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해방의 언어 그 날이미지를 찾아가는 시적 여정

아리박 2012. 2. 16. 18:46

<1997년 경향신춘 문학평론>

해방의 언어 그 날(生)이미지를 찾아가는 시적 여정 …오규원論-

                                                                                     이연승


                             1. 들어가면서:시적 「언어」의 폐허와 시인의 자리

짧은 시간동안 급속한 정치, 경제, 문화적 변혁을 치러야 했던 우리 사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기에 놓여있다. 지난 시대의 「중심의 담론」은 붕괴 되었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분산된 지형도를 그리면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90년대 중반을 가로지르면서 탈중심, 다원주의, 대중문화, 일상, 생태학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기존의 시각과 삶의 양식을 해체하려는 물결이 등장한 것은 분명 변화하는 우리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적인 유행에 민감한 저널리즘과 컴퓨터를 비롯한 영상 산업의 폭발적 팽창, 그리고 세속적이고 일상화된 욕망의 분화구 사이에서 90년대의 분방하고 다발적인 논의들은 체계적인 사회, 문화적 맥락으로 조성되지 못한채 파편화되어 있다.

전망이 불투명한 사회속에서 문학은 지루한 소모품으로 전락하거나 감각적인 새로움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에 편승하여 상업적 생산과 소비의 유통구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나는 삶의 진정성이 외면당하는 가치부재의 현실, 경건성이 질식당하는 문학판에서 문학이 책임질 수 있는 몫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자문한다.

우리가 문학에서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한 비판적인 사유의 치열함과 부단한 자기 갱신으로 거듭나는 정신적 모험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중견시인을 만난다. 지각변동과 같은 급속한 사회변화속에서도 시종일관 「언어」라는 주제에 집요하게 자신을 쏟아붓고 있는 시인. 그는 우리 시단에서 30년 가까이 언어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민을 통해 시형식, 시예술의 다양성과 새로움을 모색해 온 오규원이다. 새롭다는 것은 곧 한 시대의 전위적 측면을 의미할진대, 그에게 새로움이란 항상 새로운 감성의 체계와 새로운 긴장의 창조라는 시적 전망의 개진으로 이어져왔다.

최근 시집 자서(自序)에서 시인은 『모든 존재는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 참된 의미에서, 모든 존재의 언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도 그 현상의 하나이다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집이 그 이전의 시집들과 다른 특성을 보이는 것은 「현상」에 대한 시적 탐구가 하나의 미학적 방법론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규원 시를 관통하는 「언어」라는 문제는 그의 시세계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그리고 최근의 인식상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상 자체에 대한 탐구와 그가 실험하는 「날(生)이미지」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의 초기시부터 근작시까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본고에서는 오규원의 초기시를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사랑의 기교」(시선집)(1975)까지로, 중기시는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敍情詩」(1981) 「가끔은 주목받고 싶은 生이고 싶다」(1987)까지로, 후기시는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로 나눈다>

자신이 쓰는 모든 시는 「해방의 이미지」라는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을 꼼꼼이 뜯어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와 삶에서 질문된 「언어」를 투사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열어나가는 오규원의 시적 행로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2. 언어화된 추상의 세계, 「吳氏의 마을」

오규원의 시적 언어의 특징은 우선, 그 언어가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시는 현실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변형이며 재창조이다. 언어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대상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던 초기시. 시인은 「나를 확신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으며 「萬象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는다」(「말-속 순례10」에서)라고 쓴다. 그가 시종일관 「말」이라는 시의 질료를 문제삼고 시에 대해 되묻는 것은 「확실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자기 욕망의 소산이다. 시인은 언어를 매개로 해서 관념과 사물을 자신의 시적 공간속에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우 비유적이고 수사적인 초기의 작품들에서 시인은 시적 대상에 독특한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데, 그는 비록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를 포착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사물이 환상이든 아니든간에, 사물들이 관념속에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고요한 환상의/출장소/뜰, 뜰의

달콤한 구석에서/언어들이/쉬고 있다.

추상의 나뭇가지에/살고있는

언어들 중의/몇몇은/위험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떨어져 죽고.

