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놀이 시학

아리박 2013. 11. 13. 10:19

             놀이 시학

                                                                                         서범석(시인, 문학평론가)

 

 

1. 놀이 인간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앞서 인간이 한 평생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일’과 ‘놀이’의 연속적 시간구성체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과 놀이의 교직(交織)이 인생”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생에서 ‘놀이’의 중요성은 그 양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자못 심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그의 역저 ?호모루덴스?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에 관한 새롭고 본질적인 특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 Man the Player)으로서의 인간존재 규명이라 할 만하다. 그는 고대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나 현대의 호모파베르(Homo Faber)의 개념보다 ‘놀이인간’의 개념이 보다 본질적이고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보다 ‘놀이하는 것’을 더 중요한 인간존재의 한 특성으로 보는 것이다.

호이징하는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발생하고 전개되었다는 확신으로 놀이를 생리현상이 아닌 ‘문화현상’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 형식을 가지고 있다. 곧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놀이는 ‘하나의 의미 기능’이며, ‘사회구조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놀이인간’이며 우리의 문화예술 역시 ‘놀이의 자손’인 것이다. 

 

 

 

2. 놀이의 특성

 

 

  놀이의 형식적 특성을 호이징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성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아이와 동물은 놀이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논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그들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되고 중지될 수 있다. 놀이는 결코 임무가 아니다. 놀이는 ‘자유시간’에 행하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의 특성은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의 창조과정에 그대로 대응된다. 그리고 그 결과 ‘자유’라는 정신적 내용물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시의 소재나 주제는 무한 자유의 그것이다.

  둘째, 일상적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다. 오히려 놀이는 ‘실제의’ 삶에서 벗어나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 활동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놀이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이 아니라는 점에서 놀이는 필요와 욕망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휴식으로서의 놀이는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삶을 가꾸어 주고 확대시켜 준다. 예술(시) 역시 어떤 욕망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창조로서 우리의 정신적·정서적 삶을 넓고 깊게 경작한다.

  셋째,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 구분된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제약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은, 움직임이 모든 것을, 이를테면 감정의 고양과 하강, 전환, 일정한 순서, 연결과 해체를 지배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놀이는 새로 만들어진 정신적 창조물 혹은 정신의 보석으로 남게 된다. 이것은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으며, 이러한 반복 가능성은 기본적인 성질로서 놀이의 내적 구조에도 해당된다. 놀이의 요소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긴장, 평형, 안정, 전환, 대조, 변주, 결합과 해체, 그리고 해결 등은 그대로 미학적 개념들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제약성과 내적 구조는 문학예술의 그것과 직접적으로 대응된다.

 

 

 

3. 놀이와 시

 

 

  많지 않은 양이지만, ?호모루덴스?에서 호이징하는 ‘놀이와 시’의 관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다른 문화 영역에서는 “그렇게도 분명했던 놀이와의 연관성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반면, 시인의 기능만은 여전히 그 태어난 곳인 놀이 영역 속에 굳건히 남아” 있다고 하면서 놀이와의 관계가 ‘시의 원초적 본질’임을 말한다.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을 라틴어 바테스(vates), 즉 신들린 사람(악마에 홀린 사람, 헛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상관없이 시인의 기능은 항상 놀이 형식에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책은 각 민족의 제의(祭儀) 고찰을 통하여 시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탄생하고 있음을 설파한다. 모든 시는 ‘놀이’ 즉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라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조롱․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호이징하는 언어의 운율적·대칭적 배열, 운율 맞추기, 의미의 고의적 가장(假裝), 어귀의 인공적 배열 등의 ‘시의 형식’과 시구의 전환, 주제의 전개, 분위기 표현 등에 보이는 ‘창조적 상상력의 구조’의 유사성을 제시한다. 그는 또 은유도 ‘낱말에 기초한 놀이’라고 보고 있다. 본고는 ‘은유’가 문학의 수사적 표현 방법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예술문화의 기본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단어로 감싸 주기를 즐기는 현대 서정시들은 예술의 정수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를 놀이의 한 양식으로 보는 설명은 인류학적 고찰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의 자의(字意)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동양에서 쓰고 있는 ‘詩’는 형성문자 또는 회의문자 두 가지 측면에서 풀이가 가능하다. 형성문자로 해석하면 ‘詩’는 ‘言 + 寺 (관청 시)’로서 뜻 부분은 단순히 ‘언어’이므로 시가 ‘언어로 된 예술’임을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회의문자로 보게 되면, ‘관청에서 쓰는 것과 같은 언어’로 된 문학이라는 뜻이 된다. 관청에서는 언어를 법이나 규칙에 맞게 사용한다. 즉 시는 정해진 규칙에 맞게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인데 고전시가들이 모두 정형률을 가지고 있음이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규칙으로서의 운율의 기본구조는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적 규칙성은 또한 놀이의 기본적인 특성인 것이다. 또 ‘寺’를 ‘관청 시’로 보지 않고 ‘절 사’자로 읽으면 사원(寺院)이라는 뜻으로 ‘신성한 즐거움의 장소’가 되므로 시는 신성한 즐거움을 주는 언어라는 뜻이 된다. 놀이의 목적 또한 즐거움인 것이다. 시와 놀이는 이와 같이 혈연적 동질성 속에 존재한다. 서양에서 시를 이르는 poem이나 poetry의 어원으로 ‘만들다’의 뜻인 poiein을 말하고 있는데, poiesis(행하는 것, 만드는 것)가 곧 시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도 시는 언어로 만드는 ‘창조적 놀이’로 풀이할 수 있겠다. 요약하면 문학이란 ‘창조적 고급 말놀이’라고 할 수 있고, 시는 그 정수(精髓) 또는 정화(精華)라 하겠다. 두루 알듯이 문학사에서 ‘시’라는 용어는 긴 동안 ‘문학’이라는 뜻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한국어에서 ‘시’를 뜻하는 가장 가까운 말로 ‘노래(歌)’를 상정할 수 있다. 이는 국어사에서 ‘놀>놀개>놀애>노래’의 변천과정을 거쳐 왔다. 여기서 ‘놀’은 ‘놀음’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시는 ‘놀이’에서 시작되었음을 추정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의 모태는 놀이인 것이다.

