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예술(意味藝術)로서의 시
사물이나 존재의 실재성(實在性)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립적 개념의 두 개 원리를 응용하는 이원론(二元論)은 의미 있는 전통적 인식의 수단이다. 동양의 음양론은 음과 양의 이원적 대립 원리로서 우주만물을 인식하려는 대표적 이원론이다. 이러한 이원론을 예술에 적용할 때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념은 '내용'과 '형식'이다. 사실 모든 예술은 이 두 개의 기본항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만물이 '안'과 '밖'으로 이루어져 있음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말처럼, 예술이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것으로 상정할 때, 그것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주기능으로 하는 장르가 된다. 이는 '무엇을' 표현했느냐의 문제보다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장르임을 뜻한다. 그리하여 음악, 미술, 무용 등 대부분의 예술 장르들은 내용보다 형식적 창의성을 기본으로 하고 또 거기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도 예술의 하위 장르라고 할 때, 그 존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 요소를 적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또 그렇게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은 그 표현 수단인 언어의 특성 때문에 여타 예술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가지게 된다. 즉 언어 또한 의미라는 내용과 소리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언어에서의 '의미'만큼 구체적 개념상을 가지는 내용적 재료를 여타 예술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형식적 아름다움을 기본적인 것으로 하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의미의 지배를 떠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가 기본적으로 어려운 숙명을 가지고 있는 '의미예술'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순수의 예술 장르인 것이다. 문학의 이러한 숙명은 어떻게 보면 그것을 예술로서의 부족한 자질을 뜻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문학이 가지는 이러한 특질은 오히려 문학이 인간을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인간의 삶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특장(特長)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을 바라볼 때, 그것은 진정한 '인간 탐구'와 '인생 창조'의 예술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을 인생 탐구의 예술로 이해할 때, 현대시가 가지는 '보고 깨닫는 시'로서의 특성은 그 존재근거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시라고 하는 문학 장르가 주지하다시피 예전에는 '듣고 즐기는 시'였던 것이다. 이는 청각예술로서의 특성이 강조된 음악성을 바탕으로 시가 향유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할 때, 시는 단지 귀와 가슴을 필요로 했을 뿐이지 머리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는 어떻게 보면 귀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문자 정보를 보면서 가슴은 물론 머리로 향유하는 시의 시대임을 뜻한다. 아니 오히려 머리가 가장 중요한 시의 향수(享受) 수단이 된 것이다. 이렇게 머리로 시를 대한다는 것은,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수용가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 핵심은 '인간'일 것이다. 우주나 자연에 대한 깨달음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이것들은 결국 인간에 관한 깨달음에 포괄된다. 우주나 자연에 관한 깨달음이란 결국 인간을 위한 인간의 깨달음일 뿐이다. 인간을 뺀 우주나 자연에 대한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저절로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현대시에서 보이는 설명적인 부분, 감상적인 부분에 대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현대시는 인간에 대한 깨달음의 기호를 전달함으로써 그 깊이와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피상적 스케치나 철학적 설명이나 유아적 낭만 같은 것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그 효용가치가 다한 폐기물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은유다. 은유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장르가 시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은유라는 것은 시 또는 문학의 전유물은 아니다. 사실 언어라는 것 자체도 처음에는 하나의 은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은유는 단순한 언어나 수사적 차원을 넘어서 감정 사회 인격 언어 삶과 죽음 등에 관한 모든 종류의 사고와 관련된다. {냉철한 이성 이상의 것}(More than Cool Reason ― A Field Guide to Poetic Metaphor)의 저자인 레이코프(George Lakoff)와 터너(Mark Turner)는 은유의 지평을 이와 같이 확대하면서 은유를 하나의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개념적 영역으로부터 받아들인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은유란 목표영역(target domain)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료영역(source domain)을 끌어들여 짝짓기(mapping)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기본개념적 은유(basic conceptual metaphor)라는 새로운 은유의 갈래를 논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함께 나누는 공통된 개념 장치의 일부로서, 그것들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무수한 단어들과 관용적인 표현들 속에 널리 관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좋은 출발을 했다"고 하거나 삶의 선택 과정에서 "어느 길을 택해야 좋을지 모른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생을 여행으로 생각하는 기본 개념이 작용하는 은유 형태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와 같은 은유를 '인생은 여행이다(Life is a Journey) 기본개념적 은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본개념적 은유로서 '인간은 식물이다', '일생은 하루다', '인생은 연극이다', '시간은 도둑이다', '죽음은 떠남이다' 등의 수다한 종류들이 거례(擧例)되고 있다. 또 그 외에도 수많은 기본개념적 은유들을 우리는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인생은 여행이다 기본개념적 은유'를 실마리로 하여 최근에 발표된 시 작품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 길 가다 고단하고 해 저물면
가깝게 불러보는
정다운 이름 하나 있었으면 싶다.
