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2024 신춘문예 당선작 (시)

아리박 2024. 1. 10. 08:57

2024 신춘문예/당선작/ 시(詩)

 

자물쇠

박찬희

'안거가 일이라고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오가는 바람도 굳어 서 있다'

'하필이면 벼랑 끝에 걸어놓은 맹약

효험이 낭설이기 십상이기도 하고

굳이 풀어 들여다볼 상당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잡다한 호기심만 늘어

없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다'

‘맹약의 해피엔딩은 녹슬고 녹아 서로에게 귀속되는 것’

'애지중지 닫아걸 별 이유는 없어도

그냥 습관인 까닭에

벽을 치고 들어앉아 음과 양을 저 혼자 맺고 풀면서

맞지도 않은 열쇠를 깎는 일

어쨌든 그것도 수고라면 수고지'

'결속과 해지는 엎어 치나 매치나 한가지여서

틀림없는 쌍방의 일

자물쇠든 열쇠든 서로에게 맞출 수밖에

옳으니 그르니 해도 꼭 들어맞는 짝은 있게 마련인데

내가 너를 열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는 옥쇄 앞에서

밤낮 우물쭈물, 나만 속절없이 녹슬어간다'

 

출처 : 퍼블릭뉴스(https://www.psnews.co.kr)/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https://www.p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4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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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천불천탑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

풀내음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앞의 민초를 맞이한다

투박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그 모습

그 거친 어깨 끌어안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울고 싶다

고해의 파도에 깎여나간 마음 쥐어짜내 입술 깨물고 울고 싶다

마음의 부스러기가 섞여 나온 눈물을 부처님께서 가사자락으로 닦아주면

지나간 괴로움을 땅에 내려놓고 다가올 염원을 부처님께 올린다

염원이 모여 천개의 석탑이 되었고, 천분의 석불이 되었다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

같은 모양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위치에 서서 정토세계를 꿈꾼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09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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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다

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12312101005?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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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한백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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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4/01/01/AAKRQWAKTFBS5FRIR7VYDNEI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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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 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나는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이 거리의 행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행려는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다

담배꽁초에 나의 시간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역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서울역의 시계가 서울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출처: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22611040004000?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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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운전

강지수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지요

아뇨 아뇨 하고 뒤돌아 도망치다 보면

잔뜩 눌어붙은 마음에 칼질을 해대는 것

한 가지 알려줄까요

무 이파리가 시들해서 죽은 줄 알고 뽑아보면

막상 썩지는 않은 경우가 많답니다

싱싱하지 않을 뿐

살아는 있어요

매운 향을 뿜으며

가끔 손등을 깨물어요 그러면 삐죽 튀어나온 앞니 두 개가 찍힙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피부까지도

저 멀리 보이는 친구를 피해 길을 돌아갈 때 혹은

다시 태어나서도 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천성

나와 분리된 조각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워하는 겁니다

발가벗고도 이를 내보이며 웃었던 날

출처: 매일신문

https://www.imaeil.com/page/view/202312151500163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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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박동주(본명 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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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극빈

​ 김도은 (본명 김정미)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사이로

저기, 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 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데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컷다.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이 극빈도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말들

그래, 함께 헐리면 편하지

지탱이 지탱을 업고 하는 말들은 그마저도

죄다 빌려온 말들이란 것

돌려줄 곳도 없는 말들이라는 것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어둑한 한 평의 미궁들엔 다행히도

무더위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

들어올 것도 없이 여미는 겨울보다는 낫다는 것

홀로, 깊은 안쪽이 되는 것이다

출처: 영주신문

http://yeongju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27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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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가

홍다미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처럼 지금처럼

바람 무게를 견디려면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 녹는 북극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

쌓기만 하는 뉴스는

싫증나고요

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장난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 빼버리고 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고 잠을 빼내면 기사님은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야 말겠죠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 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 와장창 무너지겠죠

한순간 한 방이면 끝나는 게임

손끝의 감각을 믿기로 해요

쌓아 올린 우리가 와르르 무너질까봐

우린 서로의 빈틈을 살짝 비껴가는 중이죠

출처: 무등일보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펜치가 필요한 시점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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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

성욱현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속에 몸을 끼워넣는다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거실 한쪽으로 미싱을 옮긴다

미싱 가마에 기름칠을 하던 할머니도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출처: 영남일보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3122701000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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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박유빈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리병도 아니었고

피서객이 흘리고 간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것은

오점 없이 깨끗한 눈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화창하지 않다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도 빠져 죽는 마음

