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나무 문학론

아리박 2013. 12. 18. 18:48

              나무 문학론


 이 세상엔 나무라는 존재가 있어 우리와 같이 살아갑니다.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무와의 인연을 아주 끊어버리고 살 수 없었습니다.늘 나무와 함께 살아오는 삶이었습니다.나는 나무가 늘 좋았습니다.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좋았습니다.그러나 나무는 내 삶의 긴박한 존재이유는 아니었습니다.내가 나무에 대해 무심히 살아가듯 나무도 내게 그냥 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그러니까 나무는 내가 걸어가고 내가 뛰어가는 내 인생 행로의 그 어디에라도 늘 거기 언뜻언뜻 비치던 무심한 사물이었습니다.그러나 그 무심한 친구가 내 인생길의 모퉁이마다 늘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하면 내가 지치지 않고 내가 좌절하지 않고 살아오는 데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음을 오늘 나는 비로소 깨닫습니다.무심한 가운데 나무에 대해 막연한 존경심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표현이 좀더 간명할 것 같습니다.
문학은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오늘 내게는 그렇게 보입니다.깊어가는 가을 숲 속에 서 있는 나는 아무래도 저 나무 만큼 좋은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저 나무가 저렇게 부드러운 가슴으로 나를 안고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딱딱한 회의에 참가하는 것보다는 부드러운 깊이를 가지고 있는 이 숲 속을 거닐어야 하겠습니다.나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숲 속은 매우 조용하고, 나와 함께 자유의 시간입니다.이 시간 나무는 아무래도 한 편의 시입니다. 나의 이러한 생각들을 요즈음의 시들을 예로 들면서 더듬어보고자 합니다.

시는 시인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나무는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듯이 시인은 시를 창조하였습니다.그래서 시인은 제이의 창조주이며, 하느님의 피조물을 다시 창조하는 창조의 완성자입니다.신의 능력만으론 아직 이 세상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시인이 그 세상을 재창조합니다.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시인은 유에서 또다른 유의 세계를 창조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창조,명명,예언 등에 권위를 인정합니다. 한국에도 권위있는 시인이 많습니다.그 중에서 한 사람,먼 상상력을 동원하여 누구보다도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는 원로 시인 박희선, 그는 옛 만년장 터 위에 리바이벌 리베랄리즘을 세우고 있군요.

춤은 춤이라도 탈 벗긴 알몸
50년 문턱 스쳐나온
구렁.자취없을 뿐이지만
오늘과 같은 나이 오늘과 같은
볕살 24시.밤낮 없어진
꿈 열려있는
공간, 느낌의 형성(形成)
깨달을 수 없었던
그 때 그 자리
이중섭 그림 읽을 수 없었던
그 자리, 느낌이라는
공간 미묘하게 자극하던 그 복사꽃 알몸!
           -- <<自畵像 후렴,리베라리스트!>> (朴喜宣)의 일부

이 시의 창조자인 시인은 밤과 낮도 소멸시키고, 느낌의 공간 속에 아름답고 신비한 시간의 그림자를 빚어내고 있습니다.이 공간은 아니, 공간성의 울림은 옛날의 그 공간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새로 만든 시인이 창조한 공간, 그 공간의 울림인 것입니다.신이 나무를 만들었듯이 시인은 시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뿌리가 있고,줄기와 가지가 있고,잎이 있어서 나무입니다.다시 말하면 각각의 부분들이 생명을 함께하며 어울려 있기 때문에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시도 그렇지요.행이라든지,연 또는 시어,운율 또는 이미지 등이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되어 조직적 전체를 이루는 유기체가 아니겠습니까.

