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진실한가. 독창적인가

아리박 2012. 2. 16. 19:02

진실한가? 독창적인가?

복효근

누군가로부터 시집을 받으면 꼼꼼하게 읽어보는 편이다. 금방 읽지는 아니하더라도 시간을 두고라도 비교적 전편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 한 편이 쓰여지고 시집 한 편이 묶여 나오기까지의 고뇌와 수고로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도(779~843)가 한유(768~824)의 행차에 부딪혀 그 유명한 ‘퇴고’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화다. 얼마나 골똘히 긍구했으면 고관의 행차가 눈앞을 지나는 것을 몰랐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시인, 작가라 하면 한 줄의 문장을 얻기 위해, 아니 단 하나의 적확한 시어를 얻기 위해 무수한 밤을 지새고 많은 시간을 관찰하고 다시 들으며 고뇌한 경험이 있으리라.
일찍이 두보(712∼770)는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語不驚人 雖死不休)고 말했다. 시성으로 일컬음을 받는 두보도 시를 쓰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야 마땅하리라. 이 땅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시인의 이름 하나로 가진 것, 얻은 것 없이 오로지 그 이름에 기대어 가난하게 살다간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대체 시인이 무엇이며 시가 무엇이길래 그 이름 하나로 살 수 있었을까?
다 아는 말로 공자는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긍정형으로 표현하면 ‘생각이 진실하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시는 그 속에서 일체의 헛된 욕망이나 타인에 대한 증오나 해코지의 마음이 없다. 없어야 한다. 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음을 추구하기 위한 한 방편일 수는 있겠다.
‘시’(詩)라는 글자를 파자해 봐도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를 쓰지 않던가? 여기서 절이라 함은 불교 사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이슬람의 모스크일 수도, 기독교의 교회, 성당일 수도 혹은 성황당일 수도 있을 터이다. 이 사찰에 가서 누가 거짓으로 뉘우치고 거짓으로 고백하며 거짓으로 신과 약속을 하겠는가? 그래서 시의 언어는 사찰에서 쓰는 언어와 같이 진실한 언어이며 신성한 언어라야 한다. 물론 고결한 언어만을 조합해 놓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불결한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됨의 가장 기본이자 그 결론이 ‘진실하다’는 말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그래서 돈 되지 않고 밥도 되지 않고 큰 명예도 얻기 어려운 이 시 쓰는 일에 인생을 맡겼는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된 삶인가, 그 길을 묻고 뉘우치고 모색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시경은 ‘경전’의 반열에서 늘 우리를 돌아보게 하였다. 시를 외고 쓰고 해석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나라의 인재를 뽑는 과거에도 채택되지 않았던가?  
때론 퍼소나(persona)를 내세워 시인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에서 시와 시인은 분리되지 않았다. 시를 그 시인만이 지니는 인품과 사상과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시인의 목소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와 사상, 정서, 그게 어디 쉬운가? 그래서 수없는 날을 절차탁마하여 이윽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시다. 판소리 명창이 피를 토하는 독공 끝에 득음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이 학문이든 판소리든 어떤 예술이든 처음 단계엔 스승을 모방하고 다른 훌륭한 작품을 모방하기도 한다.
좋은 시를 읽으면 좋은 시를 쓰고 싶어진다. 암묵적인 모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방하되 ‘전혀 새로운’나만의 것으로 다시 창조하는 모방이다. 그래야만 새 생명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다. 아니, 완전히 모방의 원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하여 아래에 시 네 편을 제시한다. 앞엣것은 필자의 졸작이고 다음엣것은 어느 시인의 작품이다. 비교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늘 다니던 산길에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
지난 해 태풍 루사에 쓰러져있다
그 얽히고설킨 뿌리를 하늘로 쳐든 채
하늘 치솟던 높이도
그 끝모를 깊이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한 때는 가지 가득 꽃을 피워
꽃등을 켜놓은 것처럼 언덕이 화안했었는데
바람이 잎을 되작되작 뒤집으면
햇살이 한 잎 한 잎
그 푸르른 영화를 연주하곤 했었는데
한바탕 광풍에 널브러진 거목이
하, 천연덕스럽게 평화로워
다가가 나무둥치를 발로 차니
썩기 시작한 나무껍질 아래서
와르르 솓아지는 검고 하얀, 아뿔사!
‥‥‥개미 개미들 ‥‥‥
어느새 제 몸을 저 아닌 것들에게 내주었구나
그랬었구나
늘 위를 향한 턱없는 선망과
깊이에의 끝 모를 열망만이 아니었구나
그 보다는
수평을 향한 저 쓰러짐의,
저 내어줌의 자세까지가 나무였구나
내가 한 그루 나무라는 사실을
잊을 뻔한 즈음