지금쯤 어디선가
외로운 발걸음을
혼자서 재촉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마음 주고 받으면서
남은 길 길동무되어
먼 길 가다 고단하면
야윈 손목 마주 잡아
무거운 짐 나누어 지고 싶다.
― 이기반, [먼길 가다 피곤하면] 전문
가자
가자
진실의 길로.
가다가
실족하여 떨어지면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 해도.
지옥에 떨어지면
지옥의 진실을 따라
진실의 길로 가자.
― 이준범, [진실의 길로] 전문
예로 든 두 편의 시는 모두 인생을 길 가는 존재 즉, 여행자로 생각하는 기본개념 밑에서 쓰여졌다. 즉 '인생은 여행이다 기본개념적 은유'를 가지고 있는 두 원로 시인들의 작품이다.
앞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생의 길은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다. 여기서 '해 저물면'은 노년으로 읽혀지는데, 늙을수록 외로워지는 인생의 보편성을 읽는 동시에, 노년에도 '지금쯤 어디선가' 오고 있을 '길동무'를 기다리는 희망을 보게 된다. 건강한 노년의 정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반은 다른 시들에서도 [웃음꽃 피는 정원]을 벅차고 아름다운 꿈으로 그리고 있으며, [무지개꿈은]에서는 일곱 색깔 행복의 무지개를 목에 거는 동심을 꽃피우며 '세월을 되돌리는' 눈부신 작업에 몰두한다. 종착점이 가까운 그의 여행길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아름답고 건강한 노년 길을 가꾸고 있다. 이것이 노 시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준범의 시는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교훈적 성격의 경계(警戒)메시지이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는 깨달음인 동시에 그것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여행자는 실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고 어떠한 역경에서라도 진실의 길을 선택하여 여행을 계속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하나의 에피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노 시인의 깨달음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의 지혜일 것이다. 이 시인의 또 다른 시 [니미츠힐의 참극]에서 '믿고 산다는/어리석은 인간들의 참극을/언제 누가 마지막 막을 내리게 할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깨달음,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의 울타리]에서 보이는 '이 세상에서 어떤 소리보다도/슬프고 애통한 소리/그것은 가정을 배반한/어머니의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이다'라는 깨달음의 전언은 탈가정의 징후가 농후하게 드러나고 있는 작금의 우리 사회에 대한 예리한 약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들은 아무래도 너무 직설적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 깨달음의 내용은 경청할 만한 것이지만, 너무 쉽게 주제를 노출하고 있기 때문에 '숨김'이나 '낯설게 하기'라는 현대시의 특성에서 본다면 깨닫는 시간을 주지 않는 만큼의 깊이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박민수의 연작시 [나의 섬을 위하여]는 이러한 깊이까지 갖추고 있는 '보고 깨닫는 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맡의 탁상 시계 짹각짹각 시간 흐르는 소리를 냅니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문밖 멀리 물 흐르는 소리 들립니다.
잠시 눈을 감으면 두둥실 나도 흘러 어디로 가고 있음을 압니다.
비 오는 날 호수 위 맴돌며 노니는 백조 한 마리,
갈곳 없는가 손짓하여 부르면, 푸드득 깃소리 내며
그도 어디론가 가고 맙니다.
― 박민수, [시계] 전문
이 시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물, 백조 등의 자연 존재가 모두 '가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 자연 속에 인간인 화자도 '어디로 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역시 '인생은 여행이다 기본개념적 은유'인 것이다. 그러나 박민수의 이와 같은 깨달음이 남다른 것은 '자연과 함께'인 것이다. 여행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인생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운명은 인생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이 공동운명이라는 깨달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운명으로 우주 삼라만상이 묶여 있음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전일적(全一的) 우주관 즉 생태학적 세계관인 것이다. [삼라만상의 웃음소리]는 이러한 그의 깨달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깊이 있는 시이다.
