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환유적으로 말하기

아리박 2012. 2. 16. 18:56

② 어떤 어법으로 말할까

1. 환유적으로 말하기


우리는 흔히 시는 <비유적(比喩的) 어법>으로만 말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유적(換喩的) 어법>으로 쓰여진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런 시가 이해하기 쉬워 선호합니다. 따라서 시의 전통적인 어법은 환유적 어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환유적 어법의 유형과 기능, 이 어법으로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1) 환유의 기능과 유형


야콥슨(R. Jakobson)은 어법의 유형을 어떤 이야기가 로 이어질 때 연접(延接)된 방향으로 옮기는 방법과 어느 한 모티프를 골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전자는 <환유(metonymy)어법>으로, 그리고 라는 식으로 옮기는 후자는 <비유(me- taphor) 어법>으로 분류하고, 환유적 어법은 산문의 어법이며, 비유적 어법은 시의 어법이라고 주장합니다 1). 그리고 현대시론의 대부분은 그의 주장을 따라 비유적 어법만이 시의 어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 쓰여진 작품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환유적 어법으로 쓰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자 문화권에서 시의 경전으로 꼽아온 ?시경(詩經)?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체 305편 가운데 환유에 해당하는 ‘부(賦)’로 쓰여진 작품은 161편이고, 비유에 해당하는 ‘비(比)’로 쓰여진 작품은 21편에 불과합니다 2). 그리고 현대로 접어들어서도 독자들이 사랑하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정지용(鄭芝溶)의 「향수」, 김영랑(金永郞)의 「모란이 피기까지」, 조지훈(趙芝薰)의 「승무」, 박목월(朴木月)의 「나그네」를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 어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의 경우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시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s)’을 선택하여 그를 그려야 한다며, 비유적 어법을 주장한 엘리엇(T. S. Eliot)의 대표작 「황무지(The Wast Land)」도 이 어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직접 살펴볼까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슈타른버거호(湖)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톤 태공의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T. S. Eliot 3), 「The Waste Land : 사자(死者)의 매장(埋葬)」 첫머리에서

<

인용한 부분은 이 작품의 첫머리입니다. 그런데, <4월에 대한 화자의 생각→겨울에 대한 기억→화자가 슈타른버그에 머물렀던 여름에 생긴 일→자신에 대한 소개→사톤 태공 집에 있었을 때 일→자신의 생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겨울의 일이 생각나서 그쪽으로 이야기로 옮겨가고, 그 이야기가 끝나자 여름의 이야기로 옮기는 연접적(延接的), 계기적(契機的)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문의 어법이 환유라는 주장 역시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산문은 어김없이 이 어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유적 어법은 시와 산문에 두루 쓰이는 어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콥슨이 시의 어법으로 분류한 비유적 어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신문기사를 보면 ‘○○팀 몇 대 몇으로 승리’라는 식으로 제목을 뽑는 게 아니라, 그 팀이 ‘자이언트 팀’라면 ‘거인, 드디어 환호하다’라든지 ‘무릎을 꿇었다’는 식의 비유적 어법으로 뽑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의 어법이라고 하는 비유 역시 산문에도 쓰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좀 헷갈리는가요? 그건 시에서 쓰이는 비유와 환유, 산문에서 쓰이는 비유와 환유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시는 비유적 어법으로, 산문은 환유적 어법으로 쓴다고 분류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고른 화제들을 시로 쓰려면 <시적 환유(poetic metonymic)>와 <산문적 환유(prosodic metonymic)>, 그리고 <시적 비유(poetic metaphor)>와 <산문적 비유(prosodic metaphor)>부터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에서 쓰이는 환유나 산문에서 쓰이는 환유 모두가 연접된 방향으로 의미를 이동시킨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시적 환유는 아래 도표처럼 <빈틈>을 크게 설정하고, 함축적이고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화자의 판단을 내세워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열린 언술(言述)>을 취하고, 산문적 환유는 되도록 빈틈을 좁히고, 지시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인과관계를 따지면서 결론을 내리는 <닫힌 언술>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실선은 닫힌 언술, 점선은 열린 언술

앞에서 인용한 엘리엇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의 경우 논리적인 인과 관계를 맺지 않아 빈틈이 클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언어로 4월의 모습을 그리고,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겨울의 이야기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환유는 그냥 로 이어지는데 무슨 빈틈이 있느냐구요? 그렇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교에 왔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일어나자마자 식사를 한 건 아닐 겁니다. 이불을 개고, 화장실을 가고, 세수를 하고,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의 식탁 앞에 앉고, 가스 렌지 위해서는 부글부글 찌개가 끓고…. 아주 무수한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문적 비유의 빈틈은 화자도 독자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메울 수 있는 크기이고, 시적 환유의 빈틈은 시인이 의식적으로 설정하고, 독자가 독서를 중단한 채 상상력을 발휘하여 야만 메울 수 있는 크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시에서 환유적 어법을 택할 경우 이와 같은 빈틈의 설정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인은 빈틈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이야기를 생략하여 함축적인 이야기로 바꾸고, 독자들은 이 빈틈을 메우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읽어 시인의 정서와 사고 과정을 헤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시적 환유의 유형은 어느 한 모티프를 기점으로 삼아 같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일 방향 환유>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하는 <다른 방향 환유>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동일 방향 환유를 택한 예에 해당합니다.