      - 졸작 「나무의 전모」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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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는 아파트 산책로에 편안히 누운
버즘나무 한 그루
위로 향한 턱없는 열망과
바닥 모를 깊이에의 집착이
희끗희끗 버즘꽃으로 피었다
여름내 바람이 되작되작 가슴 열어주고
햇살 드나들며 나긋나긋 속삭이곤 했는데
지금은 치켜 오르던 수액마저 말라
얼기설기 뒤엉킨 부은 발등과
굳은살 투성이 발가락들
헐렁해진 껍질 속
추운 벌레들 품어 안고 편안히 누어버렸다
옹이로 남겨진 저 고집스런 직립의 욕망!
들끓는 생각
언제부터 비우기 시작한 걸까

햇살 火葬 중이다

   - 김0순「햇살다비식」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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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졸작 「어느 대나무의 고백」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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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자태 하나로
사시사철 그 자리에 서 있는
내게서 곧은 선비의 기상과 청빈을 운운하지만
끝없는 벼랑에 추락할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홀로 서 있는 외로움을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모태를 떠날때부터
벼랑끝 암벽에 매달린 채
엄동설한 삭풍에 야위어진
내 몸은 싸락눈의 무게에도 살점이 아스러진다

오뉴월 염천(五六月 炎天)
타들어 가는 몸을 감싸 안으며
토해 내는 진액(津液)!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에 분신들이 쓸려 갈 때
천길만길 떨어지는 공포
두려움에 뿌리마저 흔들거린다

고매(高邁)한 선비의 음풍농월(吟風弄月)속 낙락장송
고관대작의 천년 기둥
학덕 높은 문인의 다정자(茶亭子) 관상수
하다못해 세상사 지켜 주는 방풍림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 아, 그 놈의 꿈!
못 이룰지도 모르는 꿈을 위하여
흐르는 세월의 조급함에 서글픈 나는!
시들지도, 쓸려가지도 못하고, 힘겹게
비스듬히 하늘을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 권0우 「어느 소나무의 고백」전문

너무도 닮아있다. 자신의 시집에 실려 있으니 물론 그 시인의 시라고, 그 시인의 목소리라고 해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기엔 아쉬운 점이 남는다. 일반 독자들은 꼼꼼하게 읽고 비교하지 않는 한 모르고 넘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자신마저 속일 순 없다. 진실한가? 독창적인가? 하고 물었을 때 어느 것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면 시일 수 없으며 시인일 수 없다. 어느 시인인가가 전인격을 걸고 써놓은 시를 아무 고뇌 없이 복사해놓았다면 시를 어떻게 자신의 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필자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비슷한 사례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는 시인 자신에게는 물론 시단 전체에 좋지 않은 족적을 찍는 결과가 될 것이다.
다시 돌아가자. 시는 진실함과 독창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어쩌면 이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이라고나 할까?
늘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가?, 내 전인격을 담은 목소리인가?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장르보다 자기검열에 철두철미해야 할 것이다. 나 스스로부터 크게 되돌아보고 뉘우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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