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서울 詩 문학기행(국제펜클럽) 2

아리박 2016. 3. 18. 17:48

시민과 함께 하는 서울 詩 문학기행 (국제펜클럽) 2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 선생

 

심우장에 오르는 골목길은 요즘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달동네 골목이다. 서울에 이런 골목이 아직까지 있다는 것에 한편 놀랍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이 이런 곳에 위치하다니 처음으로 찾은 필자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꼬불거리고 경사지고 바닥은 울퉁불퉁 너비는 둘이 비켜가기도 쉽지 않다

심우장은 만해선생이 일제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집을 앉혔다고 전해 오고 있다. 실제로 보니 북북동향쯤이다. 거의 햇빛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심우장 앞에 가로 막고 있는 관리인의 주택(선생의 따님이 거주하고 있었다)을 철거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한쪽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만해선생이 심었다고 전한다

심우장은 4칸 접집으로 ㄴ자형 주택이다.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이곳을 감옥으로 생각하고 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심우장의 당호는 "산속에서 소를 찾는다"는 초불심에서 찾은 선의 경지이다

만해 선생은 님의 침묵으로 근대문학의 주류를 이룬 시인으로 뿐만 아니라 3.1운동 민족 운동가로 이름이 높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님의 침묵을 읽고 좋아하지 않은 우리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시인도 없을 것이다. 그의 시는 소재의 보편성을 이끌어내 민족정서인 限과 서정을 한글문학으로 극대화하였다. 그의 시는 한글로 씌여졌으며 고도의 은유와 비유를 통해 함축성있게 작품을 구성하였다

심우장은 만해 선생의 문학과 애족애민정신과  항일저항정신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일제 말기의 대부분의 지식인과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에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인사는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만해 선생의 지조는 그의 문학과 더불어 더욱 빛을 발한다

33인의독립선언서 말미에 행동강령 공약3장을 직접 썼다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

독립투사로서 결연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만해광장

 

만해광장에 모여 만해 선생의 암울했던 문학과 항일 저항 정신과 민족의 서정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다

 

문인들이 심우장을 둘러 보고 있다 ( 기둥 목재와 기와 등은 새로 교체한 것이라고 한다)

 

정오쯤인데도 마당과 집안에 그늘이 지고 있다

 

관리인 주택을 철거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앞에 보이는 향나무를 만해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심우장의 표지

 

 

 

신두업 시인이 뚜렷이..

 

방 한칸네 선생의 초상과 동상

 

 

새로 정돈된 듯한 부억

 

 

김경식 시인의 해박하고 잘 정리된 해설은 문인들을 만해선생에게 더욱 빠지게 하였다

 

심우장 현판

 

 

심우장 앞에서

 

 

 

만해 한용운 시인

 

  " 나의 길" 을 옮겨 본다

                   

이 세상에는 길이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들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위에 발자취를 내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惡)한 사람은 죄의 길을 쫓아갑니다.

의(義)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만해광장( 이곳은 월북작가 박태원의 생가터라고 한다)

 

만해 선생과 함께 필자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북정공원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시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혐의로 구속되어 4년을 옥고를 치렀던 민족시인이다

당시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되기 직전에 쓴 시가 있어서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나는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야 간다

 

                          <이별의 노래>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시현판

 

 

 

 

 

북정공원에서 문학담론

 

건너편 산자락을 허물고 개발로 성북동에 번지가 생기면서 비둘기들의 번지는 없어졌다

 

 

 

성북동 비둘기 공원에서 우형숙시인과 김용만시인(잔아문학관)

 

김광섭 시인은 김환기 화백과도 친분을 쌓고 서로의 예술적 감각을 나눴다

 

저렇게 많은 사람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속에 사라지고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녁에>  김광섭

 

김환기 화가는 김광섭 시인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모티브로 이런 미술 작품을 그렸다(대한민국 제1회 미술대전 대상)

 

 

 

                                                                                     -  -  - 서울 詩 문학기행은 계속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