 

 

 

인간들의 언어가 어언 소들의 언어가 되었다.

소들의 언어가 어언 말들의 언어가 되었다.

말들의 언어가 어언 호랑이들의 언어가 되었다.

호랑이들의 언어가 어언 고양이들의 언어가 되었다.

고양이들의 언어가 어언 새들의 언어가 되었다.

새들의 언어가 어언 나무들의 언어가 되었다.

나무들의 언어가 어언 꽃들의 언어가 되었다.

꽃들의 언어가 어언 풀들의 언어가 되었다.

 

희망의 언어가 어언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

절망의 언어가 어언 죽음의 언어가 되었다.

 

언어가 어언 언어했다.

어언이 언어 어언했다.

                               ― 최승자, 「언어가 어언」 전문

 

 

 

  우리는 이 시의 의미나 주제를 쉽게 읽어 내기는 어려워도 작품 전체가 ‘말놀이’의 모습으로 되어 있음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의 언어가 어언 ∼의 언어가 되었다.’는 문장구조가 거의 전편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데, 어떠한 말놀이를 보아도 이러한 반복적 요소가 기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에 해당하는 내용은 ‘인간 → 소 → 말’ 등으로 전환되면서 열거된다. 이러한 열거법 역시 일종의 반복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놀이의 특성이기도 하다. 열거내용은 크게 보아 ‘동물 → 식물’ 또는 ‘大 → 小’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거기에는 상승이 아닌 하향의 놀이의 규칙이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제2연에서는 ‘희망 → 절망 → 죽음’의 과정이 그려지고 제3연에서는 ‘언어 → 어언’으로 뒤바뀌어 결국은 중심어 ‘언어’가 파괴되었다. 여기서 ‘언어’는 소통력의 상실이나 언어 주인의 멸망적 상황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나 시의 본질상 정답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시가 재미있는 반복과 열거라는 ‘말놀이’를 통하여 어떤 고차원적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인하면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시는 이러한 놀이적 특성 속에서 창작되고 또 창작된 작품은 그 놀이적 특성을 얼마든지 추출해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4. 시와 놀이의 공통적 특성

 

 

  시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본질적 특성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본고는 이러한 시의 몇 가지 특성을 놀이의 특성과 비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시는 담화(談話, discourse)구조로 되어 있다. 어떤 대상(object)에 대하여 화자(話者)가 청자(聽者)에게 말을 건네는 구조인 것이다. 즉 ‘대상→화자(작가)→발화(작품)→청자(독자)’의 경로를 거치면서 그것들의 역동적 관계에서 탄생된 문학적 담화가 시다.

모든 놀이 역시 담화를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운동놀이이든 환상적 놀이, 집합놀이 또는 이야기 듣기 같은 수동적 놀이이든 일단은 담화에 의해 시작되고 또 진행된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언어능력이 발달하면 순수한 언어놀이, 예를 들면 수수께끼, 말 잇기 놀이, 퀴즈, 삼행시 짓기 등의 놀이를 하게 된다. 놀이의 고급 단계인 말놀이가 시적 담화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비논리성(非論理性)이다. 시는 상상과 정서의 산물로서 극히 주관적 속성을 갖는다. 조동일의 용어를 빌린다면 ‘세계의 자아화’이다. 자아가 밖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변주하는 것이 시의 본질인 것이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김광섭, 「마음」)이라는 비유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는 상징도, ‘남들은 自由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服從을 좋아하여요.’(한용운, 「복종」)라는 역설도 모두 비논리적인 표현임에 틀림없다. 놀이도 그렇다. 대표적 놀이라고 할 수 있는 ‘가위 바위 보’ 놀이만 보아도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우연이나 자유에 의하여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다. 피아제(J. Piaget)가 말하는 놀이 유형 중에 상징놀이(symbolic games)가 있는데, 이는 실제와 상상적 요소간의 비교를 수반하는 놀이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이가 풀잎을 시금치라고 부르면서 먹는 척할 때 상징이 유발된다. 이때 표현물(signifier)과 표현된 것의 관계는 전적으로 주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아이는 ‘척’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나 놀이가 똑같이 비논리적인 사유의 산물인 것이다.