나의/고장난 수도꼭지에서도/

뚜욱 뚜욱/언어들이 죽는다.

건강한 언어의/아이들은

어미의 둥지에서/알을 까고, -「몇 개의 현상」에서



우리는 이 작품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포착하기 이전에 관념적인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두 개의 현상-「달콤한 구석에서 쉬고 있」으며, 「위험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 떨어져 죽」는 시니피앙의 움직임을 목도한다. 그의 언어는 현실 혹은 실재라는 시니피앙을 지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니피앙을 차용해 독자적이고 원형적인 제3의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그가 꿈꾸는 언어, 순수한 언어가 살아 숨쉴 수 있는 원형의 공간은 「고요한 환상의 출장소」이다. 그 추상적인 공간은 구체적인 현실의 음영이 제거된 「환상의 땅」으로 상정되며, 현실과는 대립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환상의 땅」에서 언어는 훼손되기 이전의 순결한 시간과 공간을 지향하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 그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 속에서 이것은 가능해지며 「의식의 먼 강변에서/출렁이는 물결 소리로/차츰 확대」되거나 「소멸을 딛고 일어」나 자유로운 질서 속으로 흩어져, 완전한 존재로 빛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초기의 오규원이 열망하는 순수한 언어는 그의 관념 속에서 조형된, 추상의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투명한 심상의 바다 속에 사는 낱말은

외로운 몇 사람이 늘 서 있는 그 배경만큼

조용히 사색의 귀를 열고 있다                 -「현상실험- 別章」에서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언어는 추상적인 공간-「투명한 심상의 바다」에서 「사색의 귀」를 열어놓거나 땅 위에서 「조용히 쉬며 빛」난다. 타락한 현실 속에서 언어는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시인은 사물의 핵(核)을 간직하고 있는 절대언어를 꿈꾸고 있지만, 이런 언어는 현실과는 괴리된채, 그저 「흔들리」거나 「비키니 스타일로 벗어버린 대낮의 감미로운 피부」로 떠돌 뿐이다. 이 환상적인 영역에서 시인은 언어를 끌어들여 확정된 의미구조 속으로 가두어 둘 수 없다. 말은 그 자체로 자유로우며 「언어의 뚜껑을 열고 나와 다시 독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문학사를 읽은 후 지금까지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그녀의 신    장, 머리칼의 길이, 눈의 크기, 그런 것은 하나 모른다.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다고 시에    적는다.                  -「시」에서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시선은 「시」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투사시키면서 굴절되어 나타나는데, 「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작품은 그가 시를 대하는 태도를,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한 편의 시가 실제의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인물을 그대로 형상화시키거나 지시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여기에 자신의 관념을 육화시킨다. 에밀리 디킨슨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다고」 자신의 시에 적는 것. 이것은 자신이 꿈꾸는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며 관념화시키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실제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까만 사마귀가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시인의 관념 속에서 새로운 시적 향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는 시의 세계는 어떠한가.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幻想밖에는.         -「龍山에서」



자원전쟁시대 유류전쟁시대 그러나 걱정마라, 우회전쟁시대,

이 글은 패배전쟁시대의 시 얘기가 아니니 오해마라.

   시인의 나라는 높은 산 골짜기에 있다.                 -「시인들」에서



순수한 언어, 순수한 시의 세계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 「높은 산 골짜기」에 존재한다. 그 세계는 「환상」의 세계이며 현실적인 가치와는 위배될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따라서 시인은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라는 선언적인 진술을 통해 시의 세계가 풍요롭고 초월적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뒤집고, 시와 대립되는 현실이 얼마나 위악적인지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기 때문에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언어와 삶, 현실과 순수성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는 오규원에게 더욱 절박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안녕」치 못한 시대, 「패배전쟁시대」, 그리고 일상화된 억압의 현실 속에서 절대적으로 순수한 언어가 유지되기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시와 삶의 대립에서 삶의 패배를 읽어내지만, 순수한 언어에의 믿음과 타락한 세상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 사이에서 순수한 언어를 갈망하는 것이야말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힘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어의 명징함, 그리고 의식의 깨어있음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좌표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리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文碑도 먼저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