떠오른다

어떤 이의 어리숙한 얼굴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

아니 그것은 죽은 것

혹은 벗어놓은 것

떠밀려온 것

유유자적

흘러온 것

눈알은 하나뿐이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메마를 것 같다

언젠가

미끈한 눈웃음 짓던

사람을 사랑한 고래가 그랬듯이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 보면

무언가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세상에 막 내던져진

작은 눈빛

오늘은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

어디에도 흐린 곳 하나 없다

너무 밝다

최선을 다해

기지개 켜는

눈알의 의지

출처: 국제신문

https://n.news.naver.com/article/658/0000062177?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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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지하

황주연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솟아오른 지하엔 창문들과 쏟아진 화분과 가느다랗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뿔뿔이 서 있던 것들이 무너지며 모두 하나로 엉킨다

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 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라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백날의 잔해가 있고 몸이 몸을 돌아눕지 못한다

검은 지구 한 귀퉁이를 견디는 맨몸들,

층층이 솟아오르고 있다

출처 : 경상일보(https://www.ksilbo.co.kr)https://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8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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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잔

박태인

물이 되려는 순간이 있어요 얼굴을 뭉개고

입술 꾹 다물고

자꾸 그러면 안 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요 나는

물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어요

창틀에 놓여있던 모과의 쪼그라든 목소리가 살금살금 걷는 듯한 아침

어김없이 당신의 그림자는 식탁에 앉아 있어요

뜨거운 것으로 입을 불리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따뜻한

우리는 언제쯤 깨질 것 같나요? 이런 말은 슬프니까

숨을 멈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싱크홀 같거나 시계의 입구 같거나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아요 두 손에 매달려 쓸데없이 계속 자라는 손톱처럼 똑똑 자르면 될 것 같은 시간을 말아 쥐고 있는 기분

나는 내 손을 스스로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언젠가

바깥이 나를 꺼내다 마는 것처럼 어둠으로 찬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빛으로 나가지도 못 하게 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요

햇살이 손바닥을 통과해 더 깊이 가라앉는 동안

내 손은 가끔 바깥에서 들어와요

집을 통째로 들어 물처럼 몸이 출렁일 수 있도록

흔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이면 매일 보고 만지는 머그잔이 어째 좀 수상해요

나는 또 물로 그린 그림이 되죠

오늘은 당신의 그림자를 좀 젖혀봐도 될 것 같아요

출처: 경남신문

https://m.jjan.kr/article/20231226580337

#신춘문예2관왕#한백양#축하합니다

 

달로 가는 나무

김문자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땅은

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그믐달을 키우는

인천 장수동 사적 562*번 800년 된 은행나무

처음부터 약성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나무는 달에서 왔다

달이 몸을 바꿀 때마다 은행나무의 수화는 빠르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툭 떨어지거나 노랗게 익어갔다

은행나무는 자라면서 달의 말을 하고

은행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물이 해안까지 차오르는 슈퍼 문일 때

남자는 눈을 감고 여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한다

오래된 나무의 우듬지는 800년 동안 달로 가고 있다

소래산 성주산 관모산 거마산을 거느린 장수동 은행나무

달빛이 은행나무 꼭짓점을 더듬는 농도 짙은 포즈

은행나무는 품을 여며 폭풍과 폭설을 견디는 새집이 되었다

큰 나무의 덕을 보아도 큰 사람의 덕을 못 본다는

무서운 격언을 새가 쪼아 먹을 때

뒷산까지 뿌리가 뻗은 은행나무를 뽑으면 산이 무너질까 봐

사람들은 새가 세 들어 사는 나무에게 빌었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아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7월과 10월의 보름이면

은행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지아비 달이 걸린다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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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외계인*

최서정

분홍장갑을 남겨놓고 지상의 램프를 껐어요

눈 감으면 코끝으로 만져지는 냄새

동생은 털실로 짠 그 속에 열 가닥 노래를 집어넣었죠

온종일 어린겨울과 놀았어요 어느 눈 내리던 날

장롱 위에서 잠든 엄마를 꺼내 한 장 한 장 펼쳤죠 (우리 막내는 왜 이렇게 손이 찰까)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어린, 을 생각하면 자꾸만 버튼이 되는 엄마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엄마

소곤소곤 곁에 누워 불 끄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녀 닮은 막내가, 바닥에서 방울방울 웃어요

놓친 엄마 젖꼭지를 떠올리면 자장가처럼 따뜻해지던 분홍

그녀, 마지막 밤에 파랗게 언 동생 손가락을 털실로 품은 걸까요

반쯤 접힌 엽서를 펼치듯 창문을 활짝 열면

어린 마당에 먼저 돌아와 폭설로 쌓이는 그녀

더는 이승의 달력이 없는, 딸기 맛처럼 차게 식은

별똥별 나의 엄마

 

꼬리 긴 장갑 속에서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든 동생의 손이

주머니 속 캥거루처럼 쑥쑥 늙어가요

 