  셋째, 개별적 다양성이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언어로 형상화한 예술이다. 루카치(Georg Lukàcs)는 ?현대리얼리즘론?에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초점이 되지 않는 내용은 없다. 문학의 주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언제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시 또한 ‘인간’을 가지고 인간을 탐구하고 나아가 새로운 인생창조를 가장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다루는 예술 장르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시에 나타난 인간은 그 작품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것이다. 개별적 삶의 표현이 작품마다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 다양한 삶의 의미와 색깔에서 흥미와 미적 쾌감을 느끼며 작품을 향유하게 된다. 놀이 또한 그러하다. 크게 보아 어린이의 놀이를 기능놀이(감각 운동 놀이), 가작화(환상놀이), 수동적 놀이, 구성놀이, 집합놀이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겠지만, 이 유형들의 하위분류는 그야말로 사람 수보다 훨씬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놀이 시간이 인간들의 즐거움의 동산이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넷째, 고도의 압축성(壓縮性)이다. 시적 담화의 커다란 특성은 사물과 언어 관계가 내포적(connotation)이라는 것이다. 대상을 포착하는 우회적 방법을 통하여 함축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상징적이고 난해한 역동적 가치의 언어구조물이다. 따라서 시는 짤막한 형식으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조명하는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실체이다. 모든 놀이 또한 단순하고 단편적인 장면을 반복하면서 인생의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를 즐기게 되는 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음악성과 조형성이다.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하여 시는 특히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자질이 두드러진 언어조직체이다. 시의 표현 매체인 언어는 형태, 음운, 통사의 특질에 따라 음악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 음악성의 기본 자질은 반복인 것이다. 놀이의 기본 특성도 반복에 있다. 피아제가 놀이의 유형을 셋으로 구분할 때 그 첫 번째가 반복놀이(practice games)이다. 이는 놀이의 특성이 반복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형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시는 비과학적 언어 사용으로 의사진술(擬似陳述, pseudo statement)의 형태를 띠게 된다. 엘리어트(T. S. Eliot)의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objective correlative) 역시 감정, 경험, 정서, 깨달음 등을 담아내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조형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의 유기적 연쇄구조가 한 편의 시가 되기 때문에 선명한 조형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조형성 역시 놀이의 기본적인 특성이라 할 만하다. 모든 놀이는 일단 조형성 안에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놀고 있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이며, 많은 놀이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와 같이 음악성과 조형성은 시와 놀이의 동일한 특성인 것이다. 본고의 논리대로 말하면 원조인 놀이의 그러한 특성을 시는 핏속에서 물려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대 나를 참으로 생각는다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사랑하게 하지 말라

사랑은 뿌리 없이 쓸쓸해지는 일

땅거미 지는 마당을 서성이는 일이다

홀로 긴 둑을 걸어가는 일이다

강물에 돌을 던지는 일이다

미워지는 일이다

미워서 내가 자꾸 짐승처럼 불쌍해지는 일이다

내가 자꾸 불안한 짐승처럼 광폭해지는 일이다

발톱이 길어나고 피 맛이 그리워져

산등성이의 늑대처럼 울부짖는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를 보내고 돌아서서

                               ― 이 경, 「사랑하게 하지 말라」 전문

 

 

  이 시는 ‘나’라는 화자가 ‘그대’라는 청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담화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아픔에 대해 말하면서 ‘나로 하여금 그대를 사랑하게 하지 말라’는 비논리적 역설을 구사하고 있다. 그대를 보내는 일을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또 개별적 사랑의 다양한 양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사랑의 의미가 깊고 강하게 함축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사랑의 아픔을 ‘∼ㄴ 일이다’로 반복하여 음악성을 드러내고, 짐승 이미지를 통하여 ‘아픔’의 통렬함과 원초적 본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시는 그 특성을 놀이에서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5. 고급 말놀이의 정수

 

 

  이상에서 본고는 호이징하의 ?호모루덴스?에 기대면서 ‘놀이인간’으로서의 인간 존재, 놀이의 특성, 놀이와 시의 관계 등을 살피고 떨어질 수 없는 둘 사이의 융합적 특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것은 놀이와 시가 원초적 혈연관계라는 것이고 따라서 시의 놀이적 성격은 숙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고는 시란 ‘고급 말놀이의 정수’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은 말놀이꾼이 되어야 하고 독자 또한 말놀이에 저절로 참여하는 것이며 깊게 참여하는 것이 시에 대한 감상이며 비평이라 하겠다. 시는 놀이이고 이것의 노는 법과 즐기는 법이 시학이다. ‘놀이시학’인 것이다. 놀이라고 하니까 그것을 경박하거나 유치한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급’인 것이고, 시인은 고급을 지향하는 말놀이를 하는 사람이다. 다만 시의 놀이로서의 성격을 어떻게 잘 살려낼 수 있는가를 고민할 일이다.   - [문학세계], 2010.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