그를 나는 무엇이라 이름 지어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숲길을 거닐 때 또는
내가 호숫가 버드나무숲을 거닐 때 작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바닷가 모래밭을 거닐 때 아침나절 창가에 서서
먼산을 바라볼 때 언제나 내가 홀로일 때
가까이 다가와 숨소리를 내며 나의 침묵을 깨우는
그를 나는 무엇이라 이름 지어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바라보면 그 모습 보이지 않는데 언제나 그는
나에게 있느니,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오후 한나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창포꽃 가득핀 들길을 허청허청 거니느니,
뭇새 한 마리 앞서가며 까불까불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우습다고 그가 먼저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흔드네. 허허. 잠시 나도 따라 웃으니
와르르 여기저기서 고개를 쳐드는 삼라만상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 그에게서 비롯되니,
그를 나는 무엇이라 이름지어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 박민수, [삼라만상의 웃음소리] 전문
여기서 시적 탐구 대상은 '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는 '그'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인 우리는 화자가 말하고 있는 '그'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화자는 끝까지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Irony)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모순.충돌하는' 내용을 표현하는 현대시의 주지적인 표현 기법인 아이러니를 통해, 화자는 '그'에 대해 알면서도 모른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나타난 '그'에 대한 정보를 간추려 보면, 내가 홀로일 때 다가와 침묵을 깨우는 존재이며,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언제나 나에게 있으며, 삼라만상의 웃음소리가 그에게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요약하면 삼라만상의 웃음소리의 원인이 되는 화자의 내면에 있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숲, 호숫가, 모래밭, 들길 등의 자연과 화자인 인간을 하나로 묶는 의식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태학적 세계관이다. 이러한 전일적 우주관이 인간의 의식세계를 지배할 때, 삼라만상은 웃음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볼 때 거기에는 웃음이 아닌 파멸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질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그 찌꺼기로 인해 인간도 자연도 웃음이 아닌 파괴의 울음바다에 빠지고 마는 것이라는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깨달음을 표면적으로 또는 직설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아이러니의 미학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깊이 있는 감동의 인생학으로 독자를 초대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와 인생을 흑백 논리가 아닌 양가적(兩價的 ; ambivalent)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또 하나의 표현 기교로서 패러독스(Paradox)가 있다. 아이러니는 표면적 진술 자체에는 모순이 없지만, 패러독스는 표면적으로 모순되는 양 보이는 진술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 진실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박민수 시인은 이러한 패러독스도 효과 있게 구사하여 시의 깊이를 만들고 있다. 그의 [거기에는]에서는 '나 홀로 있는 거기에는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는 패러독스를 통하여 바람, 잎새, 달, 참나무, 벌레 등의 자연과 하나가 되는 화자의 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붕어 2]에서도 '길은 있어도 갈 수 없는 붕어들의 나라, 그곳에 가면'이란 패러독스를 구사하고 있다. [돌멩이]이란 시에서는 '오호라, 속빈 곳 한 군데 없으니, 네가 무슨 아픔이 있으랴'라는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생태학적 세계이며, 그곳은 우주적 동일화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의 나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생태학적 세계관이라는 박민수 시의 내용은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라는 시적 형식을 얻음으로써 깊이 있는 깨달음의 시가 되어 인생 탐구 및 인생 창조라는 의미예술로서의 시가 가지는 본질적 자리에 높게 서게 되는 것이다.
윤제림의 시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의 [백담계곡을 내려오며]는 무척 재미있는 시에 틀림없다.
1
꼬리를 치며 따라붙는 여자
잘 되었다, 불알 밑에 힘을 돋우며
손목도 잡아보고, 쓸어안아도
가만 있는 여자
입에는 새하얀 거품을 물고 쉴새 없이 재깔이며
눈웃음도 치며
속치마도 잠깐 잠깐 내보이며
산길 이십리를 같이 걸어내려온 여자.
