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훈민정음과 정의공주

아리박 2024. 2. 28. 10:11

훈민정음과 정의공주

 
정의공주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둘째 따님으로 태어났다(1415. 9. 27~ 1477. 3. 5)
아버지 세종을 따라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한글공주이시다
문종이 오빠이고 세조는 동생이고 별호는 연창공주이다 부마로 연창위 안맹담이 배우자이며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정의공주 능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63-1에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 바로 가까운 곳까지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 한가롭지는 않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우리말과 한자의 변음과 토착을 끝내지 못하고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풀어내는 자가 없었는데 정의공주에게 맡겼더니 시원하게 풀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 막혔던 큰 과제를 해결하여 칭찬을 받고 큰 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가족들만의 창제작업이 진행되고 발표전까지는 외부에는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중국 숭유 한자시대에 한자 이외의 문자를 생각하는 것은 중국에 엇나가는 행위로 반대가 심한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최만리의 예상치 못한 극심한 반대 상소에 세종대왕도 좀 더 훈민정음 창제에 미비한 부분을 보완했을 것이다
새로운 글자를 쉽게 만들어 문맹에서 백성을 구출해내려는 세종대왕의 심사를 알아주지 않는 신하들이 야속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확신은 분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즘 생각해도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본인이 직접 글자를 발명해 백성에게 익혀 문맹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텐데 당시의 양반과 노비가 구분되어 있는 시대에 이런 착상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세종대왕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고마운 임금이시다
또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신미대사의 훈민정음 창제에서의 역할이 묻혀져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자료가 발견되어 훈민정음 창제 자료가 속시원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당시 시대적으로 숭유억불 시대에 신미대사를 위해 궁궐에 내불당을 세우고 신미대사를 옆에 두고 훈민정음 보완 제작에 참여시킨 것은 그의 역할이 그 만큼 중요했다는 증거이다
 
한자의 음을 발음으로 소리내는 발음기호처럼 훈민정음으로 적어내니 못 적어낼 글자가 없어진 것이다
정의공주가 알아낸 방법대로 지어진 석보상절이 제작되어 지고 세종대왕이 찬불가를 직접 훈민정음으로 지어낸 월인천강지곡 같은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이 체제를 갖추어져 갈 때 세종은 「운서 」를 번역하라는 명령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려 훈민정음을 수정 보완하여 갖추어간다
측근 가족이라는 이유로 정의공주의 영특함이 훈민정음 창제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시원스럽게 밝혀지지 않은 현재까지의 사정이 아쉽기만하다
이 정도면 당시 실제 알려지지 않은 공주의 역할이 있었음을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으나 비밀한 가족간 훈민정음 창제 작업으로 각자 구체적으로 기여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봄볕이 정의공주의 묘역을 따사로이 비추는 날 정의공주 묘역을 찾았다
이렇게나마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기여한 사실이 알려진 정의공주를 찾아 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가
영특한 정의공주가 자랑스럽다
 

정의공주가 편안히 잠들어 계시기를~

 
 

부마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정의공주 묘

 

공주의 묘비가?

 

정의공주 묘비석이 왜 단절되었는지??

 

문인석 뒤로 도봉산

 

안맹담과 정의공주 안내
양효안공묘비

 

안맹담 정의공주 묘역

 

도봉산

 

정의공주 석등

 

눈 쌓인 도봉산

 

정의공주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