인기척에 잠을 깬 별들은 이불 속에서 눈을 비빈다.
어젯밤의 발자국 아직도 그대로 하늘에 떠 있고
이슬에 젖은 나뭇잎이 푸른 머리카락을 풀어 헹구는 새벽
새들도 첫차를 타고 일터로 나간다.
꼭두 새벽부터 밤늦도록까지 나부대며
날마다 눈물에 말아 먹는 밥 혹은 희망
한쪽 귀 떨어져나간 새벽달 주워서 호주머니에 넣고
동전소리 짤랑거리며 어두운 골목길 더듬어 뛰어갈 때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에 흔감하면서
시린 새벽 별빛 한 주먹 집어 길바닥에 뿌리며
서둘러서 나서는 길은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는다.
           ---<<새벽별>> (김석규)의 전문

이 시는 새벽별과 함께 살아가는 부지런한 생활인의 모습을 암시적으로 그렸습니다.그리하여 별이 떠 있는 하늘과 사람이 살아가는 땅의 교감을 통하여 그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습니다.사람이 깨면 별들도 깨어나는 제일행의 모습이며,사람이 일터로 나가는 새벽이면 하늘의 새들도 첫차를 타는 것이며,하늘의 귀떨어진 새벽달이 사람 주머니 속 동전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며,별빛 한 주먹 집어 길바닥에 뿌리는 사람과 별의 공생감 등은 모두 같은 줄기에 매달린 잔가지들일 수 있습니다.또한 이 시의 이러한 하늘과 땅의 교감은 '부지런함의 이미지'로 연결됨으로써 그 내적 구조의 탄력을 얻고 있습니다.즉 제이행에서 느껴지는 늦도록 일하는 모습과 시 전반에서 감지되는 일찍 서둘러 일터로 나가는 오늘 새벽이 또 하나의 줄기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인 것이지요.그리고 '눈물에 말아 먹는 밥'에서 알 수 있는 '가난한 삶'이 다른 줄기들과 함께 그 끈끈하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은 리듬까지 '새벽별'이라는 희망의 전체 속으로 수렴되는 부분이 되어 한 그루의 나무로 유기체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뿌리,줄기,잎 등의 부분을 다 갖추고 있어도 생명력이 없는 나무가 있습니다.그것은 죽은 나무이거나 만들어(또는 그려) 놓은 나무일 것입니다.죽은 나무는 이미 생명이 없어진 것이므로 더 이상 나무일 수 없는 것이며,만들어 놓은 나무는 처음부터 가짜이므로 진실성이 없는 것이지요.겉으로만 사람의 눈을 속여 나무인듯 하지만 하나의 종이이거나 막대기 아니 쓰레기에 불과한 가짜 말입니다.우리의 시들은 일찍 죽어 버리는 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특히 가짜, 즉 시의 이름을 빌려 횡행하는 욕지거리,선전 문구,낙서 등 이른바 사이비 시들을 철저히 가려내고 그것들에 속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있는 시란 어떤 것일까요.그거야 시는 나무라 했으니까 살아있는 나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그것은 잎에 엽록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뿌리로부터 물을 흡수하고,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는 것, 그리하여 성장하며 꽃,잎 등을 피워낼 수 있는 자생적인 변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그렇습니다.흙에 뿌리박고 나무가 서 있듯이 시는 인간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제재를 건져내야 합니다.이를 바탕으로 하여 광합성 작용을 하여야 합니다.광합성 작용이란 나무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작용인 것처럼, 시에 있어서의 광합성 작용이란 시의 생명 즉 예술적 구조미가 빚어내는 감화력이라 할 것입니다.이러한 광합성 작용은 나무 자신에게 엽록소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시는 우선 자신의 체내에 엽록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그것은 상상력입니다.상상력이 없이는 예술적 감응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시인도 독자도 시도 모두 상상력의 덩어리들입니다.시 속에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장치가 있습니다.이 장치에 의해서 광합성 작용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그것은 자아화된 세계일 것입니다.이 시적 세계가 바로 광합성 작용을 일으킬 것이지요.햇빛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광합성의 요소가 아니겠습니까.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미적 이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꺼지지 않는 빛입니다.인간에게 이러한 빛이 없었다면,예술이란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작가 또는 사회가 갖는 이상적 아름다움의 세계 그것이 갖는 힘이 바로 광합성 작용의 빛일 것입니다.또 하나가 있어야지요.공기 중의 이산화타소.그것은 작가의 환경이 길러낸 의식 또는 세계관이겠지요.그러니까,작품의 예술미라는 것은 인간 현실에서 선택한 제재를,미적 이상에 따라 상상력이 창조한 아름다운 구조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대 안에
이 몸 갇히우니
이 강산 낙화유수가 벽이네
이 풍진 세상이 벽이네
그대 안에
꽁꽁 갇히우고 갇히우니
흐르는 눈물로 벽을 문지르네
타는 입술로 벽을 문지르네
그대 안에
갇히운 이 몸
마침내 불꽃으로 타네
부끄러움도 치욕도
한 점 그으름 없이 타오르는
순수산화
황홀한 불꽃으로 타네
           --<<벽>> (許炯萬)의 전문