남들이 시를 쓸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남들이 시를 쓸 때」에서



  시인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의식이란 깨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쓰는 일」은 「민망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인 삶을 포기하고 훼손된 현실과 제도화된 가치에 스스로를 던져놓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이야말로 바로 시쓰기의 원동력이다. 시인은 순수한 의식과 진정성을 되묻고 이것을 추구한다. 그에게 안정을 부여하는 언어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현실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간직할 수 있는 내적인 동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깨어서 견뎌야 하며 자신의 의식을 일깨워 건강한 언어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정신성을 벼려나감으로써 시의 세계를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의 세계에 두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純粹詩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는 것은 언어의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현실속에서 와해되어 버릴만큼 현실은 타락했고 자신은 현실속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오규원은 언어를 믿는 것이 자신의 소외를 상쇄시켜 주리라 믿었고 이것은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적 주체의 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오염된 현실 속에서도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존재, 진정한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언어의 순결성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길들여진 관념이나 제도화된 가치, 그리고 굳어진 언어와의 싸움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띠고 수행된다. 그의 시작(詩作)은 언어화된 현실의 힘을 빌려 세계를 인정하면서 거부하고 거부하면서 인정하는 긴장과 갈등의 양극을 순회하면서 새롭게 펼쳐진다.



                         3-1. 등기된 언어질서 읽어내기

순수한 원형의 공간을 지향하면서 순수한 언어를 꿈꾸는 시인의 의식은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지만 자신의 관념속에서 언어와 삶을 추상화시켰다는 것은 현실의 음영을 틈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문제적이다. 순수한 언어, 투명한 심상의 세계를 다루는 언어들은 추상적인 세계에서만 가능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형상을 통한 인식이라는 문제가 자신의 관념속에서만 「위험하게」채색될때 한 개인의 삶은 표백될 수 밖에 없다.

세번째 시집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에서부터 시인은 일상의 구석 구석을 대상화시키면서 관념의 개념적 인식에서 탈피, 현실로 무게중심이 바뀌어가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楊平洞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永登浦. 永登浦에서 11시 열차로 사랑하는 서울을 떠남.    내 사랑은 두고 서울만 떠남. 좌석이 없어 입석을 구입, 맥주를 마시는 핑계로 식당차에     편히 앉음. 떠나며 돌아보니 속옷 바짓가랑이가다 나온 永登浦가 떠나는 나를 보더니 한    번 픽 웃고 돌아섬. 떠남. 역사의서울, 꿈의 서울, 여자의 서울                

                                          -「한 나라 또는 한 女子의 길」에서



시의 화자는 이제 양평동으로 영등포로, 거리로, 남산으로, 버스 정거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풀어 놓는다. 관념의 입김이 지배적인 초기시들과는 달리 시어선택이 상당히 대조적임을 눈치챌 수 있다. 기차의 식당차, 술집 뒷골목, 쇼핑센터같은 도시적인 삶의 공간들과 이에 수반되는 세목들이 시의 소재가 되고 시인은 현실속으로의 적극적인 진입을 시도한다.

시인은 「양평동」 연작을 쓸 무렵부터 시의 힘에 대해 확신하면서 시의 순수성이 마주친 현실을 시 안에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정적인 세계의 모습, 일그러진 현실의 이면을 들추어내면서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태가 가장 고도화된 도시공간에 초점을 둔다. 무질서와 타락, 자본으로 넘실거리는 도시공간은 현대 산업사회의 기형적인 구조에 의해 획일성과 자동성을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부여받는다. 시인은 이러한 부정적인 세계의 모습을 시의 현실로 시화(詩化)한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봄. 거리는 오늘도 安寧함. 安寧한 거리에 하품나옴」(「나의 데카메론」)이라거나,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몇 가닥을 뽑았고/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어 보였고 또/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빈약한 상상력속에서」)에서처럼 그가 몸담고 있는 도시속에는 수동적이고 사물화된 우울한 일상의 모습이 넘쳐 흐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부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수락하지는 않는다.



