의 실종') 너에게로 합일되려는 사랑의 정신이 인생에서의 비극성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두 개의 거울처럼 인간 세상은 갈등 속에서 서로 버티며 괴로워한다. 이 당위의 부조화를 넘기 위한 자아 실종의 아름다움을 이 시는 읽게 한다.        

뿔뿔이 흐트러진 처자식 모습으로
도시 지하도에 나뒹구는 빈 소주병

수박 베어먹고 씨 내뱉듯 팽개친 나으리
굴러가는 수레바퀴 예고도 없이 망가뜨린
그대 각본에 주거부정 꼬리표 달고
홀로 승차 거부당한 두더지 삶
눅눅하게 젖은 등
마른 검불로 땅은 다독여 준다

날마다
귓전을 울리고 지나가는
목적 가진 자들의 발자국 소리
언젠가 희망의 나래 펼쳐 제대로 굴러가야 할
수레바퀴

몽롱한 꿈결에 오늘을 지워 나가는
무소유자의 미소
                 ―이상열, [땅] 전문

이 시는 노숙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가장이 직장을 가지고 일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한 집에 모여 따뜻한 방에서 살아가며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시민적 당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이 당위적 사실에 조화되지 못하고 갈등하는 적지 않은 계층이 있는데, 노숙자라는 단어가 이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 그들은 이 시에서 보는 바처럼 가족이 흩어지고 가정이 파괴되었으며 삶의 목적이나 희망을 잃었다. 그들의 승차 거부당한 삶을 누일 곳은 땅밖에 없다는 발견에서 이 시는 비장미를 느끼게 해 준다. 인정하기 어려운 참담한 삶의 하루하루를 지워 나가는 '무소유자의 미소'가 또한 그러하다. 수레바퀴, 두더지 같은 은유적 방법이 갈등의 수사가 되어 비장미를 받쳐주고 있다. 또 이 시에서는 융합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데, 이것이 역으로 사랑과 화합을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적지 않은 시들이 당위의 갈등에서 빚어지고 있는 비장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데, 이기철의 [봄]은 갈등과 불화의 겨울을 극복한 봄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긴 자들만이 초대받을 수 있는 것이 봄이다
이긴 자들에게만 몸을 열어주는 것이 봄이다
아무도 먼저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먼저 가 꽃 피워놓고 기다리는 것이 봄이다
아무 것도 나는 것이 없는 곳에
새와 나비를 마중 보내는 것이 봄이다
들판의 기다림을 위해 강물을 보내주는 것이 봄이다
어제 길 끝에 앉아 기다리던 사람을 위해
연두빛 언덕을 내려보내는 것이 봄이다
움 트는 것들의 손등을 스다듬으며
햇볕의 이름표를 달고 쫓아온 것이 봄이다
꼭꼭 채운 얼음의 단추를 따고
그 굳은 결의의 옷고름을 풀어주는 것이 봄이다
아무도 쓰러뜨릴 수 없는 눈더미를 쓰러뜨리고
흙과 돌에 새 순 돋게 하는 것이 봄이다
낯선 것들을 낯익은 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맨발로 마중 가도 발 아프지 않은 것이 봄이다
작은 삶이 큰 삶을 껴안는 것이 봄이다
                             ―이기철, [봄] 전문

이 시는 봄을 정의하고 있는 양태를 취하고 있다. 즉 '∼하는 것이 봄이다'의 반복이 이 시의 기본 구조이다. 연 갈이도 없이 반복되는 이 형식은 봄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대체로 융합과 사랑의 세계이다.
봄이 몸을 열어주는 것, 얼음의 단추를 따고 옷고름을 풀어주는 것, 눈더미를 쓰러뜨리는 것, 작은 삶이 큰 삶을 껴안는 것 등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은 융합의 세계로 규정하는 것이며 꽃, 새와 나비, 강물, 연두빛 언덕 등을 베푸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당위적 사실들이 갈등을 일으켜서 만드는 비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즉 갈등과 대립이 극복된 지점에 시선이 모여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규정되고 있는 봄은 사실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관념적으로 규정되어져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봄은 분명 융합과 사랑으로 반복적으로 정의되고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그 융합과 사랑도 실천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직 겨울인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비록 봄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미소유의 것이며 또 그 도달이 불확실한 것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봄의 아름다움은 역시 갈등의 겨울에서 빚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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