그대란 무엇인가요.떨어지기 어렵고 떨어지면 만나고픈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그대'라 부르지 않았던가요.행복이란 이름, 욕망이란 이름, 우리는 그런 것들을 그대라 부르고 있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대에게 붙잡혀 스스로 갇힌 우리들의 모습을 찾아냄으로써 이 시인은 진짜를 우리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것이구요.가짜 나무가 아니기에 이 시는 생명력을 갖는 것이지요.시인 허형만의 상상력은 독자들 개인마다의 세계에 하나씩의 벽을 만들어 주었군요.그렇습니다.우리들 인간이란 욕망의 벽 속에 갇히면 이 풍진 세상이 모두 괴로움의 바다로 되는 것, 그 속에서 눈물로 입술로 갈구하는 목마른 사슴이 되는 것 아닐까요.이 고통의 극점에서 상상력은 또 불을 훔쳐오는군요.이 불은 빛입니다.광합성을 위한 하늘의 빛 말입니다.물론 뿌리에서 끌어올리는 물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인간 현실은 선명하게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그러나 분명히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이제 모일 것은 다 모였으니 광합성작용을 해야지요.황홀한 불꽃으로 '순수산화'를 하는 것이지요.불은 죽음의 혓바닥 아니면 변화의 욕망,아니면 안락한 휴식 또는 재생에 대한 꿈입니다.불에 있어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이러한 몽상을 G.바슐라르는 앙페도클 컴플렉스라고 했다지요.우리는 이 시의 광합성 작용이 이러한 몽상에 관련된 아름다운 생명력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시라는 나무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라는 각양각색의 물은 광합성 작용의 결과를 다양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우선 개인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똑같이 현실을 보되 '나' 즉 개인적 입장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우리' 즉 사회적 입장에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현실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는 작가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겠지요.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말입니다.우선 문충성의 다음 시를 보기로 하지요.그의 시는 시마다 겨레 또는 국가를 잊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근심과 걱정이 서려 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아주 자그만 했을 때
내게 일렀다 글을 익혀 글 세상에서
환하고 밝은 세상 깨우치며 살라고……
글을 배우고,ㄱ,ㄴ,ㄷ……
글 세상에서 평생을 줄곧 살았어도
잘못된 글을 배웠을까
너무도 캄캄한 세상
휘황찬란한 전깃불 네온사인 아무리 밝아져 가도
세상은 어둑어둑
푸른 하늘도 어두워 가고
새 소리도 어두워 들고
살아도살아도 세상은 캄캄해 가는구나
           ---<<캄캄한 글세상>> (文忠誠)의 일부

이 시의 '세상'은 다름아닌 현재 한국의 세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그러나 화자는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인양 지껄이고 있습니다.글 모르던 할머니는 글 배워 밝은 세상 살라고 했는데,글배워 산 이 세상이 '살아도살아도 캄캄해 가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짐짓 자신이 배운 글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그러나 독자는 세상이 어두운 것이 글에 있지 않음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그러니까 화자는 알라존이 되고 독자는 에이런이 되는 아이러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그러나 에이런이 된 독자도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에 말려들게 되어 있군요.그리고 알라존과 한 패가 되고 마는군요.그래서 '나'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가 되고 있어요.시인은 바로 이 사회, 이 나라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끌어올려 광합성 작용을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그는 다른 시들을 통하여 몸 파는 여자,제비,바보 온달,참새 등의 개인적 체험과 관계되는 사물들에서도 '나라'의 문제를 고민거리로 달고 떼어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묵직한 짐을 지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우리는 문충성의 충성스런 시선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다음 시는 재래적 우리를 보여주고 있어 또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치성 삼삭 오르던 젯상의 소지는
에미 애비의 눈씨울에서
오르다가도 떨어지고.