   幻想.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실바의 펠리시아노 기사담 다시들다 팽개침. 등기되지 않    은 현실, 幻想. 등기되지 않은 현실속으로 뛰어듦. 갑옷,투구, 방패 손질함. 스스로 구속할    자기의 이름들을 구함.        -「등기되지 않은 현실 또는 돈키호테 略傳」에서



시인은 투구와 방패를 메고 「등기되지 않은 현실」속으로 뛰어드는 현대의 돈키호테이다. 그 환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등기된 현실만을 보게 될 때 시인은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획일적인 판단과 시각을 강요하는 제도화된 현실을 「등기된 현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 투시해야 할 것은 「당신의 눈에도 보입니까. 등기되지 않은 현실」이라고 되묻듯이 그 등기된 현실이 아니라 「등기되지 않은 현실」 -현실과 대립되는 환상, 꿈 이상같은- 환상극의 현실이다. 환상과 현실이 전도된 돈키호테의 희극적인 모습속에는 일그러져 있는 사회의 비극성과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이제 시인은 그 모순된 현실속에서의 억압적인 삶을, 등기화된 언어질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시는 추상的이니 구상的은 오해마라. 시인은 病身이니 안 病身은 오해마라. 지금 한국은    散文이다. 정치도 散文 사회도 散文 시인도 散文이다. 散文的이기 위한 전쟁시대, 시인들    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는 시인의 빛나는 制服, 끌려가지 못하는 病    身들만 남아 制服도 없이 아, 시를 쓴다.                          -「詩人들」에서



중기로 접어든 오규원의 시는 「산문적」인 삶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보낸다. 70년대. 고도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잘 살아보자」는 자력갱생의 성장 이데올로기 깃발만이 맹목적으로 휘날리던 시절. 급속한 사회변동과 자본주의의 거센물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개인의 실존은 위협받거나 위태롭게 흔들린다. 현실의 억압을 견디기에는 전통적인 시 양식이 무력할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좌절감이 깔려 있는 이 시는, 당시 오규원의 시적 입지점을 드러내주는 시론이기도 하며 이후의 시의 향방을 예고해주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삶 속에서 오규원의 시는 본격적인 「산문화」의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양식으로서는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계는 복잡하고 추악하게 뒤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지적인 양식은 점차 사회 비판력을 얻게 되며, 그는 어떻게 현실에 새롭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의식을 반어나 패러디 같은 양식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속하는 시들은 대부분 희화적인 어조와 본격적인 일상어를 채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현실과 세계에서 오는 갈등과 중압감에 대응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제, 시인은 모든 「기교」를 동원해 현실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3-2. 현실을 방법적으로 드러내기-시쓰기의 기교



사랑이 技巧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同義反復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사랑의 技巧. 2」에서



시인은 현실속에 침윤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반성적인 인식을 개입시킨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교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사랑이 곧 기교라는 등식, 이 「멍청한 명사」에 매달린 화자는 사랑도 꿈도 시쓰기도 그 결과가 비참한 것임을 반어적으로 깨닫는다. 「슬픔의 기교」는 그에게 곧 시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규원은 기교 그 자체를 시화하거나 추구하는 시인이 아니다.

그가 기교를 시화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시작(詩作)행위에 대해 매우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자신의 시작의 의미를 반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방법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방법적 긴장」은 그의 시작 행위의 숨겨진 원리이며, 현실에 대한 시적 주체의 인식을 심화시켜 주는 계기로서의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기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말하는 기교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나며 타락한 현실, 타락한 언어가 가진 허위의식을 드러내려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을 규정짓고 있는 삶과 세계에 우회적인 태도, 즉 시는 언제나 「너의 패배가 아닌 나의 패배」라는 자조적인 진술을 통해 현실과의 의식적인 긴장된 거리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묵의 상징시대, 동사가 없는 시대, 물먹이기 시대」(「물에 물먹이기」에서)의 한 복판에서 현실적으로 순수한 언어란 불가능한 것임을 고통스럽게 깨달으며 「아직도 서정시가 씌어지는」 현실을 「신기해」한다. 현실은 시인에게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것이며 타락한 세계에서 왜곡되지 않은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는 현실과 시가 상호대립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믿음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초기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오규원은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되나」(「버스 정거장에서」에서)라고 반문하면서 일상의 공간에서 시의 의미공간을 더 넓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시양식으로부터 탈피할 적극적인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현실을 파편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상상력과 현실의 긴장관계를 끝까지 견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기존의 규범적 사고와 언어적 질서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인식과 지평의 전환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현실과 대결하는 시적 정신은 더욱 팽팽한 긴장을 수반하며, 그를 점점 더 「싸움」의 복판으로 나아가게 한다.



