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산청 여행지 슬픈 가락국 구형왕릉

아리박 2014. 10. 10. 19:40

산청 여행지 슬픈 가락국 구형왕릉

 

사적 제 214호로 지정된 구형왕릉을 찾았다

소재지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소설가 친구 신상조의 구형왕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을 둔탁한 멍치로 치는 전율이 다가왔다

무언가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모습이 설명을 안들어도 느껴진다

 

구형왕릉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쌓은 석총으로 아주 특이한 형태다

산비탈에 막돌로 계단식 석축이 쌓은 7단계단으로 쌓고 그 위 정상에 네모난 봉분 형태의 석총이 있고 봉토분과 뒷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석총의 높이는 7.15미터 둘레는 100여미터가 된다고 한다

4번째 계단 중앙에는 한사람이 비좁게 들 수 있는 감실이 있는데 이 시설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비석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는 비문과 함께 문인석 문인석 석수 상석이 등이 한쌍씩 있으나 이는 후세 김해김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사람들은 주변에 등나무와 칡넝쿨이 왕릉쪽으로 뻗지 못하고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으며 까마귀와 참새도 왕릉위로 날지 않은다고 한다

비문에서와 같이 나라를 양위한 왕릉이라는 수치를 지금도 안고 있는 슬픈 왕릉이다

 

 

구형왕은 가락국의 10대 마지막왕이다

가락국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항상 지정학적 불안에 싸여 있던 작은 나라였지만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 피운 문화국가이다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복속하지 않으면 전 백성을 죽이겠다는 신라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나라를 양위하였다

 

 구형왕은 521년 가야국의 왕으로 532년까지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받칠 때까지 마지막 왕으로 재임하였다. 또한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장군의 증조부이시다. 이 비운의 왕릉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에게 양위를 마치고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구형왕이 신라군이 쳐들어 오자 상대적으로 열세인 자신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왕자를 신라에 사자로 보냈다고 적었다

전쟁을 하지 않고 나라를 양위하였다고 해서 양왕이라고 부른다

많은 백성의 화를 염려하여 어쩔 수없이 나라를 넘겨 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자신은 나라를 망하게 하고 양왕이라는 오명으로 지금까지 불리우면서 치욕을 견디고 있다.

마지막 죽는 날 나의 무덤을 돌도 다듬지 말고 막돌로 묻어 달라는 유언이라도 했음직하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도 청년시절 화랑도로서 이곳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키워 훗날 삼국통일을 이룬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증조부의 아픈 치욕의 인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구형왕릉을 두고 석탑이라는 주장과 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왕릉으로 보고자 한다

석탑으로 말하는 자들은 승자의 역사 기록으로 구형왕릉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 오는 왕릉이야말로 사실에 가까운 진실일 것이다

왕으로서 치욕을 감내하며 나라를 양위한 심정은 차라리 혼자 목숨 죽는 것이 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백성의 화를 생각하면 어느 선택이 옳은지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구절초 흐드러지게 핀 산청에 슬픈 가락국 마지막왕인 구형왕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쓸쓸하게 한다

 

 

패자의 왕 가락국 구형왕릉

 

 

나라를 받쳤다는 讓王(양왕)으로 비문에 적고 있다. 이는 기필 역사가들의 승자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칡넝쿨도 왕릉으로 뻗지 않고 새들도 왕릉위로는 날지 않은다고 한다

 

 

슬픈 역사속에 후손은 너무 밝게 서 있다

 

 

숨은 역사 현장을 안내해준 소설가 신상조 친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