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생각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아리박 2024. 11. 19. 06:10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낡은 픽업트럭 철 지붕에 빗방울 떨어진 뒤의 잠잠함
고요라는 말 바로 앞에 오는 고요, 바로 그 뒤에 오는 고요
풀장 물을 가르고 들어와 바닥에 기린 얼룩무늬를 만드는 빛의 고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 존재하는 적막,
자던 사람이 떠났을 때 침낭이라는 고치 안의 정적,
먼지로 흩어진 사람의 DNA의 침묵,
전자현미경 렌즈로 들여다 본 뉴런의 고요,
전화통화가 끝났을 때 귀 안의 고적,
사랑하는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한 적요,
가지 않는 길의 말없음,
망원경으로 얼핏 본 은둔하는 하늘의 적막, 
기도를 드릴 때 모아 쥔 두 손 사이의고요,
소금쟁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조용함,
노른자처럼 노란 해가 새벽에 지평선 위로 떠오를 때의 정적,
가지지 못했던 아기 울음소리의 적막,
깊고 무거운 바다에서 수영할 때의 고요.
감은 눈꺼풀 위에 얹히는 눈송이의 고요.
"그 생각을 적어줄래?"라고 말한 뒤에 허공에 감도는 적막.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날 위해서 적어줄래?"였을 때.
추운 아침 입김에 서리는 정적.
태어나기 전 당신 이름의 침묵.
거울의 고요.
의심(doubt)이라는 단어에서 b라는 글자가 지닌 침묵.
휴화산의 침잠.
멈춰버린 심장의 적막.
 
하나 더
엊저녁 문상하고 온  2년 선배 김점두 장례식장 사진 뒤에서 얼씬거리는 말없음
 
  죽음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가방을 넣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침묵이다.
걸을 때 팔꿈치 아래가 그 공간이다. 창문을 통해, 조용히 움찔거리고 잎사귀를 떨며 무언극을 펼치는 사시나무가 보인다.(유리가 소리를 막는다.) 내 죽음도 이렇게 동이 틀 것이다. 먼저 사시나무가 가물거리고, 다음에 시야가 흑백으로 퇴색하고, 바람 속에서 잎들이 점점 빨리, 하지만 고요하게 소용돌이치고, 나는 과거가 될 것이다.
 
                 - Diane Ackerman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새벽의 인문학 」 홍한별 옮김, 반비 2015
 
 
 
다이앤 애커먼(Diane Ackerman)은  자연과 인간, 우주에 대한 깊은 사유와 특유의 감성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미국의 시인이다
자연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그녀에게 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 그것은 신비에서 시작되었고 신비로 끝날 테지만,
그 사이에는 얼마나 거칠고 아름다운 땅이 가로 놓여 있는가
애커먼에게는 현실과 환상을 가로 지르는 예지와 본능이 있다
 
 
                    - 대구일보 김상환 시인의 문향만리에서 가져온다 그냥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노른자처럼 노란 해가 새벽에 지평선 위로 떠오를 때의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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