                 3-3. 기능화 된 언어를 전복시켜 해석하기-방법적 인용



                          ♀♀ 중간생략 ♀♀



시인이 한창 원기왕성한 시절, 광고문구나 CF를 방법적으로 인용한 일련의 상품 광고시는 도구화된 사회에서 기존의 시 언어가 아닌 도구화된 형태의 글쓰기, 즉 새로운 미학적 모험이라는 전략으로 맞선다는 점에서는 가히 선구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시적인 탐구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학적 언어」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순수한 문학적 언어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긴장된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문제가 더 절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4. 현상의 시학적 탐색-「날(生)이미지」로

1991년에 출간된 『사랑의 감옥』과 1995년에 출간된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에서 시인은 다시 「문학」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문학적 언어의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오규원의 반어적 어법이나 광고 패러디시는 시의 의미공간을 보다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와 정치적인 억압을 날카롭게 풍자,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당대적인 의미를 얻었지만, 고도로 다원화되는 혹은 변화되는 현실 사회에 광고형식의 기능적인 언어로는 더이상 맞설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화된 현실의 힘을 빌려 세계의 허구성과 절대적 의미를 해체하고자 하는 중기의 문명비판시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비전을 확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광고라는 기능화된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 그것은 비슷한 방식의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그로 하여금 다시 「언어」의 문제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쓰기와 시적 방법론에 유난히 예민했던 오규원은 파편화된 형태로 파편화된 사회에서의 시쓰기란 더 이상 적절한 방법이 아님을 쉽게 간파했을 것이다. 도구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언어를 「해석과 환원」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던 오규원의 시들은 이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자신의 관념으로 해석해 오면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기제가 다름아닌 은유의 원리라고 파악했다.

그러나 은유적인 해석은 일종의 명명(命名)행위이며 어느 정도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왜곡할 수 있는 모순과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삶의 다양한 양상을 획일적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현실의 세목을 개념화시켜 해석하고 나열해오던 기존의 은유적인 방법론을 반성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시선과 현상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그 질문과 반성은 초기시에서 던져지던 관념적인 형태, 혹은 중기시에서 던져지던 도구화된 형태의 것이 아니라 보다 실체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한 남자가 가운데가 접힌 식단표 사이로

머리를 박는다 한 여자가 즐거운 얼굴로

남자의 세계를 건너다본다 건너다보는

세계는 아름답다-고 누가 말했다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믿고 싶다 그 사이 벽을 타고

기어내려 오던 ··고고한 가락은 힘에

부치는지 여자의 목을 잡고 늘어진다 오오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

남자는 다시 식단표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여자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톡톡친다

세상이 저렇게 가볍게 톡톡 울린다고 누가 말했다면

이 순간을 위해 내가 믿지 못할 이유를 누구에게 물어보랴?

                        -「세계는 톡톡 울리기도 한다」에서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즐겁게 연상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톡톡」치는 여자의 이미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투명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두 시집에는 유난히 의성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톡톡」이나 「툭툭」 「척척」 「쭐쭐」이라는 의성어마저 일종의 부피감을 느끼게 한다. 일상의 삶을 가볍게 흐르도록 만드는 시인의 감수성은 「톡톡」이라는 의성어에까지도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물과 현상 그 자체를 보다 투명하게 인식하려는 태도와 깊이 맞물려 있으며, 시인은 이런 시선으로 아름답고 선명한, 그러면서 유의미한 삶의 한 장면을 인식의 선반위에 진열하고 있다.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    리라만                          -「사랑의 감옥」에서



시인은 길 위에 펼쳐진 소박한 삶에서 의미의 공간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엄마는 뱃속의 아이에게 「어찌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려 가」겠다고 말한다.