허공을 향해
백날을 대를 잡아도
조왕산은 한번도 오르지 않아.

칠대 남산꼴 죽은 외동 아들
생전에 생전에 숙이와 눈맞추던

저기 환한 백사의 돌밭에서
으이히히 한낮에
숙이와 웃고 살아
           -- <<病家의 꽃>> (朴栽陵)의 일부

이 시는 얼른 보면 개인적 현실을 다룬 것 같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순이의 정신병을 말하고 있으면서 그 병의 원인이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그러나 죽은 남산꼴 외동 아들의 혼령이 바람타고 순이를 찾아와 같이 놀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 생각의 바탕이 순이나 그 가족이라는 개인적 것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죽음이 영 죽음이 아니요 혼령이 육신과 분리되는 것일뿐이라는 생각하며,그 혼령이 살아있는 사람과 교감한다는 생각 등이 하늘과 땅,신과 인간의 경계를 무시로 드나들던 저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재래적인 우주적 의식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그러니 겉으로 보면 개인적 현실을 말하고 있는듯 해도 실은 전래적인 '우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립하여 움직이는 놈들이 지닌 것은
도무지 썩지를 않아.
꼿꼿한 오만의 프라스틱 젓가락
전망은 있는데
암펄의 독침으로도 뚤을 수 없는
유리의 투명한 허위.

기러기떼 서녁으로 기울면
먼제 가네,뒤에 오시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던지는
단풍나무 잎사귀들
가을비에 등이 시려운
배추벌레 한 마리.
           --<<짐승들의 계단 4>> (손종호)의 일부

인간들이 지닌 변함없는 오만과 허위를 깨닫는 서정적 자아, 그는 이 시의 뒷부분에 보이는 깨달음, 즉 기러기 우는 인생의 가을이 오면 우리 모두 떠나야 할 존재, 가을비 등에서 죽음을 재촉하는 한 마리 배추벌레의 운명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이러한 시적 현실은 그것이 개인적인지 아니면 사회적인 것인지 모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분명 '나'의 문제에 머무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적 또는 사회적 현실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그러니까 이 시의 현실은 '우리'의 문제이지만 사회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 인생의 문제라 하겠습니다.아마 이 시의 엽록소는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차가우리만치 날카로운 직관과 인식의 시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는
일상 속에
더러는 저녁이 열려있는 날도 있다.
그런날 밤에는
山川을 거닐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아주 잠을 설치는 밤에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일을
찾아내기도 하고
기억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기억해내기도 하고
괜히 마음 상한다.
           --<<記憶>> (全尙烈)의 일부

무론 대부분의 시는 일차적으로 개인적 현실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지요. 늙은 날의 범연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이 시는 노 시인의 인생처럼 결코 범상하지만은 않은 무게와 깊이의 어법으로 짜여져 있습니다.그런데 이 시는 아무래도 우리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 즉 '나'의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무료한듯 하지만 달관의 경지에 든 '늙음'의 일상을 담담하게 펼치면서 인생의 진실된 모습을 가르쳐주는 시라 하겠습니다.그것은 반성과 깨달음의 빛을 받아 인생을 통찰하는 여유와 질서의 세계를 광합성으로 빚어내는 세계라 하겠습니다.우리는 이러한 나무 밑에서 휴식과 사색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밤마다 때 아닌
맷돌이 도는 소리

풀을 쑤어 팔던 옛날의 감나무집 할매도 아니고, 녹두를 갈던 울엄메도 아니고 누군가가 솥두껑같은 손으로 맷돌질을 하고 있다.
윗돌 아구리에 회오리로 술술 빨려 들어가는 것이야 분명 있으리.저 봐, 통채로 뼈마디 들들 갈리는 소리

그 맷돌 도는 소리에
자다 벌떡 일어앉다.
           --<<맷돌 도는 소리>> (李文亨)의 전문

이 시의 물줄기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심리의 깊은 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시의 화자는 매일밤 꿈 속에서 맷돌에 뼈를 갈고 있는 끔찍한 모습을 봅니다.그리고 소름끼치는 그 소리에 자지러져 깨어나는 것입니다.그 맷돌질을 하는 솥뚜껑 같은 공포의 손은 무엇일까요.꿈이기에 망정이지 이것이 현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렇습니다.지금 서정적 자아는 소멸 또는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시인도 "아, 아무도 없는 데서 오는 절망감,갑자기 혼자가 된듯한 고독감,이런 감정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나를 본다."는 메모를 붙이고 있군요.꿈 또는 환영(환청)을 통해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이렇게 발견한 무의식의 세계에 뿌리를 대고 이 나무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이름하여 거세 콤플렉스라 하던가요.

