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과 정의공주 한글공주
정의공주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둘째 따님으로 태어났다(1415. 9. 27~ 1477. 3. 5)
아버지 세종을 따라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한글공주이시다
문종이 오빠이고 세조는 동생이고 별호는 연창공주이다 부마로 연창위 안맹담이 배우자이며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정의공주 능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63-1에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 바로 가까운 곳까지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 한가롭지는 않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우리말과 한자의 변음과 토착을 끝내지 못하고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풀어내는 자가 없었는데 정의공주에게 맡겼더니 시원하게 풀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 막혔던 큰 과제를 해결하여 칭찬을 받고 큰 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가족들만의 창제작업이 진행되고 발표전까지는 외부에는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중국 숭유 한자시대에 한자 이외의 문자를 생각하는 것은 중국에 엇나가는 행위로 반대가 심한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최만리의 예상치 못한 극심한 반대 상소에 세종대왕도 좀 더 훈민정음 창제에 미비한 부분을 보완했을 것이다
새로운 글자를 쉽게 만들어 문맹에서 백성을 구출해내려는 세종대왕의 심사를 알아주지 않는 신하들이 야속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확신은 분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즘 생각해도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본인이 직접 글자를 발명해 백성에게 익혀 문맹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텐데 당시의 양반과 노비가 구분되어 있는 시대에 이런 착상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세종대왕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고마운 임금이시다
또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신미대사의 훈민정음 창제에서의 역할이 묻혀져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자료가 발견되어 훈민정음 창제 자료가 속시원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당시 시대적으로 숭유억불 시대에 신미대사를 위해 궁궐에 내불당을 세우고 신미대사를 옆에 두고 훈민정음 보완 제작에 참여시킨 것은 그의 역할이 그 만큼 중요했다는 증거이다
한자의 음을 발음으로 소리내는 발음기호처럼 훈민정음으로 적어내니 못 적어낼 글자가 없어진 것이다
정의공주가 알아낸 방법대로 지어진 석보상절이 제작되어 지고 세종대왕이 찬불가를 직접 훈민정음으로 지어낸 월인천강지곡 같은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이 체제를 갖추어져 갈 때 세종은 「운서 」를 번역하라는 명령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려 훈민정음을 수정 보완하여 갖추어간다
측근 가족이라는 이유로 정의공주의 영특함이 훈민정음 창제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시원스럽게 밝혀지지 않은 현재까지의 사정이 아쉽기만하다
이 정도면 당시 실제 알려지지 않은 공주의 역할이 있었음을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으나 비밀한 가족간 훈민정음 창제 작업으로 각자 구체적으로 기여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봄볕이 정의공주의 묘역을 따사로이 비추는 날 정의공주 묘역을 찾았다
이렇게나마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기여한 사실이 알려진 정의공주를 찾아 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가
영특한 정의공주가 자랑스럽다
한글창제와 정의공주
많은 사람들이 한글창제에 산미대사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것은 그 배후에 왜구들이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왜구들이 한글이 자기나라 신대문자에서 유래했다고 왜곡하고 심지어는 어떤 절의 돌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일부를 새겨넣어 조작까지 하고있으니까요
"베일에 감춰진 한글 창제의 비밀과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죽산 안씨 일가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 공주는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했는데, 공주의 시댁인 안씨 족보에 정의 공주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이 기록은 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한쪽에서는 이 기록을 한글 창제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로 보기도 한다.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을 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던 중 변음과 토착에 문제를 느끼고 이것을 아들인 대군들에게 연구 과제로 내린다. 그런데 대군들 중 문제를 풀어내는 사람이 없자 세종은 시집간 딸 정의 공주에게 문제를 내려보냈다. 정의 공주는 금세 문제를 풀어 바쳤고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며 노비 수백 구를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다. 세종이 쉽게 풀어내지 못했던 문제, 아들과 딸에게 지혜를 구해야 했던 ‘변음과 토착’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변음과 토착의 문제
