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78 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08:02

■서울신문

새벽 두시/신석진

 

새벽 두 시를 지나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시간은 방안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내가 버린 언어들이 다시 살아나서
나의 정신을 배반하고
이 고요한 밤을 배반한다.

 

간혹
저 별빛이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르지만
나는 별빛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아무런 산 하나도 만날 수 없다.

 

이제는 참으로 돌아서 자리에 누우려할 때
세상은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듯

 

보아라, 우리들이 나서 우리들이 죽는 곳,
세상은 적막 저 쪽에서 강물로 흘러가고
우리는 별빛처럼 벌판에 남아 잠들지 못한다.

 

 

밤.사물/ 신석진

밤이 되면
모든 사물은 소박한 어둠으로 돌아간다.
정지된 시간은 정지된 그대로
깨어 있는 칼끝은 깨어 있는 그대로

모든 사물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없는 無名으로 하여
우리의 덧없는 사랑을 기다리지 않으며
우리의 자유보다 더 선명하게
한 개의 말하여지지 아니한 言語로 돌아갈 뿐,

이제 그대들 모두가 잠들면
모든 사물은 시간의 옷을 벗고 일어나
가장 자유로운 꽃의 形相이 되어,
스스로의 모든 아픔을 밝힐 때까지
明*의 새벽 벌판을 거닐고 있다.

■조선일보

화양리의 끝/김광만

 


늦은 빗물소리 하나 떨어져 내려,
벗은 산, 붉은 허리 함께 건너갈 때
다리 저는 서울의 모든 꿈의 불빛
화양리의 끝 벌판에 집을 짓는다.
어둠 속에서도 쓰다 버린 물들이
눈에 익은 들꽃의 허리를 세우고
서울 밖으로 밀려난 새 울음 몇 마디
젖은 들을 건너간다.
오직 잡초들만이 모가지 우수수 떨구어
남은 캄캄한 세월을 준비할 뿐
질러오는 샛길이 흙탕물에 버려져 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山이 말을 삼키고
그대 화양리의 끝으로 겨울이 온다.

 

 


너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푸른빛으로 담긴 것들을
마른 강아지풀의 미미한 털로
쓸어보고, 혹은 만나서 불덩이가 되는
산천을 헤매는 너는 무엇인가.
때로는 침묵으로 사라진 것을 이루고
나의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젖는
너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모아온 삶만큼 부질없고 적막한 것이
철조망의 녹슨 못대가리로 꽂혀 있고
너는 맹세처럼 힘차게 지나간다.
말하지 않고 빈 들판 끝에서
서너 개의 견고한 가슴을 준비한다.

 

 


누워있던 생애의 불꽃이 일어서고
무엇일까 기다림의 끝으로 흘러오며
눈부신 알라딘의 램프가 떠받치는
겨울 화양리의 확실한 목소리는
새로운 노래되어 스스로 다가오고,
밤의 수렁이 어둠만으로 침몰하지 않는다.
얼음 밑으로 더욱 강물이 세차게 두드리고
새 뿌리가 서로 비비며 뻗어난다.
내 발 밑에는 아직 귀뚜라미 울음이
피처럼 사위지 않고 휘감으며
남은 우리의 모든 눈물자국을 보내버린다.
날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건너와
얼고있는 벽을 허무는 것은 무엇일까.
밤이라도 넋 잃고 잠들지 못하게 하는
화양리의 끝 그 뚜렷한 목소리는
무엇일까 이렇게 분분히 돌아오며
뜨겁게 언 손을 감싸면서
화양리의 끝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은.

 

 

■한국일보
前夜/이은실

전혀 다른 냄새로서
그러나 어딘가 닮은
우리 아픔의 가장 불편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두꺼운 겨울이 겨울답게
민첩한 말들을 장만했던 것이라면
동방의 새소리를 들으며
사랑가를 부르던 서정의 계절은
얼어붙은 오늘의 力學을 딛고
다시 일어나
불타는 날개를 펼 수 있을 것이지만

가슴속 깊은데서
출발을 서둘고 있는
이 기이한 숨결은
멀어져 가는 항구의 뱃고동 소리에도
날마다 새로와 가는
인터체인지의 향수 속에서도
사무치는 사연을 알리지 못했기에
때로
우리들 그림자의 옷깃을 스치는
슬픔과 기븜을
어느 미래의 여백이
알뜰히 담아줄 것인지

캄캄한 밤의 동굴에 내리는
무지개빛 환상넘어
팡세는
더 깊은 水平을 향하여
손짓하니
구름과 별과
그리고 想念의 바다에
기적을 고대하는
새 날에의 입김은
따스한 풍경을 손질하는
심장 가까이에 와서
어느새 서성거리고
있다.

 


■중앙일보
禱千手觀音歌 도천수관음가 /박윤기

우리가 한 송이 꽃이었을 때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것은
바람이 이었네.

아직 꽃피우지 못한 마을의 아이들은 눈이 먼 채
不感의 하늘 속으로
잃어버린 點字를 찾고 있었지.

덫에 치인 꿈은
가위 눌린 채로 시위잠을 자고
젖줄 끊긴 살 속으로
뜨거운 嗚咽의 소리는 파고 들었네.

어느 빈 뜨락에도
아침을 몰고오는
소망의 작은 새떼는 날아오지 않고
우리들의 艮識은
쉬임없이 강물에 자맥질하는
悔恨이었네.

층층이 내려서는
의식의 깊은 壁에
채찍의 겨울은 또 다른 장막을 둘러치고
바람은 무거운 囹圄마다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窓을
흔들며 있네.

은성했던 꿈의 부스러기가
부서져 내리는 길은 길마다
낮게 낮게 埋沒되고
긴 回廊을 걸어서
우울의 계단을 빠져 나올 때
다시 어둠으로 차는 굴레.
모든 思念은 기실
풀었다가 다시 짜는 페넬로페의 織造였네.

돌아다 보면
그 곳엔 오랜 묵시의 江이 흐르고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
기폭처럼 바람에 찢겨나가고 있었지.

三界에 가득히
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앉고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청댓잎 푸른 가지를 비집고
피어 오르는 아침은.
海潮音에 실려오는
비취 빛 청아한 아침 노래는.

노랜 冬眠의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외출을 서두르고
회색의 겨울은
부활의 눈을 뜬다.

※(註: <페넬로페> = [트로이] 전쟁에 출전한 남편을 기다리다 수절한 오딧세이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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