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시와 시인 , 그리고 독자

아리박 2012. 2. 16. 19:01

시와 시인, 그리고 독자들 / 박제천

시란 무엇인가. 여기 대해서는 역사 이래로 수많은 답이 마련돼 있다. 그 답안을 읽는 일은 어찌 보면 시문학사 전체를 섭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인된 자는 거의 누구나 이 질문에 매력을 갖고, 자문자답해 보기 때문이다. 하늘의 성좌도를 바라보듯, 그 답안들은 시인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휘황하게 빛난다.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칠 만한 답안도 있고, 그 답안을 화두 삼아 하염없이 빠져들 만큼 황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그 수많은 답안 중에서도 엘리엇이 말한 ‘시에 대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의’가 가장 고전적인 모범 답안으로 꼽힌다.
시인들은 누구나 시란 그 무엇이 아닐까 궁리하고, 거기서 얻은 깨우침을 한편의 시로 써나간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평생에 걸쳐 그들이 찾아 헤매고, 꿈꾸며 느끼고 깨우치는 시를 써나간다. 작품 한편 한편이 그 순간 순간 시인이 찾아낸, 시에 대한 최선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에 대한 누군가의 특별한 정의에 시인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엘리엇의 정의는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들, 시란 무엇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상의 화두로 남아 있다.
‘시에 대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의’로 요약된 이 모범 답안은 대체로 시인들을 만족시키고 있지만 일반 독자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답안이다. 다시 말해 시에 대한 전문적인 정의이기에 다만 시가 무엇인지 궁금한 일반 독자의 궁금증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시의 정의에 관한 독자용의 해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무엇이고, 시를 읽으면 무엇을 배우거나 즐기는지, 무엇을 얻거나 깨우치는지 알고 싶어하는 단순한 독자들의 궁금증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 문제를 단번에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논리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대해 솔직하게 정의를 내린 몇몇 작품들 중에 그 해답이 있을 수는 있다. 실제로 나는 처음 시를 공부할 때 시의 정의에 대한 내 목마름을 해갈시켜준 작품을 만났었다. 뿐만 아니라 40여 년 시를 쓰고 읽으면서 아,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섬광처럼 지나쳐가는 시의 비의에 황홀해 한 적이 적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먼 먼 아지랑이 너머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와 가슴 속에 내려앉고
이내 하얀 뿌리를 내려
가슴의 진액을 빨아들이며
잎과 꽃을 피우고
나를 허무로 앓게 하고
몸져 눕게 하는
저것
…후략…
―문효치, 「시」

문효치의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시인의 가슴에 날아드는 것이다. 시인이 생각지도 못했던 미지의 생명체는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와 시인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시인의 진액을 다 빨아들여 마침내 시인을 몸져 눕게 한다. 시에 시달려본 시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작품이다. 시인의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감질만 내는 작품, 시인이 좇아가면 도망쳐버리고, 시인이 포기하면 다시 달려들기에 시는 많은 시인들에게 ‘시마(詩魔)’라 불리우기도 한다. 시를 쓰고 싶은 열망에 비례해 써나갈수록 깊어지는 상실감과 자괴감에 몸을 망친 시인이 얼마나 많은가. 한 일년 시를 잊어버리면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지고 머리가 시원해지지만, 시를 완전히 잊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시 찾아와 시름시름 앓게 하는, 마치 무당병처럼 평생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천형(天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가 이렇듯 시인을 괴롭히기만 한다면 어느 누가 시를 쓰겠는가.

잘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그대의 이름을 써보네
만년필을 고르면서.
가느다란가 굵다란가
나의 이름을 적어보네
시라고 써보네.