기록 속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무엇인가에 대해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한자 자체의 뜻에 기인하여 ‘변음’을 ‘소리의 변화 원리’로 보고 ‘토착’을 ‘소리를 토하는 원리’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학자는 ‘변음’을 정음과 반대되는 말인 사투리로, ‘토착’은 ‘단군 때의 가림토’라고 본다. 정의 공주 논의와 관련해 정식 학술 논문을 발표한 이가원 교수는 ‘변음과 토착’을 말 자체를 풀이하는 것으로 접근했다. 즉, ‘변음’은 소리가 바뀜에 따른 문자 제정이나 변동의 문제이고, ‘토착’은 조사나 어미가 붙으면서 생기는 음의 변화나 그에 따른 문자 표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는 김슬옹 교수는 이가원 교수가 말하는 ‘변음과 토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었다. ‘몸’이라는 단어에서 첫소리 ‘ㅁ’과 끝소리 ‘ㅁ’의 발음이 다른데 이것을 같은 문자로 만들 것인지, 또 ‘몸’에 조사 ‘이’가 붙으면 [모미]로 발음되는데 이처럼 끝소리가 다시 첫소리로 오는 현상을 어떻게 반영하여 문자를 만들 것인지 등이 ‘변음과 토착’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음과 토착’이 어떤 문제였는지 명확하게 밝히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의 공주의 재능
≪죽산안씨대동보≫에서는 정의 공주가 대군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고 하는데, 정의 공주는 어떤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 졸기(拙記, 고인에 대해 약술한 기록)를 보면, 과연 정의 공주가 재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을 해득했다고 한다. ‘역산’은 ‘천문학과 수학’을 뜻하는데, 역산을 해득했다는 것은 천문학과 수학에 능했다는 말이다. 세종 역시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 예로 세종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조선에 맞는 일월식을 계산해 새로운 역법과 ‘일성정시의’라는 시계를 만들었으며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간의’, ‘혼천의’ 등을 만들어 당대의 천문학 진흥에 힘썼다. 또한 세종은 수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서 대군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신하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 수학을 배워오도록 했으며, 본인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고난도 수학서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을 배웠다.
졸기에도 나오듯, 세종은 자신을 쏙 빼닮은 정의 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로 세종은 정의 공주가 시집 간 후에도 궐 근처에 살도록 했고, 부마(사위)인 안맹담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안맹담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염려해 세종이 친히 안맹담의 친구들을 불러 “누가 안맹담과 술을 마시는가?”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만약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정의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이지적인 인물로서 자신에게 애틋했던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죽산안씨대동보≫의 신빙성
≪죽산안씨대동보≫를 정설로 보지 않는 학자들은 이 기록이 한 집안의 족보라는 점을 들어 ‘실록’ 수준의 신빙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 왕조의 역사를 일관되게 춘추필법 정신으로 서술한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선왕인 태종의 실록을 보려다가 두 번이나 실패한 일이라거나 연산군 때 사관들이 사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참극(무오사화)이 발생한 일 등은 실록의 엄정성을 입증하는 예이다. 조선 27대 임금 실록 가운데 일제의 압력이 작용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 포함하지 않는 것도 왜곡되지 않은 역사 기록물을 후대에 남기려는 춘추필법의 정신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조차도 이러할진대 일가의 족보 속 내용이 정설로 인정받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을 단순한 야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있다. 김슬옹 교수는 족보 또한 정사 못지않게 믿을 수 있는 역사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족보를 다루는 학문을 ‘보학’이라고 하는데, 사실 보학도 정사 못지않은 엄격함이 있습니다. 집안의 ‘혈통’을 다루는 데 결코 허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순 야사라 치부하기에는 (정의 공주) 기록이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비 수백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상이 얼마나 컸는지 그 규모에 대해서는 가문을 자랑하기 위해 살을 조금 붙일 수는 있을지언정, ‘변음과 토착의 문제를 풀어’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점은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므로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E.O. Reischauer)와 페어뱅크(J.K. Fairbank) 교수는 그들의 공동 저서 ≪한글의 전반적 재검토(Global Reviews of Hangeul)≫에서 “한글은 아마도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체계일 것이다.”라고 평가했고,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자신의 저서 ≪문자 체계(Writing Systems)≫에서 “한글은 의문의 여지없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적 산물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라고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극찬했다. 세계의 유명 언어학자들이 인정할 만큼 우수한 한글이기에,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지에 대한 궁금증은 세월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죽산안씨대동보≫라는 일가의 족보 속 내용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세종이 발목에 조그만 칼심이 박혀 의원들마저 당황해 할 때 정의공주가 자석으로 칼심 조각을 빼낸 뒤 술 찌개미로 붓기를 가라앉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총명한 분이고 '정의공주, 세종대왕 한글 창제의 큰 도우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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