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77 신춘문예

아리박 2010. 12. 25. 07:59

■한국일보

아침/유수창

 

아침은
노를 저어오는
저 싱싱한 사내의
純金빛 얼굴에서 빛나고,
그러나 금새
피곤한 하루는
서산에서 저문다.
이윽고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편 밤은
와서
다시 향긋한 입김을 물고 잠든 아기의
포대기 속에 있다.
아기를 보듬고 잠이 든 아내의 속눈썹
밑에도 있다.
신의 광명도 끊인 듯한 이 철,
고독한 이 시대의 밤에도
속절없는 구원을 꿈꾸는 아내여.
그럼, 다신은 꿈속에서 달빛같이 불을 켜라.
나는 겸허한 지혜가 되어
차가운 한밤내 신앙처럼 노래를 살려내고
어둠을 접어둘 아침까지는
결빙의 바람소리를 들을 것이다.
지금은 이불 속에 잠든 아기의
간간이 칭얼대던 노래도 그치고
언제는 안 그러랴마는
뉘에겐들 단 그러랴마는
죽어버린 혼보다
살아 있는 혼은 더 고달프고
우리들 불면으로도 못 다스린 사랑은
또다시 내일까지 남을 것이다.
저마다 버릴 수도, 잊고는 살 수 없는
우리들
유년의 발자국 파묻혀간 지평 너머
숨은 애인 같던 고향이여
그러나 아직도 이 이승에서
아내보다 더 많이
나는 육신의 혼을 그리고
혼의 아픔을 불러낼 줄 알지만
그저 이 까만 밤을 앞으로
몇 장이나 더 헤어가야만
봄을 새긴 들판에 노래가 사는지
밤 새워가며 못내 어깨뼈 아픈 기약을 서둔다.
봄은 멀고
유리창은 끝까지 죽음에 따르는 저 완고한
고집을 배웅하듯이
이를 맞부딪쳐 떨며 울고,
이 한밤
살아있는 살점 안에 고인 눈물로 불씨 같은
노래를 간직하고 나는 밤에 더 잘
저 어둠의 밖까지
환상의 빛 고운 날개를 펼 수 있다.

 


■중앙일보

겨울 과수밭에서/김기종

 

겨울 과수밭에서
고요히 흐르는 해류가 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빈 나뭇가지는 해초같이 떠서 흐른다.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을 버림으로 해서 얻은 자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가라앉은 바다의 허밍 코러스.

눈물겨운 가을햇빛 속에 지탱해오던 풍만한 보람의 과일은
이 수심 모를 공허를 위한 예비
밤으론 쓸쓸한 혼들이 모여
산호수 사이 인어들이 해류에
머리를 헹구듯,
이 고요하고 슬플 것 하나 없는
허무에 머리를 감는다.

아직도 기다림이 남은 이여
봄 여름의 푸르던 이파리의 여운도 다 지워지고
일렁이는 바다의 울음도 다 삭아서
맑은 공허만이 남아 있는
이 태고같은 수심에
너의 마음을 누이렴.

 

 

 

■동아일보<가작>

공중의 꽃/강영환

 

흔들리는 물위에서 춤춘다.
닫혀있는 마음을 위해
현란한 꽃밭 위에서 한 송이
공중의 꽃이 피어난다.

 

뻗어도 닿지 않는 손끝에서
어지럽고 위태로운 그대들의
바벨탑이 일시에 무너지고
구설의 땅에 해일이 밀려 와
질기고 거센 호흡을 세운다.
죽은 자들의 안색이 흩어지며
아베의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만큼의 방향으로
물 속의 해가 비친다.

 

동쪽으로 간 사람이 데리고 있는
동쪽의 물 속에 비친 해
서쪽으로 간 사람이 데리고 있는
서쪽의 물 속에 비친 해
삼계(三界)에 있는 사람이 데리고 간
삼계의 물 속에 비친 해
들의 망령되이 흩어지는
천갈래의 마음으로 이루어
이웃은 쓰러져 만남이 없고
형제들의 말이 죽어
무수히 조각난 거울 속에 쌓인다.