새 만년필로
시 한 편 잘 써서
지갑에 넣네.
―윤제림, 「시인의 사랑」

시는 어느 날 만년필을 고르면서 무심히 써보는 그대의 이름, 새 만년필로 써보는 나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샘솟아 오르는 그리움이자 새롭게 설레는 마음이자 누구에게 보여주기보다는 가슴 속 지갑에 잘 갈무리해두는 사랑이기에 시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또 한편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인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문득 육신과 자연의 어둠이 걷혀가는 신새벽을, 그 처음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신새벽, 그 처음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벌이 날아드는
그 순간, 꽃의 열림을
새가 날아오르는
그 처음의 날갯짓을
그러나 내게 보이는 건
오로지
상처받고
묶이고
갇힌 사람들뿐
저들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나는 결코
새벽, 새, 벌 따위의
시를 쓸 수 없다는 걸
―제임스 매슈, 「시」

꽃이 제 몸을 열어보이는 그 순간을, 새들이 비상의 몸짓을 보여주는 그 처음의 날갯짓을, 시인은 기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음의 한쪽에는 사람의 세상에서 상처받고 묶이고 갇힌 사람들이 살아 있기에 시인은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온몸으로 껴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세상은 때로 그러한 시인을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내칠 때도 많다.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기를 원하지만, 마음과 달리 소통의 손길이 불화의 발길질로 바뀌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사람을 섬으로 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바다로 본다. 지하철 정거장의 군중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얼굴들을 보면서 “검은 가지위의 꽃잎”으로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늙마에 애인이 있느냐고
나는 애인이 수도 없이 많다고 대답하였다

그 비결을 일러 달라기에
마음이 끌리면 주저없이 눈을 맞추고
눈이 맞으면 그 자리에서 한 몸 한 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비결이 신통치 않았던지
혀를 끌끌 차며 재주가 없어서… 어깨가 축 늘어지더군

그래서 시를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시경 이래로 시인이란 자들은
하늘의 별님 달님은 물론 풀이나 나무,
하늘 아래 움직이는 것들, 심지어는
바닷속의 물고기까지 이름을 지어주고,
입 맞추고 껴안고 춤추면서
한 몸 한 마음이 되지 않았던가
백석이 갈매나무와 눈 맞추고 기림이 나비와 입 맞추고
미당이 달과 한 몸 한 마음이 되는 그 방법을 배우라고 하였다

배워서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한겨울 눈 내리는 벌판이라도
껴입은 입성 훨훨 다 벗어던진 맨몸, 맨마음이라면
왜 눈과 눈이 맞지 않겠는가.
―박제천, 「두번째 詩論 ―애인」

사람이 사람과 따듯하게 만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한 몸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사람은 물론 자연이며 자연의 어느 생명체조차 가슴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라 해서 다를 바가 없다. 시란 바로 사람들의 삶이며 사랑이며 추억이며 죽음이며 운명, 헤어짐과 만남, 그리움과 외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기록을 미학적 장치로 바꾸어 줌으로써 독자 또한 시인과 함께 시의 그 비밀한 뜻과 향기를 가슴 가득히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의 평범한 진술은 그 ‘누군가’의 해석조차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님으로써 비범한 의미로 전환된다. “시가 뭐냐고”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랴. 시인은 결코 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시인의 답은 그 누구라도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대답을 찾기 위해서 그는 차라리 시인이기를 거부한다. 그 대답은 오직 빈대떡을 먹는 사람들, 바로 독자의 가슴과 가슴이 닿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濟州海女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오?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詩人인것을
―서정주, 「詩論」

결론하자면, 미당 서정주는 시란 “님 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바다 속에 남겨 놓은 제일 좋은 전복”이라고 제주 해녀를 빗대어 말한다. 그 좋은 시를 ‘바다 속에 두고서, 바다를 바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다 캐어낼 수‘도 없지만, 아끼고 아끼는 그 마음이 시라는 생각은 공자의 ‘시즉절(詩卽切)’, 쓰고 싶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이 시’라는 생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시란 무엇이고, 시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그와 상관없이 나는 오늘 또 한편의 시를 무심히 써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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