추위와 가난, 고통으로 얼룩진 이 척박한 세상은 견고한 감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고르는 「구멍 숭숭한 털옷 안의 집」이야말로 삶의 고통과 갈등을 무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인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리 갇혀 있어도 힘들거나 외롭거나 고통스럽지 않기에 뱃속의 아이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구멍 숭숭 뚫린 남루한 털옷,- 「사랑의 감옥」은 삶의 긍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해방의 이미지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여성의 모성애를 세계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변주시킨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삶의 긍정과 희망이야말로 감옥같은 현실을 넉넉히 감싸안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시인의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 중간생략 ♀♀

   버스 정거장 푯말이 하나 있다 쇠기둥과 나란히 선 한 사내의 얼굴도 팻말처럼 동그랗    다 동그랗고 차다 차들이 다니는 길 안쪽 경흥공업 주식회사 건물은 사철 푸른 나무 울타    리가 꽉꽉 지키고 있다. 스포츠형 머리의 학생이 휘파람을 불며 사철나무 아랫도리를 구    둣발로 내지르고 있다.         --「외곽」에서



시인은 풍경의 한 장면과 사물을 단편적이면서도 기계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앞의 작품들에서는 객관적인 익명의 정조만이 감돌뿐 시인의 존재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관념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언어를 그는 「대체관념」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재해석이나 재구성이 아닌 의미가 정해져 있는 형태가 아닌 다른 어떤 것. 명명하거나 해석되기 이전의 알몸의 사물과 현상. 이것을 시인은 「날(生)이미지」라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명명하고 해석할때 중심축으로 쓰는 은유적 수사법을 버리고 사물을 묘사할때 쓰는 환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 두면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체의 관념을 거부하고 시를 쓰겠다는 이유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 의미로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의미는 존재의 진실을 은폐하며 사물과 세계를 훼손시키고 파편화시킨다.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독재라는 정치적 메타포와 같다. 여기서 시인과 독재가는 근본적으로 만난다」(「네 개의 노트」)고 한 산문에서 이미 시인 자신이 밝혔듯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허구성을 파기하는 방법은 자신과 세계를 구속하지 않는 살아있는 현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언어로부터 혹은 인간의 일정한 시각으로부터 의미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의미의 공간을 지워나가고 언어에 자유를 불어넣을 것. 그것이 최근의 오규원이 보여주고 있는 작업이다.



                 5. 나아가면서:언어가 창조한 「해방의 이미지 공간」

우리는 언어의 관념성에서 출발한 오규원이 그의 시작 과정에서 어떻게 그 관념성을 반성하고 물신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으며 또 끊임없는 방법론의 갱신에 따라 현상의 탐구로 나아가게 됐는지를 살펴보았다.

시종일관 「언어」라는 문제를 중심축에 두고 70·80년대 자본주의의 기능화된 사유구조와 파편화된 현실에 맞서는 대결의지를 보여주던 시인이 90년대의 변모를 거쳐 최근 시집에서 관념과 의미를 배제한 「날(生)이미지」를 운용(運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날(生)이미지」는 시인의 언급을 빌리자면 「정해져 있는 의미가 아니라 활동하는 이미지」일 뿐이므로 세계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왜곡하거나 파편화시키지 않는다.

사물이나 현상 그 자체가 가지는 한 순간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세계의 현상을 획일적인 관념의 틀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시인의 노력은 초기부터 탐구해왔던 죽은 관념이나 죽은 언어와의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의 껍질을 벗겨나가는 것.

사물이나 현상을 내쪽으로 끌어당겨 해석하기보다는 시인 스스로 현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고 수용하는 것. 그리고 의미의 세계보다는 실체의 세계를 지향하는것. 이것이 오규원이 도달한 시적 여정의 한 결론이다.

그 살아있는 의식속에는 시인 스스로 「톡톡」치면서 열어보인 우주의 공간이 꿈틀거리는 삶이 스며들어 있다. 나도 그 「톡톡」두들긴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언어가 창조한 시원(始原)의 공간속에서 새롭게 열린 사물과 세계를 꿈꾸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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