원주고교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치악산을 한참 바라다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천장(天井)에서 겨울 바람이 달려가고 대한극장 이층 나열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 날, 서울역에서 나의 내부(內部)를 달려가는 겨울 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고려가요어석연구(高麗歌謠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 소리에 깨어난 아침, 차녀를 낳았다는 누님의 해산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 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본능의 바람이여, 아름다움이여.
―오탁번(吳鐸藩) 4), 「라라에 관하여」 전문



이 작품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라라’를 만난 이야기에서부터 오늘 아침에 그에 대해 생각한 것까지 순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모티프들은 어떤 사실만 이야기할 뿐, 화자의 판단을 유보하면서 열린 언술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일 방향 환유를 채택하면 이야기의 방향이 한 쪽으로 진행되어 화자의 의도가 분명해지고 전달력이 강화됩니다. 그러나 산문을 시처럼 쓴 것으로 보이기 쉽고, 전체 짜임이 평면화된다는 게 단점입니다. 위 작품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라라에 대한 그리움=바람>으로 바꾼 것도 이런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은 여러 방향 환유를 채택한 예에 해당합니다.

<1>
장미나무 밑에 강아지가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 있습니다.
(쥐약을 먹은 모양이다)
이미 물체로 변해버린 그 시체 위에 쏟아지는 여전한 햇살

<2>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3>
생후 일주일밖에 안 된 딸의 조그마한 발에다 뺨을 부비면서
아버지는 이 발이 앞으로 밟고 살아갈 세계를 생각했다.(후략)

<4>
이 세상에 가장 신선한 감촉(感觸)이 있다면
그것은 맨발로 풀밭을 거니는 감촉일 것입니다.

<6>
나는 필사의 도망자
숲 속에서 공연히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의 뒤를 쫓는다.(후략)

<7>
우리에겐 묘한 버릇이 있습니다.
열광하는 군중들 함성 속에서는 오히려 고독을 느끼고
월면(月面) 위에 서 있는 우주인(宇宙人)은
무수한 인류의 시선을 느낀다.
-김윤성(金潤成) 5), 「끝나버린 술래잡기」에서

이 작품은 모두 42개의 단장(斷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 그리고 원작(原作)에는 없는 번호를 제가 설명의 편의를 위해 붙였습니다.
그런데, <1>에서 <4>까지만 해도 앞에서 인용한 작품과 달리 <강아지의 죽음→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기→어린 딸의 발→맨발로 풀밭을 걷는 감촉> 등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방향 환유에 해당합니다.
이런 환유를 택하면 어떤 모티프를 선택하고 그로 인해 떠오르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들끼리 어울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초점이 잡히지 않아 토막낸 산문을 모아놓은 것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환유의 유형에는 이 두 기본형 이외도 전체 이야기가 그 무엇을 은유하되, 연접된 방향으로 전개하는 <복합환유(複合換喩)>가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엘리엇의 작품이나 다음 작품이 이런 예에 해당합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오규원(吳圭原) 7), 「한 잎의 여자․1」 전문



이 작품의 전체의 의미는 <쬐그만 여자=물푸레나무 이파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연은 환유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엘리엇의 작품도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유럽 사회의 정신적 풍토를 황무지로 비유하면서 전개 방식은 환유를 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합환유를 택하면 환유와 은유의 장점을 모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작품을 입체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한 부분이 너무 많거나, 비유의 원관념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는 두 어법의 단점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테마를 은유화하고 그를 위해 선택한 비유물을 중심으로 환유적으로 그리는 방식이 좋습니다.
복합환유 역시 같은 방향으로 전개하는 유형과 여러 방향으로 전개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유의 유형은 모두 <동일 방향 단일 환유>, <다른 방향 단일 환유>, <동일 방향 복합환유>, <다른 방향 복합환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적 환유의 기능은, 첫째로 산문으로 풀어써도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짧은 시 속에 담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문은 길이의 구애를 받지 않지만 앞 뒤 이야기를 인과적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중언부언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시적 환유는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는 <열린 언술(言述)>의 형식을 취하고, 그들의 인과관계는 독자 스스로 만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든 다 담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처럼 아무리 빈틈을 넓게 설정해도 를 통해 이야기의 방향을 감지하고, 독자가 그 빈틈을 메워 완성하는 방식이라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헤아리지 못해도 전혀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점입니다. 독자들이 환유적으로 쓰여진 시를 좋아하는 것도 이와 같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독자가 시인이 말한 것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김윤성(金潤成)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1>을 읽을 때는 무엇을 말하려는지 얼른 판단이 안 서 ‘모든 것은 죽는다’든지, ‘죽은 강아지가 불쌍하다’든지, ‘한 생명이 끝나도 세상은 여전하다’라는 식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2>로 넘어가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한 의도를 헤아리기 위해 다시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1>과 연결시키면서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라든지,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바르게 살아야겠다’라는 식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그로 인해 <1>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사고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3>으로 넘어오면 이런 기회는 더욱 늘어납니다. <1>이나 <2>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모티프를 해석해야 하고, 그렇게 해석한 것과 앞에서 확정시킨 의미를 연결하다가 어긋나면 다시 해석하여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N개의 모티프로 이뤄진 작품을 읽을 때 최대로 그를 해석하기 위한 N개의 상상력과 그 빈틈을 연결하기 위한 N-1개의 상상력, 각 단위를 읽을 때마다 새로 파악한 의미와 이미 해석한 의미를 연결하는 데 필요한 N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작품이 지시하는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서사적 속성이 남고, 평면화되며, 구조적 긴밀성과 시적 긴장이 떨어지기 쉽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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