2
인간의 여자라면 마을길 이십리 쯤 더 따라 내려왔을 텐데요, 그 여자는 한 걸음도 더는 내려오지 않습디다요. 못된 년, 망할 년 욕이 나왔지만요, 내 탓이지요 뭐. 그녀의 말을 한 마디도 못알아 들었으니까요. 말도 안통하는 사내 따라나설 계집이 어디 있겠어요. 말귀만 좀 통했으면 집에까지도 데려올 수 있었을텐데요.
― 윤제림, [백담계곡을 내려오며] 전문
이 시는 백담계곡을 내려오며 그 감상을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그 감상은 백담계곡이 '가지고 싶은 미인'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니까 계곡을 의인화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로 인해 '꼬리치며 따라붙는 여자'나 '거품 물고 쉴새 없이 재깔이며/눈웃음도 치는' 여자의 이미지가 탄생되었다. 백색 암반을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백담계곡을 미인의 이미지로 잡았을 때, 집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아쉬움이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감할 수 있는데, 그러한 마음이 제2장에 나타나 있다. 백색의 암반 위를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내설악 백담계곡의 절경을 미인으로 형상화한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인화와 더불어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 시는 거의 끝까지 백담계곡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고 어느 여인과의 우연한 데이트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내용은 백담계곡이라는 자연을 하나의 인간으로 동일화한 것이고, 형식적으로는 의인화를 통한 아이러니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본 박민수의 시 세계와 매우 흡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민수가 우주적 상상력으로 깊이를 마련했다면, 윤제림은 보다 작은 상상력을 통해 재미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이행의 [갈대 Ⅱ]도 의인화된 은유가 돋보이는 시이다.
遲遲한 세월
가슴 조이며
애타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달이 난
여인의 몸부림이다
계절이 떠나버린
황막한 빈자리 외로 서서
목이 타는 그리움을 안고
울부짖는 生靈이여
― 이이행, [갈대 Ⅱ] 부분
이 시도 갈대라는 자연물을 그리움에 '안달이 난/여인'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에서 발견이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발견의 내용만이 단조롭게 제시될 때, 그것이 훌륭한 시의 가능성은 될 수 있을지언정 깊이나 재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사물시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시는 랜섬(J. C. Ransom)의 말대로 사상 및 관념을 배제하고 단단하고 정확한 이미지(dry-hard image)를 사용함으로써 사물의 성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초점을 둔 일종의 순수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비록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지만으로는 독자의 영혼을 감동시키기 어렵다. 거기에 깊이 있는 의미가 융합될 때 의미예술로서의 시가 갖는 특장(特長)을 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정성태의 [바다]도 의인화된 은유를 시적 장치로 하고 있다.
지성의 전진은 폭풍의 노동과 함께 상실되고
너는 만족하지 않는 질문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마치 단절과 규제를 모르는 듯
이제 저녁 노을이 적막하다
그리고 네 기묘한 알몸도 금빛으로 한가롭다
― 정성태, [바다] 부분
이 시도 자연물인 바다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시와는 다르게 어떤 의미를 덧붙이고자 하는 포오즈를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다의 이미지와 함께 인생의 의미도 되새겨 보게 된다. 그러나 그의 다른 시들은 그 의미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경우가 있음을 본다. 사물시를 쓸 때에 이러한 그의 태도는 '존재'라든지 '죄' 등의 관념을 제재로 했을 때에는 더욱 사변적으로 변하고 있다. [죄와 용서에 대하여] 같은 시는 자칫 논설문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시가 의미예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경한 관념을 주장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본고는 지금까지 시의 본성을 의미예술로 잡고, 그러한 본질을 드러내는 현대시의 특성이 '보고 깨닫는 시'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최근에 발표된 몇몇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이러한 현대시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시가 독자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는데, 단순히 깨달음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 스스로가 깊은 사색을 통하여 깨닫도록 하는 문학적 장치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는 랜섬이 말한 시의 세 가지 유형 중 '형이상시'에 가까운 개념이 될 것이다. 그는 형이상시를 은유나 내포적 언어를 통하여 시의 제재를 독자들로 하여금 새롭게 인식케 하는 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총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아무튼 시라고 하는 언어예술은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의 결과를 독자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고 나아가 새로운 인생창조의 모색을 요구하여야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독자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 있는 여합부절(如合符節)의 문학적 장치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피상적 서술이나 옷에 맞지 않는 무거운 철학적 언사나 설명, 유치한 감상이나 낭만 같은 것은 시의 이름에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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