 

달디단 맛의 기둥 속에서
백 사람의 물 속에 비친
백 개의 해들이
날궂은 날의 삭신처럼 아리더니
칠흑의 밤으로 떨어진다.
남몰래 떨어지고 있을 공중의 꽃이
어느 이웃의 안마당에 피어
내일의 아침을 맞아들이며
죽은 자들의 안색을 달랠 것인가.
죽은 자들은 말한다.
어지럽다. 어지럽다. 어지럽다고들 하여
캄캄한 빛으로 도시들을 숨기고
감추어지지 않는 입들만 남겨
형제들의 말이 지쳐 쓰러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내 위태로운 물위에 홀로 서서
바람이 몰아 오는 물결들을 부수어
마지막 해를 붙들고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춤추노니
빛이 닿지 않는 물 속 깊이
남김없이 숨은 먼지를 털어 내고
지순한 음성으로 노래하여
어린 이웃의 잠을 깨워
형제들의 굳은 마음을 오게 하라.
그대들은.
無名의 꽃밭 속에
하나의 해가 잠겨 들고
물결은 남김없이 자취를 감춘 때
드디어
닫혀있는 마음을 위해
해는 떠서
공중의 꽃이 된다.    
  

■서울신문

월식/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 놓은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의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 주던 저녁

 

 

細 雨/ 김명수


난장이 兵丁병정들은
소리도 없이 보슬비를 타고
어디서 어디서 내려오는가

시방 곱게 잠이 든
내 누이
어릴 때 걸린 小兒麻痺소아마비로
下半身하반신을 못쓰는 내 누이를

꿈결과 함께 들것에 실어
소리도 없이
아주 아늑하게
魔法마법의 城성으로 실어가는가

 


무지개/김명수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어여쁜 꽃신도 함께 간다.

이 세상에서 때묻지 않은 죽음이여
너는 다시 무지개의 七色으로 살아나는가

아이가 걸어간다.
아이가

한밤중 불같은 머리속 다 헹구고 비바람 폭풍우
다 데리고

오늘은 다소곳이 걸어간다.
눈물도 꽃송이도 다 데리고 걸어간다.

아가야
네가 남긴 환한 미소
네 가슴에 남겨둔 영롱한 기쁨

그런 것 모두 다 한데 모아
오늘은 비 개이고 맑은 언덕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하늘나라로 하늘나라로
무죄의 층계를 밟아 오른다.

 

 

■조선일보
벌판에서/권석창 

부러져 넘어진 한아름 바람을 버리고
오렌지빛으로 불타는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허공을 버리고
슬픔의 무게로 뚝뚝 떨어지는 눈발속을
그대들은 어대로 가고 있는가
이 세상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은 내려서 세상은 비어지고
바다 속 깊숙히까지 슬픔이 배인 지금
저마다 또 다른 짐을 꾸려지고서
자꾸만 어지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쓸쓸한 길위에
표정 잃은 신호등을 나는 보았다.
어지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숨어서 우는 몇날밤의 어둠과
멍든 바다의 조각들이 끝없다
잎이 진 나무드이 눈쌓인 산길을 내려와
죽은 강물을 보고 울었다
아 이제 이루어짐의 모두는 그대 곁에 없다
천근 무게로 밀려오는 잠의 더미 더미
머리 풀고 몸져 누운 산하, 그침묵의
마지막 날가지
빛바랜 낮달은 벤치에서 졸고 있다
그재들이여 하고 소리쳐 불러도
나개 속에 피었다 질 뿐
허물 수 없는 벽 속에 갇혀서
허망한 몸짓만이 만났다 헤어진다
떠말 것 보두 저대로 떠나고
남은 것만이 허망하게 남아
몸부림해도 일어나지 않는 바람과
두들겨도 시리하지 않는 침묵만이
깊게 깊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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