*엄마는 외계인 - B회사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이름 중 하나

출처 : 전북도민일보(http://www.domin.co.kr)

http://www.domin.co.kr/145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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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신춘문예2관왕 #축하합니다

화살표의 속도

황주현

화살표의 속도는

걷고 달리고 날아가는 속도다 화살표는 정지해 있으면서도 계속 이동 중이지만 뒷걸음질 치는 기능이 없다

화살표에서는 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날까

궤적에서 공격성이 자란다 사활을 건 뾰족한 모양이 머리인지 입인지 코인지 궁금해 한 적 없지만 그것이 가끔 말을 하거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한다

화살표는 계속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도망가고 사라지려 한다 몇몇 동물들은 그런 화살표와 비슷한 외모를 노력 끝에 얻었지만 지금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화살표를 발명한 사람들

혹은 진자운동처럼 0과 0 사이에서 태어나고

그 사이를 무한 반복한다

꼬리에 두느냐 머리에 두느냐를 고민하는 동안은 이미 한참이나 날아 온 거리다 어떤 사람에게선 이미 녹이 슬거나 그 끝이 뭉툭해진 화살표가 무더기로 발견되고 또 어떤 사람에겐 마치 새싹처럼 이제 막 돋는 일도 있다

빗나가는 과녁을 가진 것들도 많겠지만

명중이라는 끝을 두고 있다

공중에 초록을 박아 넣고 이리저리 여진을 앓고 있는

저것들, 혹은 그것들

지금도 화살표를 가로 막거나 되돌려 놓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단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화살표를 조종하는 또 다른 화살표를 개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화살처럼 관통하는 날이다

출처 : 경남도민신문(http://www.gndomin.com)

http://www.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78056

#신춘문예2관왕강지수 #축하합니다

면접 스터디

강지수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자리에 선다

허리를 숙인다 정강이가 보이고 뒤통수가 시원하다

아 아 아

낮지도 높지도 않은 미지근적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집 아이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안부를 물을 때

보다는 낮고

지저분한 소문을 전할 때

보다는 높다

언뜻 저 사람과 그 옆 사람의 목소리하고 똑같다

우리 셋이 동시에 얘기하면 참 재미있겠죠

진지한 모임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그저 소리만 낸다

아 아

교실은 소리를 머금은 상자가 되고

이가 나간 머그잔에 물을 담아 마시다가 바닥에 흘렸다

닦아내려고 허리를 숙인 찰나

물 위로 번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진짜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진짜사람들이 진짜미소를 지으며 진짜 멋진 진짜옷을 입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행복이 밀려왔다

출처: 문화일보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010201032633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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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실

이실비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또보겠지 떡볶이 집에서

묻는 네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상하지 충분히 안타까워하면서 떡볶이를 계속 먹고 있는 게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게

괜찮니?

그런 물음들에 어떻게 답장해야할지 모르겠고

겨울이 끝나면 같이 힘껏 코를 풀자

그런 다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코를 흘리고 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손톱을 벗겨내는 속도를 이기길 바랐다

다정 걱정 동정

무작정

틀지 않고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초록색 비상구 등만

선명히 극장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지옥이라면

관객들의 나란한 뒤통수

그들에겐 내가 안 보이겠지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잊지 않고 세어 본다

출처: 서울신문

https://m.seoul.co.kr/news/newsView.php?id=20240102500119&cp=seoul

#가작1

#가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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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당선작

파랑

엄지인

감정일기

 

송상목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

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빌딩을 오르고 나면

정오가 된다

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

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을 하고

수저를 든다 기쁨이

키스해온다

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

키스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

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

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

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

나는 기쁨을 볼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기쁨은 집에 있다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든다

기쁨은 꽤 나이 들어있고

눈을 끔뻑거린다 느린 속도로

슬픔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출처: 광남일보

http://m.gwangnam.co.kr/article.php?aid=1704099696466608025

달빛 소반

김맹선

둥근 허기였다

도마는 시퍼런 칼을 받아낸다

코끝 찡한 마늘과

매운 고춧가루가 스며들어도

도마는

어머니는

뜨거운 맛을 찬물로 부드럽게 넘긴다

물이 차갑거나 어디든 스며드는 식객이었다

도마는

어머니는

한 번쯤 달빛 속에 숨겨 두었던 칼춤을 추며 날고 싶었을 것이다

받아내는 일

바닥이어서 날고 싶었을 시간

평생 둥글어지는 일로 날개를 펼쳤던

도마가

어머니가

모든 걸 다 내어 주고도 모자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흘러내린 달빛에

생을 푸신

어머니가

가을바람에 나부낀다

강물로 흘러가신다

도마 위에

어머니 위에

풍성한 달빛이 넘실거린다​​

출처: 뉴스N제주

http://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