봄이 끄슬린다.
사루비아가 회룡사 가는 길가에서
루주 바른 입술을 내민다.
수북한 연두빛 댑싸리는
순이 무명치마자락 내리고 청승으로 앉았다.
밤느정들이 개울가에 뿌우연 정액을 내뿜어
빨래하는 아낙 손끝에 흰 거품을 인다.
상추밭에 예쁜 똥개가 흘레붙었다.
개울 물소리가 가쁘다.
바람은 여름입김을 쏟아내고
속안까지 바짝 타들어가 휘젓더니
쪽! 봄을 빨아당기는 소리
매양 끝날 무렵엔 입안이 얼얼하다.
사루비아는 여전히
루주를 바르고 있다.
           --<<키스>> (최단천)의 전문

사루비아는 대개 여름부터 가을철까지 꽃을  피우는 식물이지요.그런데 이 시에서는 봄에 피고 있어서 처음엔 코드가 맞지 않아 독자를 골탕먹이는군요.그러나 요즈음은 코스모스도 봄에 피울 수 있는 걸 어찌 하겠습니까.더구나 시인이 피우면 피는 것이지요.사실 시인이 배경으로 잡은, 봄과 여름의 경계가 되는 그 계절 쯤에서 사루비아처럼 아름답게 이 시에서 필 수 있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아무튼 매우 아름다운 나무를 만드는 솜씨 좋은 장인을 만나게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싱싱한(?) 엽록소가 내장 돼 있어서 광합성 작용이 원활한 나무를 키우고 있음을 봅니다.계절과 계절이 끌어안는 아름다운 성교,입맞춤보다 강렬한 감각적 '키스'로 잉태하는 생명의 아름다움 속에 빠져 가슴 울렁이는,인간과 자연의 경계없는 교접의 세계는 바로 이 시의 바람이 일으키는 감화력이라 할 것입니다.이 나무는 나의 세계도 우리의 세계도 아닌 곳에서 물을 긷고 있습니다.'나'는 우주와 함께 '우리'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세계에 이 시의 뿌리는 닿아 있다 하겠습니다.

시는 나무입니다.아니,생명력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그리하여 푸른 잎,아름다운 꽃,탐스런 열매를 달고 그 살아있는 얼굴로 숲 속에 서 있으면, 우리는 그곳에 가서 가슴을 맞대고 그가 감춘 모든 비밀을 찾아 서로 교감하면서 또 하나의 푸르른 유기체가 될 것입니다.그런데 이러한 시의 모든 형상과 작용은 바로 언어에 의해서입니다.언어로써 붉고 또는 푸르르며 언어로써 꽃 피우며,언어 속에 생명력을 담고 있음을 망각한다면,그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중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사실 나무가 나무인 것은 흙에다 뿌리를 박고 제 자리를 지키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나무가 그 자리를 뜨면 나무로 살아남을 수 없음은, 시가 시의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시일 수 없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요즈음은 시가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흙에서 나와 오염되고 욕된 곳에 뿌리를 들어낸 채로 쓰러져 있는 일부의 현상을 봅니다.또 줄기와 잎 등의 부분이 생명을 같이하여 결합된 것이 아니고, 남의 것과 합해서 겉으로만 붙여 놓은 가짜의 생명을 일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나무도 간혹 보이는 모양입니다.엽록소가 제거된 그러한 시들은 이제 곧 그 빛을 잃고 그 삶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겠지요.죽은 나무,가짜 나무가 아닌 건강하게 살아 숨쉬는 시의 숲을 우리는 꿈꾸며 살아갈 것입니다.시인이여,창조의 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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